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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한다

LNCK 2013. 7. 7. 05:35

◈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한다        마10:24~25, 요13:16~17        편집자 칼럼

 

 

 

▶시중에, 이런 말이 회자되어 집니다.

어떤 설교자는, <교인 상위 10% 수준에 맞추어서 설교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신앙수준이 높게 설교를 하면, 나머지 90%교인은 따라온다고 합니다.

 

반대로 어떤 설교자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는 쉬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누가 퍼트린 말인지는 모르나 예수님의 설교도, 모든 세대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쉬웠다고 말합니다.

 

위 두 가지 의견이 각각, 나름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이런 가운데, 제 3의 명제를 제시해 봅니다.

<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한다> 입니다.

초급반 설교이든지, 고급반 설교이든지.. 설교시간에, 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하면 좋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 싫어합니다.

여기서 ‘설교’란, 지적하는 설교, 교정하는 설교, ‘치는 설교’를 뜻합니다.

성경적 원리에는, 교정하는 설교가, 설교의 중요 목적 중 하나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사도바울은, 교훈/책망/바르게함/의로 교육함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위 구절에 근거해서, 전도사님이 열심히 설교로 책망을 했는데,

나중에 내려오면, 엄청 욕을 먹습니다.

사람들이 설교자를 비난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너나 잘 하세요!’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설교자를 비난하는 것이, 또한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구역예배 설교나, 심방설교는 특히 ‘교정 설교’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중을 향한 익명성의 설교가 아니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개인을 향하는 설교이기 때문에

듣는 성도님이, 성자가 아닌 이상,

교정 설교는.. 치는 설교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심방 후에 큰 시험에 듭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논지는

그런 저런 이유에서, 특별한 예외, 즉 성령의 강권적 역사를 제외하고는

설교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설교자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이런 말을 잘 쓰지 않지만, 과거에는 이런 말이 한때 유행했습니다.

‘또 설교하시네!’

 

부모가 뭘 야단치고, 훈계를 하면,

자녀가 비꼬듯이 대꾸하는 말이 ‘설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허물을 더 많이 봅니다.

성도님들이 목회자의 허물을 보는 것에 비교하면, 더 많이 적나라하게 봅니다.

 

그렇게 부모의 허물을 보면서, 평소에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데,

부모가, 내가 부모니까 너는 내 말을 당연히 들어야 한다는 가치관에서

자녀를 훈계하면,

사춘기가 지난 자녀는, 당장 반발합니다. ‘설교 그만 하세요!’

한 마디로 ‘너나 잘 하세요!’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물론이요, 가정에서 부모도

설교는 항상 자기 자신을 향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을 교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연히 교정은 해야지요.

 

다만 ‘덜 익은 사람’은,

자기에게는 설교하지 않고,

항상 다른사람만 겨냥하여 설교하려고 하니,

아무리 자기에게 직함(타이틀)이 있어도,

사람들은 듣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2. 그래서 설교를 두루뭉실 하게 합니다.

조금이라도 성도님들을 비위 상하게 해서, 득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도님들도 아우성입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에서 치이고,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상처 받고,

교회에 하나님께 위로 받아보려고 왔는데, 지적하는 설교를 듣게 되면,

성숙한 신자가 아닌 이상, ‘내가 주소를 잘못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리 저리 재보면,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과 소망을 불끈 갖게 하는 설교를 안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설교가.. 두루뭉실 해 진다는 것이지요.

그런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꼬박 10년을 빠짐없이 다녀도, 전혀 신앙적인 성장이 없습니다.

(구원을 완성해서, 천국에나 안전하게 갈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전혀 듣지 못하고

그저 위로, 격려, 용기를 주는 설교만 계속 들은 결과입니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교정,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는 설교를

설교자가 자기 자신을 겨냥해서 설교할 때

교인들이 상처를 안 받으면서도, 스스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람은 ‘영물’이라서, 느낌이 있고, 낌새가 있고, 분위기가 있습니다.

신자 자기를 겨냥한 설교인지, 아닌지... 분위기와 진정성으로 금방 파악합니다.

 

    참고로, ‘성경적인 교정 원리’는, 마18장에 근거, 먼저는 일대일로 은밀하게 합니다.

    그 다음에 두 세 교인이 가서 말하고, 그 다음에 온 교회가 말합니다.

    교정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지혜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교정하는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대세입니다.

그렇다보니 지금은 두루뭉실한 설교가 대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 <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한다>입니다.

 

▶3. 자녀는, 부모의 등뒤에서 배운다.. 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제자 양육 과정을 아무리 빡세게 운영해도,

제자가 만들어지지 않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든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은

뭘 설교와 교육으로, 즉 입으로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고,

스승이 먼저 본을 보여야.. 비로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설교자는,

자기가 먼저 ‘신자 되기 원합니다’ 라는 찬송가를 매일 부르면서,

설교단에서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성실히 ‘구도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마10:24~25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즉, 성도님들이 목회자의 믿음 수준만큼 되는 것이지요.

위 말씀은, 성도님들은, 목회자보다는 더 수준이 높을 수 없고,

그러나 최선을 다하면, 목회자 수준만큼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3:16~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설교자는, 스스로에게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수준을 높이는, 최고의 제자 양육의 방법은,

먼저 자신이 최고의 수준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등 뒤로 배우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과거의 우리 가정의 비극, 우리 공동체의 비극은

‘자기가 자기에게 설교할 줄 모르고,

설교는 항상 다른 사람을 겨냥해서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설교를 쉽게 해야 한다, 아니다. 어렵게 해야 한다’를 논한 것입니다.

그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무시한 발상이었고,

그런 사고를 지니고 살았다는 것은.. 말이 조금 쎈 표현이지만, 비극입니다.

   

처음에는 몰라서 그랬지만,

신앙이 많이 성숙되고 발전한 지금 시대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