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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적인 삶의 완성

LNCK 2013. 7. 10. 12:20

◈사도행전적인 삶의 완성           행28:1~10            출처보기

 

▲1. 본문은 사도 바울의 로마를 향한 여정과 관련된 단순한 사실을

보고를 목적으로 기록(서술)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앞장 27장과 마찬가지로, 누가를 통해

사도행전을 저술하시는 성령님께서

사도행전의 결론으로서 사도행전적인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그림 그리듯 보여주고 계시는 거지요.

 

사도행전은 여러 가지 의의가 있겠습니다만,

공생애의 주님이 신앙의 주가 되신 뒤에 믿는 사람들과 동행하신

최초의 기록들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그 의의가 큰 것이지요.

 

즉 공생애 때 주님은 육체 안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셨어요.

그리고 부활 승천 후에는 성령 안에서 사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이 승천 후 성령 안에서 사도들과 함께하심은

사도들에게서만 일어나는 그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거지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에 의해 이끌리며 이루어진 삶이

바로 사도행전적인 삶이라는 겁니다.

 

▲2. 사도행전적인 삶의 모습을 한 컷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적 말씀이

바로 유라굴로 광풍 사건이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의 위세 앞에서 손발이 묶인 채 대작하는 풍랑에 속절없이 쫓겨 가는 상황에서

유라굴로 대신 ‘하나님의 뜻의 바람’을 대입하면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적인 삶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미 이렇게 신의 바람에 쫓기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바울 개인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바울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능력으로

그에 대해 달리 어떻게 손을 써 볼 수 없는 강력한 유라굴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앞장에서 보면 미항에서 겨울을 나자고 바울이 제안하지 않습니까?

미항은 겨울을 나기에는 모든 여건이 적합하지 않은 항구였다고 합니다.

 

서둘러 조금 더 항해를 해서 서쪽으로 65km떨어진 뵈닉스에 도달하면

훨씬 유리한 상태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선원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상식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이렇게 확고한 상식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미항에 머물기를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바다로 나서기 전 미항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미 자기로선 달리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광풍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항에 머무르라 하시는 하나님의 뜻의 광풍이었지요.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으로 받아들여서

그 기세에 쫓기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음을 인정하며 살 때

사도행전적인 삶이, 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가벼이 여겨 아랑곳 하지 않고

대신에 상식과 경험과 소원을 따라 뵈닉스로 떠난 선원들처럼

나 스스로 원하는 바를 향해 쫓아가는 비 사도행전적인 삶을 살다가는

반드시 실제 환경적 유라굴로 앞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야만 하는

상실과 환란의 때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지요. ☞관련글/ 神바람에 쫓기는 삶 

 

▲3. 그럼 어떻게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유라굴로 같은 광풍으로 내 마음에 받아들여

그 광풍에 몰려가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내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방향을 조정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내 생각과

그의 수하인 내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계속 이러한 고백과 인정이 반복되고 유지 될 때

서서히 하나님의 뜻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생활화 되면

삶의 상황에서 이 바람을 느끼고, 그 바람에 쫓기는 자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봄바람으로 다가오던 것이 거센 바람이 되고,

거센 바람이 다시금 태풍이 되고 유라굴로 같은 광풍이 되어서

내 삶을 몰아 갈 것입니다.

 

▲4. 이제 바울이 타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배는

광풍 유라굴로에 모든 것을 맡긴 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열나흘을 보내게 됩니다.

 

14일 동안 선장도 선원도 선주도 승객도 백부장도

광풍의 위세 앞에서 손발이 묶인 채 아무것도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배에 남은 희망이라고는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함께 타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전무합니다.

모두 그냥 속수무책으로 바람과 물결에 떠내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지금의 말타 섬인 멜리데 섬입니다.

 

멜리데 섬은,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구두코 부분에서 아래로

시실리 섬이 있는데, 그 시실리 섬 아래 쪽 100km지점에 있는 섬입니다.

 

그러니까 손 놓고 바람과 물결에 몸을 내 맡기고 14일 동안 쫓겨 왔지만

사실 로마를 향해 그리 크게 벗어남이 없이 제대로 서쪽으로 온 거예요.

 

더구나 기가 막히는 것은, 전혀 방향이 조종 될 수 없는 배가

그리스 반도 아래 그레데 섬의 한 항구인 미항에서 출발해서

멜리데 섬에 도착할 확률입니다.

 

이 섬을 지나쳐 버리는 날에는, 정말 로마로부터 멀어짐은 물론

망망대해에서 더 이상 버텨내어 구원받을 여망이 없는 것이지요.

 

멜리데 섬은 동서로 30km 남북으로 15km 정도 밖에 안 되는 조그만 섬 이예요.

시실리에서 100km 아래에 그리고 북동아프리카 해변에서 340km 북쪽에 위치합니다.

그러니까 시실리와 아프리카 북동해변을 잇는 440km로 넓게 지중해가 벌어져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광활한 사이에서 전혀 조종이 안 되는 이 배가

순전히 거센 바람과 출렁이는 물결에 14일간 떠 내려와서

15km 안으로 들어와야 되는 거지요. 확률이 3, 4% 정도입니다.

100번 시도되면 3번 정도 성공할까 말까 하다는 겁니다.

 

▲5. 내 계산도, 의도도, 소원도 모두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쫓기어 몰려가는 삶! 염려 되세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서 말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마세요.

하나님의 뜻의 유라굴로에 쫓겨 14일, 14년 아니 남은 여생을 떠내려 간 뒤에

도착한 곳이 어디인가 확인해보시면 놀라실 것입니다.

정확히 와야 할 곳으로 와 있다는 것에 말입니다.

 

27:39절에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라고” 쓰여 있습니다.

28:1절에는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라고 되어 있고요.

 

하나님의 뜻의 유라굴로에 쫓기는 삶에서는 끝을 모른 채로 오늘을 살게 됩니다.

대작하는 풍랑 속에서의 14일간처럼 그냥 하늘만 보고 지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새날이 되어 확인해보면 언제나 와야 할 곳으로 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사도행전적인 삶은 완성이 됩니다.

 

지금 내가 도달한 이 곳 이 상황이

바로 하나님의 뜻의 바람이 내 삶을 몰아서 도착하게 된 와야 할 그 곳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확신과 함께 깨달아지고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딴에는 하나님의 뜻의 바람에 나를 맡기고 사느라고 살았는데

지금 내가 도달한 상황은 왜 이 모양이지?’ 이런 생각이 들면

사도행전적인 삶은 도저히 그 끝이 마무리 되어 완성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6.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전도 중에 어떤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이유가 되어,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일을 기억합니다.

 

빌립보는 유럽에서의 첫 번째 선교지이고

이 유럽 선교의 시작은 꿈을 통한 성령님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의 바람에 의해 쫓겨 오게 된 곳이지요.

 

그런데 그 곳에서 아무 잘못 없이 죽도록 맞고 차꼬에 채워져

깊은 감옥에 던져집니다.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히지 않겠습니까?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지시를 따랐습니다.

그 성령님의 힘으로 귀신을 몰아냈습니다.

 

그런데 뭘 잘못했다고 이토록 죽을 만큼 맞아야 합니까?

왜 이 깊은 감옥에 갇혀야 합니까?

 

만약 바울과 실라가 이렇게 질문하며 성령에 의해 쫓겨 온 과정을

회의하고 아쉬워했다면.. 사도행전적인 삶은 그 순간 중단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 이해가 전혀 안 갈 것 같은 상황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신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 찬양과 기도에 이어, 감옥 안에는,

지진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바울과 실라에게서 사도행전적인 삶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7.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이 독사에게 물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28: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이 사건 역시 유라굴로 광풍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건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라굴로 광풍 사건이 사도행전적인 삶이 시작되고 진행 되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라면,

바울이 뱀에게 물리는 사건은

사도행전적인 삶의 완성을 위한 길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내용의 핵심은 바울의 태도에 있습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린 모습을 보고 멜리데 주민들은 혼비백산합니다.

바울의 손 거죽을,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 꿰뚫고,

독을 뿜어 대며 달라붙어 있는 그 독사의 맹독성을 익히 잘 알고 있던 모양새입니다.

 

저런 지독한 독사에 물린 것을 보면,

천하에 가까이 하지 못할 몹쓸 범죄자가 틀림없다는 것이지요.

소스라치면서 바울이 죽을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독사에 물린 당사자는 유유자적 무사태평입니다.

마치 자기 손에 달라붙은 맹독의 독사가 무슨 옷에 붙은 검불이라도 되듯

아무렇지도 않게 툭 털어 불에 던지고는 그뿐입니다.

 

멜리데 주민들은 또 한 번 혼비백산 합니다.

이번엔 신께서 멜리데에 온 것이 틀림없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대체 이 희귀한 사건을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가 뭘까요?

 

참고로 여기서 독사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 ‘에키드나’는

세례요한이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 할 때와 같은 단어입니다.

 

▲8. 이 사건은 우리에게,

사도행전적인 삶이 완성되는 위치와 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에 져서, 하나님을 등진 바로 그 자리에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 뱀과 싸우되, 이번에는 아담과는 반대로 뱀의 독을 그러니까

그 치명적인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울이 독사를 손에서 툭 털어 불에 던져버리듯이 말입니다.

 

뱀의 유혹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마마보이처럼 하나님의 판단만을 목 빼고 앉아 기다리지 말고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판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자면

사탄인 뱀에게 물려 그 독이 온 마음에 퍼질 때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지금 주어진 삶의 상황이나 문제나 일 등에 대한

선악과 호불호와 성공과 실패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바울과 실라가 매 맞고 차꼬에 채워져 갇혀있는 빌립보 감옥으로 가봅니다.

마게도냐로 성령의 바람에 쫓겨 몰려왔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서 귀신이 물러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원조 귀신 모든 귀신의 왕인 사탄은 이제부터 나타납니다.

감옥에 갇힌 이 괴로운 상황에 대해 조금만 생각을 해보자며 접근해 옵니다.

이게 말이 되냐고 동정어린 추임새를 넣습니다.

 

만약 바울과 실라가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어떤 기준에서든 ‘좋다 나쁘다’ 판단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독사에게 물려 맹독이 온 마음에 퍼지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지요.

 

그랬다면 사도행전적 삶은 도중에 중단되고

아담처럼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판단하는 대신에 기도했습니다.

멜리데에서 손에 붙은 뱀을 털어내듯이

아담이 섰던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뱀과의 싸움을 이겨 낸 것입니다.

 

이 순간 모든 원망과 모든 불평이 절대 어색할 수 없는

험악하고 슬픈 상황이 가장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찬양의 상황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감옥 속에서 차꼬에 채워진 채 그 옛날 아담이 잃었던 에덴을 다시 찾은 것이지요.

 

▲9. 그럼 궁금하지 않아요. 바울과 실라는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연합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 외에

우리가 뱀의 유혹을 극복하고 판단하고 싶은 욕구를 이겨 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힌 형편을 마음으로 붙잡고 씨름하는 대신

십자가에 주님과 연합하여 지금의 이 형편에 대해 마음으로 죽습니다.

죽지 않으면 판단하게 됩니다.

 

이렇게 죽을 때, 천국이 감옥보다 우선적인 현실로 마음에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천국에 계신 주님과 하늘 아버지를 뵈며 찬양을 한 것이고

그 찬양을 들으시고 하늘 아버지께서 지진으로 화답하신 것입니다.

 

▲10. 이처럼 사도행전적인 삶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십자가를 통해 완성 됩니다.

십자가에서 내 미래에 대해 죽을 때

하나님의 유라굴로와 같은 하나님의 뜻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나를 몰아 갈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바람에 쫓겨 가다 도착해 보면

본문의 멜리데처럼 전혀 예상 못했던 상황과 형편에 와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때 다시금 십자가에서 그 도착한 형편에 대해 내 판단이 죽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이 보이는 자리요

보좌에 계신 아버지와 주님에 대한 찬양이 나오는 자리이며

회복 된 에덴의 자리임이 밝혀질 것입니다.

 

이과정이 지속적으로 반복 되면서 사도행전적인 삶이 완성되어가고

사도행전의 29장이 나의 삶을 통해 쓰여 가는 것이지요.

 

기도/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통해서 내 소원에서 나온

내 목표와 내 인생의 비전에 대해 죽으므로

하나님의 뜻의 광풍이 유라굴로처럼 내게 임하여 나를 몰아가게 하여 주시옵시며,

그렇게 몰리고 쫓겨서 도착한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든지 간에,

또한 십자가에서 그 상황에 대한 나의 판단이 죽음을 통해 그곳에서 에덴을 찾으며

찬양하는 삶이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