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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져야 이기는 재판

LNCK 2013. 7. 20. 17:51

◈내가 져야 이기는 재판                 롬3:4             출처보기

 

 

 

▲‘내가 져야 이기는 재판’

도대체 어떤 재판이기에,

내가 져야, 실제 내용상으로 내가 이기는 재판이 되느냐 이겁니다.

 

재판정에 참여하는 모든 원고와 피고는

오직 재판에서, 자기가 이기겠다는 일념뿐입니다.

 

그런데 이 재판은, 어떻게 생긴 재판인지.. 내가 져야만,

내가 애써 최선을 다해서 져야.. 실질적인 내용상으로는 내가 이기는 재판이 됩니다.

 

그 재판이 어떤 재판이냐 하면,

본문 롬3:4절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바’

 

‘기록된바’라는 건 시편 51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밧세바 간음사건 이후에,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통회 자복하는 가운데 지은 시 속에 나온 구절인데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4

‘판단 받으신다’는 얘기가, 재판이 열렸다는 얘기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 재판이 열리게 됩니다, 물론 나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옳다 그르다 라는, 판단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옳다 그르다’라는 판단을 넘어서 계시는 분이시고,

모든 옳음과 모든 잘못됨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분이시지, 하나님이 판단 받으실 수는 없습니다마는,

 

인간의 불신앙 때문에 각자의 마음속에서, 신앙인과 선민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재판정으로 불려 나와 서 계시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어쩔 수없이 우리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으로 재판 받으시기 위하여 끌려 나오시게 될 때,

어떻게 이 재판을, 나의 승리, 동시에 하나님의 승리로 바꿀 수가 있느냐?

 

내가 무조건 이 재판에서 져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그러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의 재판정>에 불러내서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따진 적이 있느냐? 이렇게 반문하실지 몰라요.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분이,

주어진 환경과 주어진 삶의 조건 때문에, 불평과 불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을 <내 마음속 재판정>에 불러내고, 하나님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중에 나는 새에게도 손길을 뻗치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에도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환경과 조건 중에, 하나님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닌 게 없고,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 속에 주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불평을 한다는 것은,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돼서 우리 마음속에서, <내 마음속 하나님 재판>이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 재판에서 우리가 져야만 이긴다는 그러한 내용의 말씀을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봅니다.

 

중략 주1)

 

◐적용

 

▲제가 프린스턴에 일 년 동안 머물 때에, 어느 여자 의사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자기 친구가, 새 차를 샀다고, 그 새 차를 자랑한다고 몰고 나왔어요.

그래서 모두 네 명의 고등학생들이, 그 친구가 모는 차에 올라탔다가, 사고가 납니다.

 

그때 이 여자 의사 집사님의 아들이, 그만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고 심방하고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그 아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맡겨요, 어떻게? 결국 제 아들을 데려가신 것도 하나님 아니십니까?’

제가 뭐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이 데려가셨지 누가 데려 가셨겠습니까?

 

그런데 4명 중에서 두 명은 살았어요, 그런데 믿지 않는 애들이 살았어요,

교회 안 다니는 애들은 살고, 교회 다니는 그 집사님 아들은 사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다 못 맡기겠다는 거예요.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미쁘시지 않다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미쁘시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구석이 굉장히 많아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내 아들을 데려가셨거든요?

안 데려가셔도 되는데.

 

또 유대인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2주일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 걸려 도달하게 하시거든요.

 

어떻게 믿으시겠습니까? 이건 또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는다고 하는 거를 우리가 처음부터 잘 계산하고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진짜 맡기실래요? 안 맡기실래요?

하나님이 미쁘신 분이십니까? 미더운 분이십니까, 아니십니까?

 

이렇게 따지고 든다는,

이렇게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재판정으로 끌어들인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당하시고 하나님이 옳으신가 그르신가에 대해서 너희가 의심하느냐?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으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다윗의 시편의 얘기를 말씀을 하는 겁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무조건 그 말씀 속에는 정의로움과 공의로움이 들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왈가왈부,

하나님이 이거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 하나님이 정말 사랑 맞으셔?

 

하나님이 정말 공의롭게 행하시는데도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어?

이렇게 하나님께 고소하고, 하나님을 고발하고 재판할 때에,

무조건 하나님이 이기시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옳으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씀을 함께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단어 그대로만 보면

하나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심이라는 뜻도 되고, 하나님의 옳으심이라는 뜻도 됩니다.

 

근데 이 하나님의 옳으심이라는 뜻은 거꾸로,

내가 하나님을 마음에 들어 하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느냐 라는 문제이고,

하나님이 옳으시냐 그르시냐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마음에 들어 하느냐, 안 들어 하느냐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재판에서 하나님의 옳으심과 그르심에 대해서 우리가 고발하는 것,

이게 바로 지금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불만과 불평이 생기는 거예요.

 

뭔가 내 마음에 안 들으니까 불만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불만을 갖고 있는 이 세상 환경은, 이 세상에 지금 주어진 조건은,

하나님이 모르시는데 주어진 조건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불만하다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이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숨통을 막으실 수가 있어,

하나님께서는 나보고 살라는 말씀이냐, 죽으라는 말씀이냐.

 

돈? 그까짓 거, 조물주시라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씨가 마르도록 나한테 안 주실 수가 있어,

내 자식? 하나님께서 손톱으로 툭 치시면 지혜가 트이고 공부 잘할 텐데,

어쩌면 이렇게 까지도 그 머리를 쥐어 잡고 트지 않게 해 주고 계시느냐!”

 

다 재판을 걸고 있다는 겁니다. 다~!

하나님이 미덥지 못하다는 거예요.

 

▲이때 여러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기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순탄한 삶의 기준대로만 하나님이 이끄시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죄가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자꾸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이 있어서,

그 기준에 맞추어서 순탄하게 인생이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우리의 바람 속에는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제거되지 않는

죄의 뿌리로부터 나오는 죄의 삯과 죄의 기운들이 다 스며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예외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한번 보세요, 여러분.

꿈에 사람이 나타나서 불러, 성령이 이끄시는 것으로 믿고 빌립보로 갔습니다.

 

빌립보에 가자마자 쥐어터지고 감옥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성령께서 인도 하셨는데 왜 그래요?

 

로마로 가겠다고 하는데 뭐 놀러 가겠다는 겁니까?

우리처럼 콜로세움 보고 바티칸 관광하러 가겠다는 겁니까?

 

말씀 전하러 가겠다는 건데, 2년 동안 가이사랴에 묶어두시고

그나마 2년 만에 배 타고 출발해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죽을 뻔한 고통을

14일 동안 깜깜한 중에 지내게 하십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왜?

 

순탄함이 우리의 바람인데 그 바람 속에는 죄의 기운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순탄함을 바라는 우리의 바람대로만 되면

우리의 삶은 죄의 승리로 이끌어지게 됩니다, 마지막 결과가.

 

그러니까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역경들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재판하게 됩니다.

 

이 재판에서 우리가, 이렇게 나의 삶의 역경을 허락하시는 그 하나님의 의도는

무조건 옳다, 무조건 참이다, 라고 인정하면서,

 

내 불만을 갖고 있고, 원망을 갖고 있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겨도 과연 되겠어?

라고 의심하고 있는 내가, 져버려야,

 

하나님의 뜻이 마음껏 펼쳐지면서 진정으로 내 삶이 죄에 대해 승리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 대해 승리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에

또 한 번의 하나님에 대한 고발을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공의로우셔?(유대인들의 말입니다), 아! 대단하시네!’

 

공의로우심이 왜 나타납니까?

 

선민들이 측근들이었어요. 측근들이라도 소용없다 이겁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사건을 기준으로 볼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측근들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진노와 심판의 대상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니까 측근들을 심판하시고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가 불의함으로써,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써, 측근들인데

측근들에게도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더 돋보이게 됐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죄를 많이 지면, 더 불의함을 많이 해서

측근들인 우리에게 계속 죄를, 그 심판을 퍼부으시고 진노를 가하시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온 세상에 더 강렬하게 나타나겠구먼,

그러면 뭐 죄를 져야지! 뭐. 응~.

 

이렇게 달려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항변하고 달려든다는 거예요.

 

▲참 힘들어요. 인간이라는 게 이렇게 질긴 겁니다.

 

목회하면서도요, 분명히 제 양심껏 목회자의 양심으로서,

그 분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이 자리는 예를 들어

뭐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임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는 마땅치 않아요, 그래서 임명을 안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내게 굉장히 가까운 측근이에요.

 

문턱을 닳도록 목사님 사택을 드나드는 그런 분입니다. 근데 임직을 안 해요.

임명을 안 해요. 그러면 뭐라 그러냐 하면, ‘토사구팽’이라고 그럽니다.

 

사냥개 다 써먹고 사냥 끝나고 나니까 잡아먹는다는 그런 식이에요, 버린다는 얘기에요.

 

공의를 행한다는 게 쉽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공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근데, 하나님의 공의가 내게 가장~ 유리한 길입니다.

내 마음속의 소원이 내게 가장~ 불리한 길입니다.

 

이거 우리 알아야 돼요.

내 마음속에서 내 생애에 대해서 소원이 생기잖아요?

 

내 마음속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가까워지겠다는 소원 이외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마음이 떨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소원 이외에,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소원을 갖지 않습니까? 그 소원은 내게 가장 불리한 길입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삶의 조건들, 지금 내게 마음에 전혀 안 맞지만

그것이 내게 가장~ 유리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고 계시는 것이고,

뭔가 내게 잘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내게 역경을 주실 때, 그 역경은 내 인생의 최고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아멘!’ 하지 않을 환경이 없고, 감사하지 않을 조건이 없고,

무조건 기뻐해도 틀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단 나를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으시고

섭리하시고 이끌어 가실 때, 잘못된 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역경으로 보이고, 내 눈에 잘못된 것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죄성 때문에

계속 끊임없이 내 마음의 재판정에 부름을 받으셔서 나에 의해 고소 받으실 때에,

어떻게 내가 지고 하나님이 이기심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내 인생에 가장 좋은 최선의 그 길이

끊임없이 이루어져 나갈 수 있을까요? 내가 방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에서 죽는 겁니다.

 

주어진 조건이 아무리 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 조건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조건이, 온전한 하나님의 정의요,

공의요,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인정하는 것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정말로 내 마음에 든다,

내 마음이 너 때문에 정말 기쁘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사랑하는 딸아!’

이렇게 얘기하시고 그 다음 단계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획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마음대로 이루어 가실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나의 죄성 때문에 반복돼서 열리는

하나님에 대한 고소와 재판.

 

주님의 십자가를 껴안고 주어진 환경에 대해 죽음으로써,

내가 져서 하나님이 이기고, 내 삶도 승리의 이기는 삶을 경험하실 수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제거될 수 없는 죄적 뿌리로부터 끊임없이 우리 마음속에

그 죄성이 올라와서, 우리의 소원을 갖게 되고

우리의 소원 순탄함을 향한 우리의 바람대로 환경이 진행되지 않을 때에,

우리는 불만과 불평과 원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고소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를 제기하며 재판을 엽니다.

 

이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우리가 짐으로써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높이 들리게 하시며,

나를 향한 그 최선의 길이 방해 받지 않고 이루어져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주1) 중략된 부분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이 말씀을 왜 합니까?

 

지금 바울이 ‘가상의 불신앙적 유대인’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 중에,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특정인을 지정하는 게 아니라, ‘가상의 불신앙적 유대인’의 입을,

사도 바울이 지금 대신해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3;1

이 얘기를 왜 하게 됩니까?

앞 2장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면 유대인 됨의 외적인 표징들은 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냐?

이런 뜻입니다.

 

선민이다, 뭐다, 할례다, 율법이다. 난리치신 분이 누구냐?

우리가 언제 그랬냐,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율법 달라 그랬냐,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할례의 언약을 제정해 달라 그랬냐,

언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선택해 달라 그랬냐,

 

하나님 혼자 선택하시고 할례의 언약을 주시고,

모세의 율법을 주시고 하면서 난리를 치신 뒤에,

아니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이 땅에 와 갖고,

십자가에서 죽은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그걸 믿지 않으면,

그 모세의 율법이다 할례다, 선민 아브라함의 혈통의 자손이다,

이 모든 게 다 아무 소용없다니,

아이구~ 그럼 뭐 하나님이 헛된 일을 하신 거네, 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던 분이,

아니 그렇게 세상에 쓸데없는 짓을 왜 하셨을까? 한치 앞을 못 내다보시고.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재판소로 불러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아니다, 너희를 선택하고 율법을 주시고 할례를 주시는,

이 모든 하나님의 너희를 향하신 구약 속에 나타난 그 역사와 행위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해서 허락하신 것들이고,

율법과 할례정신이 바로 그 하나님이 너희를 향한 사랑 속에 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너희가 말씀을 맡지 않았느냐?’ 하는 겁니다. 3:2

 

그러면 지금 율법도 할례도 아무 소용없다면서,

아브라함의 육적인 혈통의 자손이라는 것도, 아무소용 없다면서

말씀을 맡았다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

지금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는 마당에.

 

말씀을 맡았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사람과 1대 1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실 때,

그 영이신 분이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바로 말씀 안에 계신다는 겁니다.

당신의 말씀 안에, 그 spirit이신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창조주 신,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이 아니라,

당신을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사건과 동일하다는 얘기입니다.

 

말씀을 주셨다,

천지의 창조주이신 신께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너와 내가 인격적인 관계를 맺자고 하는,

권유와 요청의 뜻이 말씀을 맡기는데 들어있다는 얘기입니다.

 

▲지성소 안에 법궤가 있잖아요? 그래서 지성소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왜 중요합니까?

 

법궤 안에 말씀이 있고, 말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그 곳으로 임재하시는 겁니다.

 

언제나 저는 이 비유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생각해요.

 

말씀을 여러 번 드린 기억이 납니다.

소설가의 spirit 이 어디에 담겨 있습니까? 그 소설가의 글 속에 담겨 있습니다.

 

소설가가 자기가 지어낸 말씀 속에, 소설가의 spirit이 담겨져 있는 거예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이 세상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다가올 때

머무는 처소라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 그 누구도 이런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사건에서 완성되어지는 겁니다.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그 육신으로 오신 말씀 속에서 완성되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한 은총이지요, 이 세상 그 누구도 받지 못한 그러한 특권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뜻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계속해 나간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안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도저히 못 받아들이고 못마땅해 한다는 얘기입니다.

 

자! 그러면 3절에,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말입니다

 

유대인이 선민인데 주님의 십자가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 됐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때, 진노와 심판 아래 놓여 졌다고 여겨지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항변을 하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말씀을 맡기시면서,

나랑 인격적인 관계를 맺자면서요,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유대인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측근으로 우리를 부르시겠다고 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 심판과 진노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변심을 해도 유분수이지,

 

아니 이렇게 변심의 굴곡이 심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리가 뭡니까,

 

인간적인 의리만으로 따져 봐도 잘못을 덮어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어떻게 하든지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 가려는 마음이 의리인데,

 

인간적인 의리도 이런 건데, 정말 뒤통수를 치셔도 분수가 있지,

아니 율법이다, 할례다, 아브라함의 혈통이다,

모~든 특권을 다 주시고 말씀을 맡기셨다고 하시면서,

인격적인 관계로 측근으로 삼으셨다 그러면서,

 

십자가 사건 하나 안 받아들였다고 나에게 진노와 심판을 내리신다니,

하나님 믿을 만 한 분 못되네 뭐. 그런 정도의 일가지고… 아이구~ 이건 뭐…’

 

이렇게 하나님께 항변하고 하나님의 정당하심에 의심을 품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여러분 유대인뿐만이 아니에요, 안 믿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