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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새 언약의 일꾼 / 잭 푸닌

LNCK 2013. 7. 17. 13:11

https://www.youtube.com/watch?v=0VKGV-kaE3E 

◈새 언약의 일꾼               고후3:1~6, 히1:1~2, 마5:14               출처, 번역

 

Zac Poonen                                                                           Russian Text

 

◑자기 삶으로 가르치지, 지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이 도덕적으로 문란했을 때도

그들을 들어서 사용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삼손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지만, 블레셋의 침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몇 차례 구해 냈습니다.

 

심지어 그가 음행의 죄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성령은, 그를 완전히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은, 즉 성령의 괴이한 힘의 능력은,

그가 그 (머리카락 보호하는) 언약을 지키는 동안에는,

그가 부도덕한 삶을 살았어도,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것은 구약시대의 언약이었습니다.

 

다윗도 많은 아내를 거느리면서도,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그에게 머물러,

그는 시편 성경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 아래서의 사역은, 구약의 옛언약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고후 3장에서는, 구약의 옛언약 아래서의 사역과

신약의 새언약 아래서의 사역을 비교하고 있는데요..

그 근본적인 차이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의 옛언약 아래서는,

제사장들이 율법을 주의 깊게 연구해서

그 율법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지식적으로) 잘 전달하기만 하면

즉 잘 가르치기만 하면.. 그게 옛언약 아래서 사역자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 아래서는, 그냥 율법/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르는, 그 삶을, 사역자가 신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언약’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역하신 방식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말씀을 지식적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자기 삶 깊은 곳에서부터 체험하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새언약 아래 사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요구되어지는 사역자는,

말씀을, 그저 지식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먼저 체험하고, 그 체험한 말씀을 가르치는

<새언약의 사역자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매우 필요로 합니다.   *관련글☞우리에겐 증인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그저 지식적으로 가르치는 설교자와,

자기 삶에서 먼저 적용하고 살아본 설교자의 가르침은, 큰 차이가 납니다.

 

오늘날 인도(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신자들의 삶이, 사실상 매우 얄팍합니다.

기독교 문화에 젖어서,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인이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기독교적 깊이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피상적 신앙인입니다.

 

그 이유를, 저 푸닌은, 설교자에게 둡니다.

근본적으로 설교자가, 강단에서 깊이 있는 설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설교자가 깊이 있는 설교를 하지 못하고,

그저 피상적인 설교, 그저 지식적인 설교를 하는 이유는,

자기가 먼저,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삶에서 나오는 설교는.. 하지 못하고

그저 책이나 뒤척이며, 책에서 배운 내용으로, 지식적인 설교만.. 계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삶이, 세속적이라면, 저는 그 이유를,

설교자들이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세속화’란 말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 세상에 동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설교자들의 평소 생각과 삶이, 세속적이고

설교자의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를 대하는 삶이, 세속적이고

교회 지도자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세상 회사와 전혀 다름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뿐, 그것이 자기 삶에 투영되어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 설교를 3년, 5년 듣는 일반신자들,

그의 세속적인 삶을, 그의 등 뒤에서 3년 5년 보고 배우는 일반신자들은,

근묵자흑 (검은 것을 가까이가면 검게 된다) 식으로.. 세속화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그의 설교에서, 전혀 배울 점이 없다는 것입니까?

없지는 않습니다. 배울 점이 약간 있기는 한데, 그것은 ‘정보 전달’입니다.

 

그러나 지식 전달, 정보 전달식 설교는.. 구약의 옛언약 아래의 방식입니다.

새언약 아래서, 신약의 설교방식은..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지식이 아니라, 자기 삶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성경 지식을, 체계적으로 잘 가르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의 설교 방식이고, 옛언약 아래서의 삶입니다.

 

만약 그가 지식만 전달하고, 자기 삶을 나누지 않는다면,

즉 자기의 ‘증인된 삶’을, 설교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약시대의 설교자는 아닌 것입니다.

 

옛언약은 종이에 문자로 쓴 것이라면,

새언약은 마음에 새긴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후3: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의문(옛언약)은 죽이는 것이지만, 영(새언약)은 살리는 것입니다.

 

고후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설교 제목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구약 아래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아래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는데,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삶이 율법을 어떻게 지키며 사는지.. 그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삶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그의 삶LIFE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요1:4

 

예수님의 빛은, 예수님의 삶은, 그 생명은,

오늘날 교리나 설교로 .. 즉 지식적으로 전달되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새언약 아래서의 복음, 예수님의 삶과 생명은,

그 분의 증인된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만,

세상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빛으로 비춰지고) 가르쳐지고,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새언약의 복음을,

그저 지식적으로 가르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캄캄한 어두움일 뿐입니다.

그것이 비록 복음주의적 설교라 하더라도.. 거기엔 생명이 없고, 캄캄함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의문(책에 적힌 율법)이, 세상의 빛이었습니다.

시편에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119:105.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그 책에 적힌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예수님의 삶을 통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요8:12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세상을 그저 지식적인 말씀으로 빛을 비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그 말씀이 빛으로 환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분의 삶이, 세상 속의 빛이었듯이 요1:4

그분의 제자들의 삶이, 오늘날 또한 세상 속의 빛이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2천년 동안 계속 살아계시면서

그 삶을 통해서, 세상에 빛을 비춰주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그러나 주님은 승천하시고,

이제는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십니다. 마5:14

 

그래서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의 사명은, 매우 중차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어화 되어진 것이,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율법을, 말씀을.. 먼저 몸으로 사셨습니다. 세상속에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사신 말씀을.. 언어화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게 바로 설교입니다.

 

 

◑제자양육이 불가피합니다.

 

▲교회의 신자들은, 불가피하게, 그 교회 지도자를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2~3장에도 보면,                                *관련글☞ 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한다

다섯 교회의 사자(지도자)에게 책망한 것이,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그 교회에 책망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 교회 지도자의 약점이, 바로 그 교회의 약점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알게 모르게, 지도자를 다 본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두 교회의 사자(지도자)가 칭찬을 받았을 때,

이어지는 구절에, 그 교회 전체도,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신자는, 지도자를 그대로 본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고 맙니다.

 

▲창1장에 보면, ‘그 종류대로’라는 말씀이 종종 등장합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를 내었습니다.

씨 맺는 채소는, 그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를 재생산해 내었습니다.

 

물고기도, 공중의 새도, 땅 위의 짐승들도

하나님은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은 또 각각 그 종류대로 재생산을 계속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소가 말을 재생산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종류대로’ 재생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 messenger’ 같으면,

그 교회의 신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됩니다.

 

반대로 그 교회의 지도자가 에베소, 사데, 버가모, 두아디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 같으면,

그 교회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렇게 변화, 퇴보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지만, 창5:1

그가 타락한 후에는, ‘자기를 닮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창5:3

 

사람들은, 집에서는 그 아버지를 닮고,

교회에서는, 그 설교자를 닮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한국말로는 ‘부전자전’입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지적인 설교자에게는, 지적인 신자들이 탄생됩니다.

 

구두쇠 아버지에게는, 구두쇠 아들이 키워집니다.

거만한 스승에게는, 거만한 제자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반대로 영적이며, 겸손한 지도자에게서

영적이며, 겸손한, 섬기는 제자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세속적인 지도자 아래서, 영적인 제자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게 나옵니다.

 

대부분 신자들은, 어리석은 양 같아서, 그저 지도자를 무작정 따라가기만 합니다.

실제로 양은, 시력이 아주 약합니다. 코앞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기 코앞만 따라갑니다.

그래서 ‘그 설교자에 그 제자’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인도자도 소경이고, 양떼도 소경이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래서 반대로 그 신자들을 보면.. 그 지도자를 알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지도자는, 자기와 똑같은 제자를 ‘그 종류대로’ 생산할 것이고,

그 제자들은, 또 자기와 똑같은 손자 세대를 ‘그 종류대로’ 생산할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재림까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어쩌면 지금 우리 세대도, 우리 윗 세대를 본받아, ‘그 종류대로’

지금 세대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세대에서, 그 세습의 고리를 끊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부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사는 내용을 설교하고,

그래서 내 다음세대부터는, 새언약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그저 과거에 예수를 모르고 살던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적에 올려지고,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먼저,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고,

내가 경험한 제자의 삶을 설교로 가르쳐서

우리 공동체의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 수준으로 올라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 첫 단추는, 내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저절로 지도자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몇 명이 신앙고백하고, 결신자가 되었다’..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지난 세대에서 중요했고요)

지금 세대에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에, 과연 몇 명이나 제자가 있느냐?’.. 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명목상의 신자들이,

세상에 전혀 빛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해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약시대’에 살면서도, ‘구약의 옛언약’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금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구미의 기독교가 다 쇠퇴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과거에 믿어 봤는데.. 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교인으로서 지식적으로 믿었지,

제자로서, 성령으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교회가 더 이상 후퇴하지 않으려면,

나부터 하루 속히,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언약 아래서, 내가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지식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보여주고, 내 속에 생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략 주1)

 

 

◑예수님도, 30년간 체험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히브리서 성경은 첫구절부터 이렇게 시작합니다.

 

히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위 1절은, 구약의 옛언약을 잘 나타내 보여준다면

2절은, 신약의 새언약을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구약은 ‘하라, 하지마라’가, 그 언약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반면에 신약은, 그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생명(삶)을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기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공생애 직전까지 30년 이상을, 예수님은 직접 생명(삶)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위 2절에서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구절은,

예수님이 새언약, 참 복음의 삶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로만 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면

예수님은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고, 30년을 성장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공생애 3년을 보내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셔서, 옛언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그냥 성인으로 오셔서, 공생애 석달 만에 끝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공생애 전에 30년을, 보통 인간과 똑같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도 3년 동안을,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십자가에 죽으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할 뿐만 아니라

-몸소, 참 복음의 삶을, 새언약의 삶을.. 제자들에게, 또한 세상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론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사시고, 몸으로 설교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 설교를 마치시자,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왜 예수님의 설교에, 서기관과는 다른 권세가 있었을까요?

저 푸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세상에 계실 때

벌써 산상수훈의 삶을, 직접 자기 몸으로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직접 살아본 말씀을, 산 위에서 가르치자,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입니다.

 

산상수훈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의 모든 가르침을 위하여

지난 30년 동안, 자기 삶으로서, 꾸준히 설교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아본 말씀, 자기가 체험해본 말씀을.. 예수님은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설교자의 서재에서의 책으로 하는 설교준비가, 필요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필요하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설교자의 삶입니다.

자기가 직접 순종하고, 체험한 말씀을 전파할 때.. 그 말에 권세가 따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주실 때,

1년 365일 매일, 40년 동안 계속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고작 1년에 한 차례, 어쩌면 몇 년에 한 차례.. 이렇게 주셨습니다.

물론 1년에 수 차례 주신 적도 있겠지요. 어쨌든 매일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그때 받은 말씀을, 잘 기억했다가, 양피지에 기록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의 비서 바룩이 대필하기도 했습니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잘 기억했다가, 정확하게 기록하고

그 두루마리를 보내서, 사람들에게 읽게 하는 것.. 그것이 자기 사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잘 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 시대는, 옛언약 시대보다 더 고차원적입니다.

예수님의 예를 들면,

하나님은, 예수님께, 어떤 특정한 날을 택하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매일 대화하셨으며, 매일 말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삶Life을 통하여, 그 생명 Life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도 매일요!

 

예수님은 그것이, 우리도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8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각자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다.

나는, 새언약 시대에 제자를 양육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옛언약 시대의 신자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 대답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새언약 시대의 제자로 살면서, 내 삶을 설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옛언약 시대처럼, 말씀에 대한 지식전달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그저 말씀의 전달자(메신저)들이었습니다.

그 메신저의 역할을 충실히 잘 감당하려면, 기억력만 좋으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시대에는, 즉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저 메신저만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증인이 되고, 빛이 되고, 생명이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 처럼의 삶을, 세상에 내가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생명, 그 평안, 그 안식, 그 기쁨, 그 행복, 그 고난 중 인내를..

그 고귀함, 그 존귀함, 그 권세, 그 경외함을.. 내가 내 삶으로 직접 보여주고,

그것을 말로 가르칠 때..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같은 설교!

 

수돗물이 안 나오는 지역에 가면,

물장수가 와서, 물을 한 동이에 얼마씩 받고 팝니다.

 

아니면, 그 집 식구가, 양동이를 들고 가서,

물을 파는 곳에 가서, 한 양동이에 얼마씩 주고 사 옵니다.

 

이것은 구약적 방식의 사역입니다.

자기 속에서 물이 안 나오니까, 외부에서 물을 받아 와서, 먹이는 것입니다.

물이 풍성하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합니다.

 

그러나 신약적 방식의 사역은,

자기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그것도 날마다!

그러니까 어디 외부에 가서, 물을 길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내 삶과 동일시됩니다.

내 삶 자체가, 내 메시지와 identify(동일시)됩니다.

 

전자는, 늘 물이 고갈됩니다. 그래서 늘 외부에 가서, 물을 퍼 와야 됩니다.

후자는 자기 속에 늘 물이 고여 있습니다. 외부에 가서 퍼 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제 그저 성경지식, 세상정보 전달식의 설교는, 지나간 세대가 족합니다.

우리는 새언약의 제자들로서,

삶이 생명이고, 메시지가 되는, 그런 제자의 삶을 살아서,

우리와 닮은 제자들이 ‘그 종류대로’ 많이 많이 재생산되기를, 축원합니다.

 

..............

 

주1)

The tabernacle in the Old Testament was a picture of the church.

 

That tabernacle, as you know, had three parts - an outer court, a holy place and a most holy place (where God dwelt). The people in the outer court symbolise believers who just have their sins forgiven. They don’t take any responsibility in their local church. They come to the meetings, listen to the messages, give their offerings, break bread and go home.

 

The people in the holy place are those who seek to serve in the church in some way - like the Levites who lit the lampstand and put incense on the altar.

 

But those in the most holy place are the ones who enter the new covenant, seek fellowship with God and are united with the other disciples as one body. They minister from their life and constitute the real church, the functioning church, the ones who battle Satan and keep the Body of Christ pure. In many churches however, there is no such central core.

 

In every church - in the best and in the worst - those sitting in the outer court will be of the same type - half-hearted, worldly, seeking their own, lovers of money and lovers of ease and pleasure. But a good church will have a strong inner core of leaders who are godly. This core determines which way the church is going to go.

 

The central core will usually begin with two men who have become one with each other. God will be with them and the core will begin to grow in size and unity. A human body too begins with two dissimilar units becoming one in a mother’s womb. As that little embryo begins to grow bigger, the cells all remain united. But if at any time those cells break away from each other, that will be the end of that baby!

 

It’s the same with the building of a local church as an expression of Christ’s Body. If the core splits up, that will be the end of the real church, even if the external structure continues to remain as an institu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