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3

밀가루 부침개 복음

LNCK 2013. 7. 18. 11:05

◈밀가루 부침개 복음                    롬1:16                                       출처보기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로다.

 

▲도입 예화: 밀가루 부침개 도시락을 싸 오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친구. 

제가 중학교 2학년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도시락에 가정형편 이상으로 고기류의 반찬들을,

그러니까 진짜 고기뿐 아니라 쏘시지를 포함해서 고급스럽게 자주 싸 주셨어요.

(그때는 소시지가 고급 반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싸 주시긴 하셨지만, 실제로 저는 거의 먹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매일 김치만 싸오던 제 짝꿍이, 다 먹어버렸거든요.

 

뭐 그렇다고 짝꿍이 폭력학생이나 불량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모교의 축구부 선수였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몸이 너무 호리호리 하고 힘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 저도 고기류의 반찬은 의례 짝꿍이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짝꿍도 제 도시락 덕에 영양 보충한다며, 고기류의 반찬은 다 먹어치우곤 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연락이 전혀 없었는데

그 축구선수였던 짝꿍이 바로 한국 국가 대표선수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중국 축구 슈퍼리그 소속 팀인 칭다오 중넝 팀의 감독 장외룡 씨입니다.

 

그런데 도시락 얘기가 나오면 잊지 못할 친구가, 같은 반에 또 한 명 있었어요.

말이 없는 친구였어요. 언제나 혼자입니다.

그리고 한쪽 손도 약간의 장애가 있던 친구예요.

 

그는 점심시간이 되면 늘 혼자 먹습니다.

그런데 밥과 반찬으로 된 도시락이 아니었어요.

아무 반찬도 없이, 밀가루 부침개를 두세 장 싸오는 거예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밀가루 부침개가, 그냥 아무 것도 안 들어간,

하다못해 신 김치 조각 하나 없는, 하얀 밀가루뿐이었어요.

 

제가,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집이 정말 가난하구나. 그런데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저렇게 의연하게 꺼내 놓고

먹지는 못 할 것 같은데 저 친구는 참 씩씩하고 떳떳하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 친구의 떳떳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참 못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느꼈던 기억이 나요.

 

한 번은 그 친구의 점심 먹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 친 거예요.

그러니까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 하얀 밀가루 떡을 뜯어갖고 내게 내밀면서

“한 번 먹어 볼래?” 하는 거예요.

 

저는 “그래!” 하며 얼떨결에 받아먹으면서

‘정말 아무 맛도 없는 이것을 그렇게 맛있게 먹었구나’ 하며

잠시나마 참으로 묘한 감정에 사로 잡혔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적 관점으로 보면, 부끄러워 할 수도 있는 <복음>

사도 바울은 왜 로마서 서두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1:16

얼마든지 부끄러워 할 수도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부끄러울 수도 있다는 것일까요?

지금은 전 인류가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 인데 말입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 전체를 오직 군사력으로 표현되는 힘으로 통치하며

소위 로마의 평화, Pax Romana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강자의 힘을, 그리고 헬라는 문명인의 지혜를 대표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의 힘과, 고대 그리스의 지혜가 서로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로마제국의 문화가 꽃피게 되는데, 그 중심지가 바로 제국의 수도 로마였습니다.

 

대제국의 한 변방인 유대 땅에서 목수로 태어나 살다가

힘없이 죄수로 몰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라는 한 젊은이를

이렇게 찬란한 문명의 중심지 로마에서 주님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부끄러워 할 수 있는 일이라는데.. 여러분, 공감이 가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불고기에 동그랑땡을 주 반찬으로 하고

김치와 감자샐러드 그리고 콩자반과 장조림을 함께 곁들인 뒤에

계란 후라이를 하얀 쌀밥 위에 덮어서 싸온 유의 화려한 도시락들이 즐비한 가운데서

 

맨 밀가루 부침개를 하얗게 담아온 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 때의 상황과

비슷한 경우이지요. 당시 로마의 세속적 분위기에서 십자가를 겉으로만 보자면

‘밀가루 부침개 도시락’ 그 이하이었을 것입니다.

 

▲‘밀가루 부침개 도시락’같은 복음을 자랑한 바울사도 

그러나 이처럼 ‘밀가루 부침개 도시락’으로 보일 것이 분명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히 부끄러움의 감정만을 갖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지요.

 

광대한 제국의 동서남북으로부터, 성공과 기회의 도시 로마로 몰려든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한 번 뿐인 인생을 잘살기 위한 결정적인 히든카드를 손에 쥐려고 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어떤 사람은 돈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지식과 학문을 또 다른 사람은 예술 등등을 말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각양각색의 화려한 인생의 히든카드를 내 놓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도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자기의 성공적 인생을 위한 히든카드로, 공개적으로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요즘의 상황으로 환산하여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남편이 하는 기업이 100대 기업에 들었다고 뻐겨대는 동창 옆에서,

남편이 정치로 입문해서 장관 되었다고 모두에게 축하받는 동창 옆에서,

아들이나 딸이 서울대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 받았다고 희색이 만면한 동창 앞에서,

남편이 목회자로서 큰 교회 담임 목사님이 되셨다고 하나님께 감사해 하는 사모님 동창 앞에서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 인생의 전부를 걸고 살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있으면 된다는 확신이 있을 때라야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나는 십자가 예수님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믿는 겁니다.

 

그렇지요. 소위 복음이라는 것을 가진 뒤에도

아직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이 이것저것 많다면.. 그게 어디 복음입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러려면 예수님 십자가 하나에 내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멋지게 살기 위해, 보람 있게 살기 위해,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자랑하며 살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더 이상 원하지 않기 위해, 십자가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바로 복음을 이 세상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 복음(밀가루 부침개 도시락)을 자랑한 이유 

그러면 사도바울은 대체 왜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부끄러운 십자가에, 자기 인생을 올인 하고 자랑하며 살겠다는 것입니까?

 

그냥 한 번 오기를 부려 보는 것은 아닐 까요? 왼 허세냐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의리? 아니면 예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과거에 대한 죄책 때문에?

아닙니다. 모두 아닙니다. 여기에는 논리적으로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16

라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연합해서 죽는 다는 것이지요.

 

날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마음으로 먹고 나도 함께 죽은 자로 여기며 사는 것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슨 뜻일까요?

‘구원’이라는 말뜻은 건져냄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쉽게 말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구원이다.

 

맞는 말입니다만, 이렇게만 알고 있으니까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을, 우리가 충분히 누리지를 못하는 겁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뭔가를 알기 위해, 좀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라 할 때 죄가 무엇입니까?

율법에 어긋난 모든 행위적 범죄를 넘어

죄는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마음이 돈을 좋아하는 것, 장관자리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자부심으로 삼는 것,

이런 구체적인 마음 상태가 다 죄라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 등을.. 사람들은 왜 좋아하여 마음을 빼앗깁니까?

그런 것들이 있으면 기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어야 인생이 멋있어 질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다시 말하면 기쁘게 살기 위해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간절히 원하며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여기로 부터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 나타납니다.

구원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돈이 있어야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과 믿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장관자리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버드대라면 깜박 죽는 마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서 사족을 못 쓰는 모든 가치들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즉 그런 것들이 없어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나는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하나님 한 분만으로 잘 살고 있는 상태가

바로 건져냄을 입은 구원 받은 상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들이 있어야

웃음이 나오고, 만족하는 마음 상태가.. 바로 죄요,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애인 보다는 언제나 다른 남자 때문에 마음이 기쁘고 행복하다면

그는 이미 내게 있어서 애인이 아닌 것 아닙니까.

 

-구원은 이처럼 돈으로부터의 마음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출세로부터의 마음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일류대학으로부터의 마음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교회의 수적인 부흥으로부터의 마음의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에 마음이 매이는 것이, 바로 죄이고 노예의 상태이며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리, 적용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한 오기도, 허세도, 또한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의리 때문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복음자체가 지니는 구원하시는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아주 논리적인 귀결 속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면 이런 겁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해봅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은 돈이 없습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 때문에 마음이 돈으로부터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사도바울에게는 벗어 놓고 탈출한 허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꼭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공급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지금 사도바울로서는 십자가로 벗어버린 껍데기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은 이 세상 모든 마음을 끄는 가치들로부터

내 마음을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럴 때 그런 가치들은 마음에서 벗어버린 껍데기들이고요.

 

그렇다면 십자가 복음을 통해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에서 허물 벗듯 벗어 버린 뒤에

다시금 그런 껍데기들을 잔득 차지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가치들과 그것들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찬 로마는

사도바울 입장에서 보자면

십자가 복음을 통해 이미 벗어버린 허물과 껍데기가 잔득 쌓여있는 곳에 불과한 곳이고

그런 로마에 대해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중학교 입학한 사람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돈 졸업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세상 출세 졸업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자식 형통 졸업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마음을 빼앗아 가는 모든 가치들을 졸업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이러한 내용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는 ‘밀가루 부침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밀가루 부침개처럼 초라해 보이는 십자가를 받아들여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으며 사는 사람들이 볼 때는

세상 사람들이 사족을 못 쓰며 좋아서 붙잡고 있는 것들이

오히려 벗어 버려야할 껍데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하시면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동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때

그것들이 필요 없다 판단하시면 평생 없이 살아도 그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 없는 이 세상 가치들이 내 수중에 들어오면

그것들은 득이 아니라 독으로 작용합니다.

 

돈이든 장관자리든 하버드대 졸업장이든 다 마찬가지지요.

오직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세상의 그토록 강렬하게 우리 마음을 잡아끄는 모든 가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러한 자유로서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요.

 

하나님아버지! 복음을 세상 사람들은 밀가루 부침개 정도로 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돈이 최고이고 출세가 최고고, 명예가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그들에게 그렇게 귀한 것들이 벗어버린 허물로 껍데기로 되게 하여 주시므로

하나님아버지의 자유하게 해주시는 그 구원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며

감사 찬양 속에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