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를 보시지 않지만, 행위를 보신다 벧전1:17 13.07.28.설교녹취, 출처
◑1. 에녹이 들림 받은 이유
▲많은 사람들이, 들림, (휴거) 받기 원합니다.
물론 저도 들림 받기 원합니다.
휴거라는 말은, 한글(한자어)인데, 이끌 휴, 들 거입니다.
영어로는 rapture 인데, ‘위에서 잡아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느 때’ 휴거 받느냐에 대해 관심이 많고, 논쟁이 많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환란 통과설이 성경적이며, 대세입니다.
그러니 휴거는, 대환란 후,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사건이죠.
그런데 ‘어느 때’ 휴거 받느냐 보다,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떻게 하면 내가 휴거 받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휴거 받는가.. 하는 사실이 중요하지,
어느 때 휴거 받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환란 통과설이 맞지만 어쨌든)
어느 분이, 우리 교회에 나와서, ‘휴거 때’를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을 하자,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고... 다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엉뚱한 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때가 언제인지’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행1:6~7.
▲그러면 ‘어떻게’ 하면 들림 받을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휴거에 앞서, 일종의 예고편으로, 하늘로 들림 받은 분이 계십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그 두 분의 특징은,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들림 받기 원하시면,
즉 휴거되기 원하시면
평소에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생활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마지막 때에 들림을 받는 조건이 됩니다.
우리는 ‘믿으면 다 구원 받고, 휴거될 것이다’ 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 하나님과 동행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만 믿지, 사실은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마지막 때에, 들림 받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주님만 아시겠지만요!
여러분이 진정 ‘휴거=들림’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그게 언제 될 것인가? .. 그런 신학적 이론을, 너무 깊이 따지지 마시고,
정말 내가 오늘 매일의 삶을,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 그것을 심각하게 고민하십시오.
▲그래서 들림 받기 원하는 사람은,
지금 현재 세상에서, 이미 들림 받는(받을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즉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주님의 뜻과 음성을 분변하고,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 것들을, 신앙인은 좋아서 따라가지 않고, 세상 것을 오히려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이 다 넓은 길로 가더라도, 자기는 좁은 길을 꿋꿋이 가는 신앙인,
그렇게 매일 환란과 핍박과 손해와 불이익을 감수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매일 들림 받는 삶을, 현재에 이미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남들은 다 세상 쾌락을 따라 살지만,
들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자기 자신을 성결하게 지키는 사람인 것입니다.
▲들림 받은 사람, 에녹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계시를 주셨는데
므두셀라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주1)
실제로 그가 죽는 해에, 노아의 홍수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이 창세기 1~6장의 연대를 계산해 보시면, 정확히 일치합니다.
정말 그 자기이름의 예언대로 된 것이죠.
문제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키울 때입니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니,
에녹이 아들 므두셀라를 얼마나 조심조심해서 키웠겠습니까.
그 아이도 자라는 과정에서 아팠을 것이고, 다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늘 긴장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저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오니까,
즉 심판이 내일 올수도 있고, 금년에 올 수도 있으니까
에녹이 늘 조심조심,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림받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성도가, 늘 주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최후 심판을 생각하며
날마다 조심조심, 심판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 때, 즉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때
오늘날 우리도 에녹처럼, 마지막 심판 때, 들림(휴거) 받을 수 있다.. 그런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에녹처럼,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다시 말해서, 최후 심판을 염두에 두고서, 날마다 성결하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에녹’이란 히브리어 뜻이, ‘(하나님께) 바쳐진 dedicated’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종말론적 신앙은 전혀 염두에도 없고,
자기 사업 잘 되고, 자기 성공하는 인생을 위해서, 교회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를 기웃거릴 이유가 없는데,
부흥회 목사 설교가 ‘뭘 내면, 부자되더라’는 예화를 자꾸 들어보니까, 귀가 솔깃해지는 것입니다.
그가 진짜 뭘 내서, 부자가 되든지 안 되든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식으로 교회를 다니다가는, 마지막 때에 들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에녹처럼
‘내 아들이 죽는 그 순간이 (세상) 심판’이라고 생각하시든지
아니면
‘내가 죽는 그 순간이 (세상)심판’이라고 생각하고,
늘 심판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하루하루를, 긴장감 가운데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게 광신적이 아니라, 성경적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가 성결하게 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만 많으면, 정말 세상에서 왕처럼 대접 받고 살 수 있는 것이, 오늘날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세상을 마치 천국처럼 누리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말론적 신앙으로
‘내가 죽으면 세상 종말이다’ 라는 생각으로 *신학용어로 ‘개인적 종말’이라 그럽니다.
세상 정욕, 세상 재미, 세상 즐거움들.. 좀 다 내려놓고
날마다 긴장감 갖고서, 신앙생활 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 긴장감 없이 살고 있는 것..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2.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지만, 외모를 보신다.
벧전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말은.. 내면을, 중심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17절을 읽다가
이어지는 구절에는 당연히 ‘내면을 보신다. 중심을 보신다’는 표현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외모로 보시지 않고'에 이어지는 구절을 읽다가, 저는 고개가 갸우뚱 해졌습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외모로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나오지 않고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 이렇게 성경이 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의 행위를 보십니다.
▲그럼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다음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찾되, 은이나 금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찾는 기복신앙
-또는 은이나 금처럼,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모든 시도.
-또는 은이나 금을 바치면, 다 되는 줄 아는 잘못된 신앙을 뜻합니다.
그럼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는 뜻은, 무슨 뜻일까요?
19~25절까지 나와 있지만, 22절 한 구절만 인용합니다.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지만, 행위대로 판단하십니다. 벧전1:17
우리가 아무리 입술로 주여, 주여 부르짖어도
우리 행위에서, 그 믿음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어서 안심이다.. 남들보다는 잘 믿는다.. 해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서 ‘보신다’, ‘판단하신다’는 말씀을 유의하십시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보시고, 또한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7b
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판단하시되’
외모는 보시지 않고, 우리 행위는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드셀라의 아버지 에녹처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벧전1:17절을 읽다가
저는, 하나님이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해서,
‘내면을 보시겠구나’ 하는 말씀이, 뒤따라 나올 줄 알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내면을 보십니다.
삼상16: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외모를 보시지 않지만, 행위를 보신다. 즉 외모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직분, 우리의 재산, 우리의 성공.. 같은 외모는 보시지 않지만,
우리의 행위, 우리의 정결함, 우리의 깨어있는 신앙.. 이것은 보시고,
보실뿐만 아니라, 판단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녹처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근본입니다.
내가 과거에 한 때 신앙고백 했으니, 내가 이미 구원 받았으니,
나는 이제 들림, 휴거.. 이런 것 아무 염려도 없다.. 이것은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닌 증거입니다. 주2)
▲여러분, 지난 일주일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게 바로, 여러분의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보시고 계십니다.
욕하고, 화내고, 원망하고,
또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살았다면..
나는 ‘내가 믿음이 있다’라고 스스로 생각할지 모르나
주님은 ‘너는 믿음이 없다’라고 .. 행위대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17
내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세례를 받았다, 교회 직분자다.. 라고 주장해도,
내 믿음은, 내 행위로 증명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에, ‘주님은 각 사람을 행위대로 판단하신다’고 했는데..
예수님도 ‘열매를 봐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눅6:44
◑3.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7b
여러분이 신앙이 성숙된 성도입니까?
그것을 테스트 할 수 있는, 시금석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나그네로 알고 사느냐’, 아니면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전혀 걱정 염려 없이 사느냐’ ..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직분을 맡아서 교회 봉사를 10년, 20년 해도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여기서는 안 좋은 의미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종말론적 신앙, 내세적 신앙은 눈곱만큼도 없고,
그저 이 세상에서 ‘외모’로 남들 보기에, 번듯하게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사람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에녹과 같은 종말론적 신앙을 안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 각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오라’하시면, ‘네,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정을 붙이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정을 못 붙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업이 안 되고, 자녀가 병들고..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정을 붙이고,
주님이 ‘오라’ 하셔도, ‘노 땡큐!’ 하면서, 천년만년 살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나중에, 저 아랫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 세상이 지긋지긋하신 분이 있으시면,
한편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정을 떼면.. 그 다음에는 지긋지긋함이 좀 풀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정을 붙이고, 떼지 못하고 있으면,
주님이 지긋지긋하게 만들어서라도, 정을 떼게 만드십니다.
천국에 데려갈 사람들은, 그렇게 억지로라도, ‘나그네’로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독한 연단을 받기 전에, 자기 스스로 ‘나그네’로 준비되면 참 다행입니다.
그 사람은, 그의 삶이 좀 평탄할 것입니다. ※하루가 귀한 분들 (강추)
............................
◐두렵고 떨림으로 날마다 구원을 이루십시오 출처
완전한 구원은 영과 혼과 몸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칭의, 성화, 영화" 라고 흔히 말합니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성경은 하나님도 아버지, 아들, 성령 이렇게 삼위로 역사하시고
그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도 첫 번째 바깥마당(육), 둘째 성소(혼), 셋째 지성소(영),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도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깥에 몸이 있고, 그 속에 혼이 있으며,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영'이 있습니다.
우리 몸, (영)에도, 지성소의 모형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단에서 사람을 영, 혼, 육으로 나누면 이단 같이 여겼지만
이제는 이 성경적인 부분에 대하여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몸, 즉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면 짐승처럼 살게 됩니다.
혼을 따라 살면 인간답게 살게 됩니다.
영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아들처럼 살게 됩니다.
사람은 스스로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가서 등록하고 교인이 되어
열심히 봉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이 되는 것은 사람이 임의로 할 수 있지만,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사람이 스스로 믿는 믿음이 있고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스스로 사람 자신이 믿는 믿음을 가지고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면 쉽게 무너지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며,
마음의 변화가 없고 삶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실제적인 저자인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혜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생명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며
그 순간 모든 가치관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게 됩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바울의 간증처럼 배설물이 되어 버립니다.
세상의 모든 쾌락이 헛된 것으로 여겨져
다시는 그것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다 하면서
심지어 목사나 장로, 교회의 중직노릇 하면서
온갖 죄악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 곧 성령이 없어서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사단에게 틈을 보이면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들어갑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그 믿음의 행위를 보이며 사는 생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이웃에게 그 믿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마7:21)
마태복음을 천국복음이라고 하며
"천국" 이란 단어가 32회 이상 믿음과 행위와 결부시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거울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아 광야로 나왔지만
20세 이상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하기를,
"저희가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히 11:29)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다 멸하셨으며"(유다 1:5)
믿음으로 출애굽 했으나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믿음이 없어졌기에 멸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내 안에 오신 성령을 믿고 의지할 때에만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의로운 행실을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고
성령께서 행하신 것으로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고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이제 곧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처음에 오신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주로써 오셨고,
두번째 오시는 주님은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단순히 경고 카드를 주시러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혹독하고 엄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릴 것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정결하게 신앙을 지킨 신부와
혼인잔치에 들어가시기 위해 신랑으로써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예복을 마련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않아 기름을 예비치 못한 자들은
혼인잔치 기간 동안에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울게 된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바입니다.
혼인 잔치가 끝나면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신부인 성도는 주님과 함게 영원히 왕 노릇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계 22:21)
<글쓴이: 거탄진>
..............
주1)
*므두셀라의 원래 히브리어 단어 뜻은
‘창을 잡은 자 man of the dart’입니다.
옛날에 성문에는, 항상 그 성에서 가장 건장한 자가, 창을 들고 성문을 지켰습니다.
‘창을 잡은 자’가 죽는다는 말은.. 그 성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즉 심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므두셀라(창을 잡은 자)가 죽을 때, 심판이 임한다는 식으로
그 아버지, 에녹이 계시를 받았던 것으로 봅니다.
주2)
참고로, 휴거(들림 받음)은 성경적입니다.
다만 휴거가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에 <휴거>라는 책이 나와서 문제가 된 것은,
그것이 ‘대환란 전 휴거’를 주장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
휴거 자체는, 성경적 이론입니다. 다만 ‘대환란 통과 후, 재림 때 휴거’가 맞습니다.
'분류 없음 >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를 믿어서 얻는 혜택 / 中國語 (0) | 2013.08.05 |
---|---|
5, 6장 설교 본문의 선택 / Spurgeon (0) | 2013.08.04 |
예수님의 죽음의 값어치 (0) | 2013.07.30 |
오늘날 필요로 하는 사람은, 상생의 지도자 / 잭 푸닌 (0) | 2013.07.29 |
무덤 없는 자, 무덤 뿐인 자 (0) | 2013.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