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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LNCK 2013. 8. 21. 13:36

https://blog.naver.com/karamos/80141803468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렘7:1~15          2008년

 

서론

 

예레미야서는 설교하기도 읽기도 적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시대에 꼭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 존 하네만(John Hanneman)은 예레미야서를 읽어야 될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종으로 40년간 울면서 사역을 했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놀러 다니는 것처럼 편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과 희생, 헌신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예레미야의 생애는 결혼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며

구덩이에 갇히고 매를 맞는 등 고통을 당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그의 삶의 영향력은 영원대대로 미치고 있다,

즉, 진리의 영향력은 크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본문 렘7장은 예레미야가 성전 문 앞에서 설교했기 때문에 성전설교(Temple Sermon)라고 불립니다.

 

본문 2절 전반에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예레미야는 성전설교를 두 번 했습니다. 예레미야 7장과 26장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렘26:1절에 언제 이 설교를 했는지 그 시기가 나옵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

기록된대로 주전 609년 요시야왕 사후

그 아들 여호야김이 왕의 즉위 초에 성전에서 예레미야가 한 설교입니다.

 

요시야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종교개혁을 행하고 성전을 수리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요시야는 이 책을 읽다 유다에 임한 재앙과 모든 재앙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것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도 회개하고 개혁하며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39살의 나이에 애굽과의 전쟁에서 애굽왕 바로느고에게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가 죽고 난후 그 아들 여호야김은, 왕이 되자 부친이 파괴했던 우상을 다시 세웠습니다.

이처럼 악한 왕이 세워지자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피상적으로 요시야왕을 따라 종교개혁을 하다

다시 여호야김을 따라 우상숭배로 돌아섰습니다. 우상을 좋아하는 죄악이 도진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위기, 악화되는 영적전환기에 예레미야가 설교한 것입니다. *렘26장

 

▲본문 1절에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부지런히 연구하고 배워서 알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 말씀을 전하라고 부탁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렘7장, 성전 설교를 하는데,

그 주제는 참된 믿음이 없는 종교행위의 문제입니다.

 

참된 믿음이 없는 종교는 어떤 것이며 그 위험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구원의 확신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생활,

이것을 종교적 위선(Religious Hypocrisy)이라 하는데

 

-종교적 위선은 어떤 위험이 있는가?

-겉으로는 신앙적이지만 속으로는 참된 믿음인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이 없는

경우에 어떻게 되는가? .. 하는 종교적 위선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무려 40번이나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렘7장의 성전 설교를 통해 구원받는 참된 믿음이 없는 종교

, 종교적 위선에 대한 다섯 5명제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종교적 위선은 “최고의 장소”에서도 존재한다.

 

예레미야가 설교한 곳은 성전 문 앞입니다.

그리고 설교대상은 2절에 보니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 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성전 안으로 여호와께 경배하러 들어가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주신 예레미야입니다. 7:1

이처럼 설교자가 훌륭하고 장소도 거룩하며 모인 사람들도 목적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단히 종교적이긴 하되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보다 약간 늦게 혹은 동일한 시대에 예언활동을 했던 에스겔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겔8장에서 유다백성의 지도자들이 성전 안에 들어가서 한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투기의 우상과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을 그려놓고

약 25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자기들의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께 경배한다고 성전에 들어가서 우상인 동방 태양을 숭배했습니다.

더더구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좋은 교파의 좋은 교회에서 최고 설교자의 최고 메시지와 좋은 찬양을 듣고

좋은 목적을 가지고 예배드린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어야 되는 것이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어야 되는 것이며

이 믿음이 요동치 않는 확고한 믿음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믿음(Saving Faith)을 가지고 있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받는 믿음은 성경에 택자의 믿음(the Faith of the Elect)이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 갖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이지

좋은 장소에 앉아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가 나는 구원받는 믿음이 있는가를 스스로 검토해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2. 종교적 위선은 “거짓된 확신”에 기초한다.

 

20세기 말에 한국교회에서 많이 등장했던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 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어떤 세뇌교육이나 짧은 교육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거짓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이단자들이 많이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되지만

예수 믿지 않고 믿음이 참되지 않은 사람은, (지적 동의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종교적인 위선자들은

소위 성전 신학(Temple Theology)이라 불리우는 거짓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시온산 곧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서 있는 한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학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고 외쳤습니다. 7:4

 

세 번 반복한 것은 미신적인 주문을 외운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을 주술로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유다 백성들은 이런 성전신학, 거짓된 신학을 성경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단자들도 그들이 믿는 거짓된 신학이 성경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되고 왜곡시켜 문맥에 맞지 않게 성경을 인용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성경말씀을 왜곡하여 시험했습니다.

 

▲시편 132편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합니다.

시편 132:13~15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 ‘이 성은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곳에 영원히 쉬신다,

이 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성전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에서 성전신학, 거짓된 신학이 나왔습니다.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본질을 오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와 전통에서도 거짓된 신학의 근거를 찾았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두 번 침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성전이 있다고 해도 너희가 죄를 지으면 예루살렘은 망한다고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증거해도 유다백성들은 거짓을 믿은 겁니다.

 

그들의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성전의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성전 자체를 믿은 겁니다. 성전만 있으면 우리는 안전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전을 두신 하나님의 본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죄인이 성전에 올 때는 제물을 갖고 와서 “내가 죄를 지었으므로 이 제물이 대신 죽습니다.”

라고 하면 제사장은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리고 피를 번제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다 번제단 위에 불로 태웁니다.

 

그러면 죄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아야 됩니다.

‘저 제물은 내가 죽어야 될 자리에서 대신 피 흘리고 죽은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 죄인인데

나대신 저 짐승이 피 흘리고 죽는다. 저 짐승은 메시아를 상징한다.

나는 메시아의 속죄가 필요한 죄인이다.’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속죄 제물이 되실 메시아를 믿어야 됩니다.

성전은 그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거짓된 신학을 통해 또한 거짓된 확신을 가졌습니다.

렘7:10절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거짓된 신학을 가지고 성전 안에만 들어오면 구원 받았다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나이다’ 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음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그 믿음의 가치를 결정해 줍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주먹을 믿겠다고 하는데

그 믿음의 대상은 자기 주먹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은행 잔고를 믿겠다고 하는데, 그 믿음의 대상은 재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믿음의 대상으로 해야 됩니까?

우릴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대상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요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시는 성령님만이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요 이런 믿음만이구원받는 믿음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종교적 위선은 “거짓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거짓된 믿음, 종교적인 위선은 삶이 거짓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렘7:8~10절에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밖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우상숭배하는 등 못된 짓들을 다 하면서

성전에 들어와서는 구원받았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9절은 십계명 위반의 목록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처럼 멸시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드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건 율법주의요 잘못된 신학입니다. 그렇다고 십계명을 무시하고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마음의 심비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새겨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으로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멸시하고 어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해도 그것은 가짜 확신입니다.

 

십계명을 100% 다 지킬 수 있는 분은 역사상 예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다 지키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버리거나 일부러 어기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십계명을 마음 심비에 새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또 살다 어긴 경우에는

회개하여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십계명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십계명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계명을 외우시면 좋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십계명을 다 외우진 못한 채 때로는 헷갈려도

옳은 법으로 내 마음 심비에 기록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그 법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2:3~4절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언을 많이 하고 기적을 행하고 부흥회를 많이 해도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음성을 듣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마7장과 예레미야 7장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속 심비에 새기고

그 법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어겼을 때는 회개하고 돌이켜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4. 종교적 위선은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고 만다.

 

종교적 위선은 하나님 앞에 다 폭로되고 노출되고 맙니다.

죄를 짓고도 감출 수 있다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본문 11절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위선자들이 성전 밖에서 행하는 것과 성전 안에서 행하는 것을

모두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일수도 있고 남을 속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벌거벗은 자처럼 모든 위선과 불법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내가 불법을 많이 행했으니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며

예수님께 죄를 토하고 회개하며 돌이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종교적 위선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

 

본문 12~14절에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실로는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동편에 있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점령하고 열 두지파에게 땅을 분배하기 전에

이 실로에다 성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만 같이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생각하는

언약궤 신학이라는 잘못된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삼상4장에, 당시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투를 아벡 전투라고 부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지게 되니

언약궤를 가져와 앞에 세우고 전쟁에 나가 싸웠음에도 언약궤는 뺐기고 그만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서 죽고

제사장 엘리는 나이 90이 넘어 의자에 앉아 있다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또한 엘리의 둘째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는데

영광이 떠났다 하고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으로 인해 이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는 고기는 갈비라고 하는 가슴고기와 뒷다리입니다.

갈비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흔든 가슴 즉, 갈비를 들어서 하나님께 흔든 다음에

삶아 먹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요제(搖題)라고 합니다.

가슴고기는 요제로 먼저 여호와께 드리고 그 다음에 삶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다리 고기는 무거우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들었다가 놓고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제(擧題)라고 합니다. 식사할 때 어른이 계시면

그래도 어른이 한 숟가락 드신 다음에 먹습니다.

이렇게 갈비와 뒷다리 고기를 먹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람들이 화목제를 드린 후 고기를 삶을 때

갈고리로 고기를 찍어 나오는 대로 먹은 아주 불량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성전에서 시종드는 여자들을 건드렸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네 아들들이 지금 나를 업신여기고 있다.

네 아들 관리를 잘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는 훈계치 않고 아이들을 망쳐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진노를 부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도 뺐기고 두 자식이 다 죽고 아버지도 죽는 비참한 결과를 낳고

그 이후 실로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 전혀 중요한 장소가 되지 못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에서 종교적인 위선을 행하는 예루살렘도

이처럼(실로처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결론

 

거짓된 신학에 근거한 거짓된 확신 그리고 그에 따른 거짓된 삶

이것이 종교적인 위선의 3대 특징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문제요, 21세기 현대 기독교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된 신학과 거짓된 확신을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거짓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도 믿는 건지 안믿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첫째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속지 말라(Do not be deceived)는 것입니다.

 

본문 4절 후반에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거짓말이 횡행합니다. 사회에도 거짓말이 많고

교과서에도 원숭이가 진화되어서 인간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계에도 거짓말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목사라고 무조건 따라다니지 마십시오.

오로지 진실은 성경 66권 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66권을 믿고, 자기가 소속된 교회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며 전도하고 선교해서

열매를 맺고 선한 성도들끼리 서로 교제하면서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둘째는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Amend your ways and actions)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너희 길과 행동의 잘못된 것을 고쳐라 혹은 개혁하라(Reform)는 말씀입니다.

가는 길이 잘못됐으면 돌아와야 됩니다. 그 길을 계속가면 더 잘못되는 겁니다.

가는 길이 잘못됐으면 고쳐라.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잘못됐으면 바로 잡아라.

비뚤어진 것은 고치고 잘못된 것은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고쳐야 됩니까? 바른 신앙과 바른 확신과 바른 삶과 바른 행동,

이런 방향으로 고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계시다가 여러분 삶 가운데

‘내가 비뚤어진 것이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법에 비뚤어졌다.

십계명을 봐도 이것은 비뚤어졌다. 잘못됐다.’고 하면

계속 비뚤어진 데로 가지 마시고 바르게 고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