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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LNCK 2013. 9. 6. 15:06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느13:5-14               출처보기

 

 

◑서론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큰 사고를 쳤다”

느헤미야 13장이 바로 그런 장면입니다.

느헤미야가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유다백성들이 큰 사고를 쳤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들어가는 술에 독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보안 경찰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벽이 무너져서 도적이 횡횡하고, 치욕과 수치가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기도를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온 때가 B.C 444년 이었습니다. 외우기도 쉽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땅에 올 때, 총독의 신분으로 왔습니다.

느헤미야 5장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20년부터 32이년까지

12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니깐 12년 동안 느헤미야는 유다 땅의 총독이 되어 성벽 재건하는 일에 성공을 하고,

백성들의 신앙을 바르게 지도했습니다.

 

12년 일을 하니깐 힘도 들고, 페르시아는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12년 만에 페르시아에 다시 돌아 간 것이었습니다.

 

돌아갔다가 1년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1년동안 유다 총독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것입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유다 백성들은 급속하게 신앙적인 배역(backsliding)을 했습니다.

신앙이 앞으로 전진을 해야 하는데 뒤로 자꾸 미끄러져, 하나님으로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는 느헤미야 12장 말씀을 보았는데,

유다 백성들은 성벽재건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하고, 승리의 기쁨과 완성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 13장은 유다 백성들은 ‘행복하였더라’라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성벽 낙성식을 하고 기쁨을 누린지 벌써 11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가서 일년 동안 총독의 자리를 비웠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다 백성들은 급속히 배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유다백성들의 배역

 

▲1.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느헤미야를 극단적인 인물이라고 비판하고,

도비야와 한 통속이 되어 성전의 십일조 보관하는 방을 내주었다

 

느헤미야가 1년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유다 백성들의 1인자가 되었습니까?

바로 대제사장 엘리아십이라고 하는 사람이 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아십은 느헤미야 13장 28절을 보면 대제사장이라 했고,

또 그의 사명은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거두어서 성전에 있는 골방, 즉 저장하는 방,

창고에 기름도 거두고, 곡식도 거두고, 포도주도 거두고

제사장들에게 나누어 줄 거제물도 거두어 저장하는 창고의 책임자입니다.

대제사장이니깐 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가 1인자가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그가 우두머리가 되어서 슬슬 느헤미야를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가 좋은 사람이긴 한대, 느헤미야는 너무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같아.

너무 극단적인 면이 너무 많은거 같아. 느헤미야 신앙은 너무 광신적 같단 말이야.

안식일에도 좀 장사를 하면 안되나? 이방인들과 교제를 넓히고 무역을 하고,

무역 개방의 정책을 써야지 느헤미야처럼 그렇게 신앙만 따지고,

하나님 말씀만 따지는 보수적인 신앙에 메여 있으면 되나? 타협이 필요하지 않은가?”

라고 했던 것입니다.

 

엘리아십의 말을 계속 듣다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립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백성들이 들으면 일리가 있는 말같이 들리는 사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십 대제사장이 십일조를 저장하는 방에 있는 십일조 물품을 끄집어 내고

그 방을 느헤미야의 철천지원수, 옆구리 가시 노릇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내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도비야와 한 통속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 거두는 방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도비야가 십일조 거두는 방에

자기 세간을 갖다 놓고 성전안에 있는 방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그곳이 호텔입니까? 십일조를 거두어도 저장 할 방이 없으니

백성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노래 할 사람들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있다가 굶어 죽겠다 싶어

고향으로 흩어 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엉망이 된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엘리아십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10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4가지 언약을 맺었습니다.

 

2. 유다백성들은 느헤미야 10장에서 하나님과 맺은 4가지 언약을 모두 파괴했다

 

첫째, 하나님의 전을 버렸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9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라고 했는데

느헤미야 13장 11절에는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하고

느헤미야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안식일에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느헤미야 13장 15절에 보니 이방 사람들이 안식일에 들어와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안식일이 파괴된 것입니다.

 

셋째, 십일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7절에서는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 하나님의 전,

골방을 두겠다고 하더니

느헤미야 13장 10절에는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함으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도망갔습니다.

 

넷째, 이방인의 딸과 통혼하였습니다.

느헤미야 10:30절에는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않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는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 라고 했는데,

 

느헤미야 13:23절에는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이방여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방여인이 낳은 아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고,

아버지의 언어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이며, 히브리어를 씁니다.

그런데 그 자식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여인 엄마가 안고, 이방나라 말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13:24절을 보면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엄마가 이방여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나라 말을 못합니다.

말하자면, 한국 사람이 월남 여인과 결혼했는데,

엄마가 월남말만 가르친 것과 같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6년 살았습니다. 우리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집에 오면 영어만 하라고 합니다. 한국말 잘 모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2세대 아이들만 봐도 한국말 잘 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자식을 낳아서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말을 가르치지 않으면 문화와 정신을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말에는 그 문화와 정신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먼저 모국어를 가르치고,

외국어를 가르쳐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화가 낫겠습니까?

느헤미야 10장에는 언약을 맺었지만 모두 깨뜨렸습니다.

 

3.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부패가 이렇게 큰 영향을 끼쳤다

 

대제사장 엘리아십, 이 한사람이 신앙의 타협과 부패가

백성들에게 잘못된 사고와 사상을 가지고 인도하자,

온 유다 백성의 영성이 급격히 하강해 버린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12년동안 목숨 걸고 올려놓은 신앙의 영성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큰 대[大]가 붙은 사람이 미치는 영향력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고 말할지는 몰라도,

이 한 사람이 잘못된 사고와 철학을 가지고 반국가적, 반민족적 사고를 가지고

이끌어 가면, 백성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물러나야 합니다.

 

▲4. 신구약에 반복되는 현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쉽게 배역(배반+반역)한다는 것이다

 

느헤미야 13장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확실한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는 지도자가 없어지면

쉽게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쉽게 하나님을 배역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순절날 성령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기뻐한 교회들도 고린도 교회처럼 분열하고 송사하고 서로 고소하고

음행을 저지르고 사도권에 대한 도전을 합니다. 이런 배역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큰 은혜를 받은 세대일지라도, 10년만 지나도 배역하고 부패하는 동일한 현상이

역사 속에 반복되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역 현상이 역사 속에 일어났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이 안 된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배역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5. 경각심을 가지고 배역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느헤미야 13장은 참으로 슬픈 장(chapter)이기는 해도

하나님의 교회에 경각심을 주는 유익한 장(chapter)입니다.

 

우리에게는 배역이라는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영성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영성(spirituality)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네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사람은 2010년도에 다시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살아서 잘 된다고 해도 죽으면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끊지 마시고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느헤미야의 개혁

 

▲1. 하나님은 “한사람”을 통해서 교회를 개혁하신다

 

백성들이 배역하니깐 느헤미야가 개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회를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1517년 개신교 종교 개혁을 이끈 사람은 마르틴 루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거스틴 종단에 속한 수도승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편과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사람이 천국가는 것은 착하다고 가는 것이 아니구나.

선행을 행한다고 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게 되고, 의로 말미암아 천국가게 되는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돌파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종교 개혁은 인류 역사상 위대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죽고나자 후계자가 1인자가 되었습니다.

멜랑히톤(Melanchthon)입니다. 이름 그대로 “멜랑 멜랑” 해서

루터가 개혁 해 놓은 신학을 상당히 변질시켜 놓았습니다.

 

19세기말 영국 침례교회에는 찰스 스펄전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지만

16살 때부터 설교를 하고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영국의 국교는 성공회입니다. 국교가 아닌 사람을 비국교도(Nonconformists)라 하고

비국교도를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핍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 수도인 런던에서 비국교도 침례교 목사님 스펄전 목사님은

2만 명이나 참석하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Metropolitan Tabernacle)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꽉 찼습니다.

길 건너가면 좋은 교회가 있으니 그 교회로 가십시오.”

 

길 건너 교회는 누가 목회 했냐면, 스펄전 아들이 목회 했습니다.

아들 교회로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펄전은 철저하게 진리를 설교했고, 철저하게 바울과 어거스틴이 가르쳤고,

루터가 회복했고, 존 칼빈이 확립한 개혁주의 신학을 설교 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이 죽고 나자 후임자가 신학은 변질됐고,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 교회는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조그마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20세기 영국 최고의 설교자는 두 말할 여지없이 마틴 로이드 존스입니다.

그는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설교의 탁월한 은사를 발견하고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평생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 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저는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를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설교자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죽고 나자 후임자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신학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되느냐 바로가느냐 잘못가느냐는 것은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 개혁은 지도자 한 사람의 사상과 흥망성쇠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서 유다백성을 개혁하셨다

 

유다 백성들이 숫자가 많을지라도 개혁은 느헤미야 한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느헤미야 10장의 맺었던 언약을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의 전을 정결케 하고 레위 사람, 노래하는 사람들 다시 불러 옵니다.

또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다시 갖져다

곳간에 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비야는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문을 닫아 버리고 아무 거래도 못하게 만들고

장사꾼은 안식일에는 성 근처에서 잠도 못자게 쫒아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딸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잡어다 때리고, 머리털을 뽑아 버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사람 머리털을 잡아 뽑았겠습니까?

여자들도 화가 나서 싸울 때는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웁니다.

머리끄댕이를 잡는 것은 화가 많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고 합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에게 성전 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아십의 손자는 산발랏, 도비야, 게셈은 3대 원수인데, 이들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불러 너 같은 인간은 유다 백성의 소속될 가치가 없으니

나가라고 했습니다. 추방하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개혁을 했습니다.

 

▲3. 느헤미야는 확신(Conviction)과 용기(Courage)를 가진 지도자였다

 

개혁가인 느헤미야에게서는 2가지 성품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는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나이도 많습니다. 총독으로 와서 12년 지나고 1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1년 사이에 이방여인과 결혼 한 애들이 커서 말 할 때가 되었으니

4-5년입니다.

 

느헤미야도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진리에 헌신한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따르는 것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나라를 번창하게 한다’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지옥가면 어떻하나?

이런 사람은 아무 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어 언제든지 천국간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2차 대전 중에 영국 수상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 히틀러의 위세는 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정치가들이 처칠에게 히틀러와 싸우다간 백성들의 희생이 커지니깐

히틀러에게 항복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우리는 죽으면 죽었지 저 히틀러 같은 악인에게는 굴복하지 않겠다

(We will never surrender).”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연합군은 싸워 이기고 히틀러는 엉망되고, 독일은 패전 국가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윈스턴 처칠이 이런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도 히틀러가 지배하고,

우리 대한민국도 독일어 쓰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위대한 확신의 사람이었고, 느헤미야도 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용기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무리 총독이더라도 나라를 통치하려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봐야 합니다. 중도노선을 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도노선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길만이 축복임을 확신 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추진했습니다.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 13장 8절을 보면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던져 버렸다고 했습니다.

유리창이 부서지거나 말거나 창밖으로 모두 던져 버린 것입니다.

느헤미야 13장 17절에는 안식을 범하는 귀인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느헤미야 13장 25절에는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은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습니다.

느헤미야 13장 28절에는 원수 산발랏의 사위가 된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는

유다 백성들 가운데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느헤미야는 결코 독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비겁한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를 영적인 리더로 보지 아니하고 영적인 웨이터로 보는 교회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유다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가도록 돌이켰습니다.

 

사람이 잘 못 가면 잘 못 가고 있는 줄 압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길을 막아서고 “돌이키라”라고 하면 막아서고 방해 할 때는

괴롭지만 돌이키고 나면 행복한 것입니다. 평안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6학년 깡패 형한테 속아서

어머니 가게의 돈통에서 돈을 꺼내다가 갖다 주었습니다.

그 깡패가 빵을 사준다고 해서 갖다 준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돈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6학년 형만 계란빵 먹고, 저는 국화빵만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아주머니가 돈 훔치는 것을 발견했고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루 종일 아버지께 얻어 터졌습니다.

아버지 돈에 손대는 것도 ‘도둑이구나’하는 것을 알고 그 후로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제 마음이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6학년 깡패에게서 해방이 되었구나’

확신을 하니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이 평안 했는지 모릅니다.

 

인생 길 잘 못 갈 때에 그것을 바로 잡아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다시 길에서 돌이켜 바로 가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행복이고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잘 못 가는 백성들을

다시 바른 길로 이끌어준 위대한 개혁가였습니다.

 

 

◑3.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

 

▲1. 느헤미야 13:31절은 내면적인 고독이 엿보이는 간구이다

 

느헤미야 13장 3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Remember me with favor, O my God)”

느헤미야가 마지막에 한 말입니다.

 

나를 기억 해 주실 때에 좋은 생각을 가지고 기억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 기도를 들을 때에 이 기도가 승리한 사람의 환호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쓸쓸하고 고독한 사람의 외로운 부르짖음으로 들리십니까?

 

고독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백성들의 악을 개혁하는 느헤미야의 내면적인 고독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느헤미야서는 happy ending으로 끝나지 않는다

 

느헤미야가 아무리 개혁을 하고, 또 개혁을 해도 느헤미야가 늙고 죽으면

유다 백성들은 또 다시 성전을 게을리 하고, 안식일을 범하고, 십일조를 떼어 먹고,

이방인과 통혼하고 했을 것입니다.

 

죄악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박멸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도력은 아무리 최상의 지도력이라 할지라도, 결코 완전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헤미야 13장은 개혁가 느헤미야의

외롭고 고독한 부르짖음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결론

 

느헤미야 13장의 슬픔은 하나님 내가 하긴 했으나 백성들의 죄악은 여전 합니다.

하나님 나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이것을 고백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안된다’는 말의 의미는 느헤미야서의 전체 메시지는 느헤미야를 넘어서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인간 지도자 느헤미야를 넘어서서 참된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된다

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느헤미야처럼 자리를 비우시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없는 분을 만들어 섬긴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도 안 되는 철학을 만들어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천국에 계시고, 천국에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 삶 하나 하나를 통치 하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능력이 모자란 분도 아니요, 실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인간도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들의 영원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며

우리의 소망이 영원한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교회 담임목사로 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 은퇴해야 할 때가 옵니다.

저를 바라보시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죄를 용서 받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안 되는 상황이라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닌 예수님께 아뢰면

예수님이 최고의 권세자 이시기 때문에 왕의 마음도 바꾸시고,

나보다 윗사람의 마음도 바꾸셔서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지도자로 삼고, 예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3장의 전체 메시지입니다.

 

올해에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아

더 가까이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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