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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남달리 '보는' 자 / 中國語

LNCK 2013. 9. 7. 21:30

리더는 남달리 '보는' 자              1:1-4              출처            中國語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는 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부흥책에 보면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인 부흥은 신앙이 타락한 시대 다음에 온다.’

부흥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부흥은 언제 왔냐면 영적으로 지극히 타락한 다음에 왔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저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이 저들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또 저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면

또 하나님의 심판이 오고, 그러면 또 저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저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역사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핸리 불랙가비 목사님이 쓴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실재 성경에도 그렇고, 지금 우리 삶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데,

이때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키느냐! 아니면 영원한 심판으로 가느냐!

두 갈림길에서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게 될 때, 하나님이 놀라운 부흥을 보내시는데

이게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은 영적으로 지극히 타락한 시대 다음에 옵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부흥은 두 단계로 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교회 내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떤 분들이 이 부분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 같은 경우에도 이걸 부흥이라고 그러는데,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이 교회 내에 일어나는 것을 갱신이라고 그럽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부흥의 단계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안 믿는 세상까지 영향이 미쳐서

사람들이 대규모로 주님께 돌아오는 이것을 두고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용어 정의를 뭐라고 그러든지, 분명한 한 가지는 부흥은 두 단계로 옵니다.

먼저는 교회 내에 회복이 일어나고, 거기에 강력한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면서

안 믿는 세상까지 대규모적으로 만져지는 두 단계로 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진 시대입니다. 같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일수록 공통적인 특징이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진 겁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그 당시에 저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나름대로

신앙생활 했는데도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소경된 인도자여.. 소경된 인도자여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분별력이 어두워진 겁니다.

하나님의 길이 뭔지를 모르는 겁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사용해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 줄을 모릅니다.

 

그들은 그토록 철저하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율법을 613가지로 요약해서

그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철저히 지키고, 구제하고 금식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분별력이 가려진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려지기 때문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님의 기준이 가려지니까 본인들은 본인들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데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행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대로 행하니까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타락한 것과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는 것이 같이 갑니다.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한 세 번째는 부흥이 올 때마다

준비 단계에서하나님의 기준을 보게 하십니다.

그 분의 표현에 의하면 중추적인 진리들이 재발견되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신앙의 본질과 같은 가장 핵심적인 진리들이 재발견 되어진다는 겁니다.

재발견 되어진다는 말은 그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을 사랑하지요.

 

이렇게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부터 중추적인 진리들이 항상 재발견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마르틴 루터 시대에도 그랬고, 요한 웨슬리 시대에도 그랬고,

모든 부흥의 시대마다 그랬다라고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또 말하는 게 뭐냐면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종교사회는 이들을 핍박한다는 겁니다.

 

왜냐면 자기들과 관점이 다르니까요. 전통적인 신앙에 따라 율법주의적인 가치관,

인본주의적인 가치관, 기복주의적인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비취신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의 본질에 토대한 가치관으로 보니까요.

그러면서 부흥이 오는 첫 번째 단계가 인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기준이 비춰지게 될 때,

그 비춰진 것을 가지고 현실을 보게 된다 그 말입니다. 이게 인식입니다.

 

저희가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한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제가 한번은 세미나 집회에 가기 전에

하나님이 목회자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회자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길을 떠나 있는가를 눈으로 보이시는데

목회자로서 너무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회개했는데,

 

그 다음 순간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그러시는데

그것은 제가 회개하지도 못하겠더라고요.

하다가 더 이상 못 견디겠어서 그냥 빠져 나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의 모양은 있지만

그 중심에 있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자기중심적인 자세와 태도,

하나님이 그들의 삶의 수단이 되는 것에 불과하고,

 

예배도 정해진 순서에 불과하며

그 모든 예배가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이나 자세가 아니라

그것마저도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져 버렸고

 

그러니까 심지어 교회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고,

교회 안에 시기 질투 다툼 싸움이 있고,

교회 일꾼을 뽑는데 있어서도 타락한 국회의원 선거하는 그대로 선거운동하고

돈 먹이고 다른 사람 후보 중상모략하고

 

성경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도 모르는 겁니다.

그게 딱 비춰지는데 회개를 못하겠어요..

제가 그 자리에 있지를 못하고 죄송하지만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오는 과정이 인식부터 시작된다고 그랬는데,

인식은 지금 우리 교회와 옆에 교회를 비교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의 모습과 우리 교회를 비교하여 살펴봐야 되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통치하시는 그 시대의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비춰보는 겁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모이고 얼마나 많은 예산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부흥은 인식에서부터 오는데

인식은 하나님의 관점과 기준이 비춰지는 겁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이게 있어야 부흥이 시작됩니다.

이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기준이 비춰지면서

나 자신의 삶과 내가 섬기는 교회의 삶을 볼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져 있는가가 보여 집니다.

이것이 부흥을 예비하는 사람들 중에 항상 제일 먼저 왔던 축복입니다.

 

여기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그 당시 사람들이라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서

여우가 마음대로 들락날락하고, 남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인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도성은

폐허 가운데 그냥 방치돼 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그 사실을 누구나 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 상황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춰지니까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이게 인식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

우리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떠난 고로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하였고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께 돌아오고 수욕은 우리에게 돌아왔나이다.”

 

이게 리더입니다. 이게 리더로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로 회복 되는 것은

어떠한 하나님의 일 보다 소중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통치가 교회 가운데 회복되어지고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전환되어지고

그래서 친히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그 가운데 운행하시면서 역사하실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인데, 사단은 벌벌 떱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에는 그렇듯이 거기에는 큰 대가가 따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는 일에 동참하려면

자신을 걸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보지 못하면 (목숨을, 인생을) 걸지 못합니다.

이번 필리핀 사역 때, 필리핀 목회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놀랍게 함께 하셨습니다.

 

가기 전에 어떤 분이 저를 기도해 주시면서 고압선이 흐르는 그림이 보이는데

전류가 파팍팍 불이 튀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했는데,

정말 필리핀 목회자 세미나 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도

리더들이 왜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되는가를 보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 리더들 중에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 선명히 인식되어지고

그 길을 따르려면 어떠한 대가가 요구되는 가를 분명히 계산하여 보고,

가다가 안되면 뒤돌아 가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에 타협의 여지가 없는, 대안이 없는,

그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초청하는 겁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자신의 모든 것으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이건 보는 자만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한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요즘도 영성 사역 하세요?’

 

저는 영성 사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그 말의 개념이 정확하지 않고,

둘째는 일반적으로 영성 사역한다고 그러면 은사만을 추구하는데

저는 그런 식의 사역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간에 별로 그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역하고 있다고 그랬더니

저도 영성 사역을 했는데 요즘 안합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러냐면 “21세기 목회는 영성 목회잖아요.

영성 목회를 해야 결국 되잖아요. 그래서 저도 영성 목회를 했는데

교단의 방해가 심해서 요즘 쉬고 있다고 그러는 겁니다.

 

제가 그 전화를 끊고 나서, 두 가지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첫째는 21세기 목회는 영성 목회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면 잘못 시작한 겁니다. 우리는 그래서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21세기는 사람들이 공허하니까, 성령의 만지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을 추구해 주는

그런 사역이 필요하다.,, 학자들이 그런 얘기 많이 하는데, 다 좋은 얘기지만

저는 그게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출발점은 절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출발점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요?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사역이었고, 사도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그렇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뿐 만 아니라,

성령이 사역이 우리 가운데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 보이니까 시작하는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그저 영성사역이란 말만, 귀로 들어서 아는 정도로.. 뛰어들면 안 됩니다.)

 

둘째는 왜 마음이 아팠는가?

하나님의 뜻이면 교단에서 싫어하고 주위 사람들이 오해해도 해야지요.

예수님이 그 당시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웠더라면 절대로 하나님을 못 따라갔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의 의견이 두려웠더라면 절대 못 갔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마틴 루터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어 놓은

흑백 테이프를 저희 교수인 닥터 베이커라는 분이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마틴 루터 전에, 존 후스라는 분이 100년 전에 정확하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것을 가지고 변론하자고,

네 목숨을 보존해 주겠다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가자마자 사단하고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존 후스를 잡아서 화형시켜 죽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올라갑니다.

그 당시 가톨릭이 세계를 다 지배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각 지역의 영주들이 쫙 서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말에 뛰어난 신학자인 가톨릭 변호사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의 책을 쫙 펴면서 이거 당신이 쓴 것이 맞느냐?

지금이라도 이 앞에서 부인하라. 그러니까 마틴 루터가 뭐라고 한줄 아세요?

 

교회사로서는 예일대학의 종교학과가 앞서는 곳인데

거기에 교수였던 벤인트이라는 분이 마르틴 루터의 전기를 썼는데

그 전기의 제목이 뭐냐면 내가 여기에 서 있다. Here I stand”입니다.

 

그 말이 어디에 나왔냐면 그렇게 물었을 때,

내가 여기에 서 있으니, 내가 한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은 나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보이면 사람들이 알지 못해도 다른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프레데릭 이라는 영주가 마르틴 루터를 좋게 봐서 그를 구해준(숨겨준) 준겁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종교개혁 운동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닥터 베이커가 표현하기를, 종교개혁은 그 당시 유럽이 너무 너무 영적으로

그야말로 다 시든 풀처럼 바짝 말라있었는데

마르틴 루터가 한 것이라고는 거기다 불을 붙여서 던진 것뿐이다.

그랬더니 우후죽순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루터가 주님의 길을 보고 자기 자신을 못 걸었더라면, 그 길은 절대 못 갔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걸려면, 하나님의 길을 봐야 합니다. 아니 자기 눈에 보여져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보면

선택의 의지가 없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면 교단이 반대해도 해야지요.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와도 해야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은, 그렇게 인본주의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성장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 있으며,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걷혀져 있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 삶 속에 세상과 세상적인 가치관이 가득한가를 보았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하나님 그 분을 알기를 구했고, 하나님 그 분이 그들의 삶 속에 찾아오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오시지 않으면

다른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교회 성장이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평가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고,

세상에서 성공적인 목회가 그들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들은 그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모든 것으로 주님의 행하심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거기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부흥이 길이 예비 되었습니다.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도 보는 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합니다. 흉내 내시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 교회를 보니까 요즘 하나님이 참 놀랍게 역사하시고,

너무 좋은 일들이 일어나더라.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면은 좋겠다.

그렇게 가가지고는 절대 오래 못갑니다.

 

왜냐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대가가 절대로 작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길을 보지 못하면

절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길은 갈 수 없습니다.

 

사실 중보기도도 느헤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흥은 하나님의 기준이 비춰지면서

하나님의 기준에 비춰진 그 당시의 현실을 보게 되었을 때, 느헤미야처럼

 

오 하나님이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나 임의로 행한 고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여

하나님의 임재는 그치고 하나님의 실제는 걷히고

온갖 세상과 세상의 방법과 기준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여

영적으로 이처럼 메마르고 타락한 상황이 되어 버렸사오니..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은 세상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그야말로 혐오시설처럼 되어버렸사오니

우리를 용서하소서.’ 이렇게 기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안 보이면 우리는 새벽기도하고 철야 기도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온갖 내 필요에만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교회에만 온갖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이 무엇인지 사실 알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