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4~2005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 中國語

LNCK 2013. 9. 24. 14:09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2:23-3:8         05.08.21. 출처        中國語

  

 

 

  

20 세기 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어느 농부들이

하나님에게 기도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다른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부흥을 내려달라고

여러 명의 신실한 농부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당장 어떻게 응답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어떠한 변화가,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요.

 

그런데 그 기도회에 참석했던 한 농부의 아들이,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헌신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빌리 그레이엄이었습니다.

그가 커서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어서 미국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의 부흥을 가져다주는 일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 농부들의 기도가, 그런 식으로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누구를 통하여 응답하시는지는

사람들에게 감춰져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본문에 애굽의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더니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그 결과로 멀리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모세라는 인물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고, 그를 선지자로 애굽에 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작 모세를 만나기까지는 아직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려야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응답은 시작된 것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에 허용하시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얼마든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우리들의 눈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질문 대신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이냐를 물어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일곱의 나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 이전에도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미 교회를 다니다가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저는 구원받기 이전의 교회 생활과, 이후의 교회 생활을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연대를 셀 때,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BC, 주전이라고 부르고, 이후를 AD, 주후라고 부르는 것처럼

저도 교회 생활이 주전과 주후가 있었습니다.

 

그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는데 첫째는 강한 확신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 이 확신에서 능력이 나오고,

능력이 섬김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막연하게 생각되고

너무 멀리 계시는 것처럼 생각했는데, 구원을 받고나니까

하나님이 제 기도! 를 들으시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저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 분명한 목적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인생의 분명한 목적,

그 이전에는 신앙의 목적이 너무 애매모호하게 보였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선하게 산다는 것처럼 애매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실 때가 없습니까?

조폭들도 몸에 문신을 새길 때 착하게 살자라고 씁니다.

 

도대체 사람이 착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떡을 만들어서 이웃에게 돌리라는 얘기입니까,

윗 층에서 소란스러워도 참고 견디라는 소리입니까,

 

도대체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아주 애매모호할 때가 많고

톨스토이식의 애매한 이웃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싶더라도,

이 세상에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웃이 많습니다.

그들은 내 도움이 없이도 행복하게 살고 부유하고 건강하게 보입니다.

 

내가 도대체 그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럴 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이

,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야 되겠다.’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라가 아프리카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소위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프리카를 생각합니다.

 

세계 모든 부모들이 자녀가 밥을 먹다가 음식을 남기면 자녀에게 엄중히 말하기를

아프리카에 있는 아이들은 그 음식을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니 다 먹어라.’

저는 우리나라의 부모들만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더니

전 세계의 부모들이 아프리카를 거론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다음에 깨달은 것은

제가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사실을 믿으셔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에게 많은 주문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말씀하시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이렇게 말씀하시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이웃 사랑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어느 선교단체의 표어가 ‘To know Christ -내가 먼저 그리스도를 알고-

and to make him known -그리스도를 남들에게 알리게 한다.’라는 것인데

정말로 복음의 핵심, 신앙의 목적의 핵심을 간파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알아야 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부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병든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야 되고, 누구든지 복음을 들어야 될 필요가 있고,

누구든지 신앙적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반드시 아프리카 같은 곳을 찾아가야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가장 부자 동네를 찾아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야 되고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목마르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분류할 때 부하냐 가난하냐로 분류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혼돈을 가져다줍니다.

 

가난한 사람만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물론적인 생각이에요.

부자들도 얼마든지 불쌍합니다. 부자들도 도움이 필요하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만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된다는 생각은 그것은 오해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얼마든지 도울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신앙적으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전도하는 것이 쉽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자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보다

병을 경험해 본 사람이, 건강한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전도하는 것보다는,

고난을 아는 사람이, 평안하게 사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더 위력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불리하고 약점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영적으로는 강점이고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를 떠나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주님의 능력이 나의 약한 데에서 온전하여 진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시고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눈에 감춰져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기 위해서 몇 가지 필요한 단계가 있는데

 

첫째는 누군가가 기도해야 됩니다.

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기도했다고 하지 않고 부르짖었다고 했어요.

저는 여기 부르짖는다끙끙댔다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힘들고 괴로운 가운데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부르짖는 것이, 보통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에요.

유창하게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의 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24절에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기억이라는 말은 언약의 단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잊어버리고 계시다가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어이구, 하마터면 그들을 지옥에 보낼 뻔 했구나.’

이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언약을, 그 언약을 누군가가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언약을 실행에 옮기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원칙이 없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고, 무작위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당신이 세우신 약속대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우리에게세워주셨는지를 알고,

그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인 기도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신약, 구약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말은 새로운 언약, 구약은 옛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을 언약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이름, 이 모든 것이 언약의 징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다른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파트너가 돼서

하나님과 동역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3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2장 마지막 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더니

그 결과로서 31절부터 모세라는 인물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한쪽에서는 백성들이 부르짖고,

동시에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 모세라는 인물을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시고

그에게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라고 사명을 맡기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사람을 통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사람에게 가르치게 하십니다.

 

우리가 돈을 투자할 때 리스크가 없는 투자는 없습니다. 다 위험이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수익성이 높을수록 리스크가 많습니다. 수익성이 낮으면 리스크도 적습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은행에 돈을 넣는 일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자율이 제일 낮고,

그리고 수익률이 많은 데는 그만큼 터지면 대박이지만 아니면 쪽박이에요.

리스크가 크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도 리스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선한 일을 행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그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내 자신도 못 믿어요. 내가 과연 내 믿음을 지킬지, 내가 신실하게 살지,

내 사명을 다 이룰지, 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그건 나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주님에 대한 믿음이에요.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되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믿을만한 분이기 때문에

결국 최후 승리를 거두게 할 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면 리스크가 많아요.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 중에 실패한 사람들이 생깁니다.

 

사울 왕과 같은 사람. 사울 왕이 하나님의 선택이었어요. 하나님이 선택했어요.

그에게 기름을 부었어요. 그런데 그만 사울 왕이 마음이 완악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어기지 않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그를 버립니다.

 

다윗왕도, 다윗처럼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었지만 다윗 왕도

실족할 때가 있었어요.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저는 현재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위정자들이 반드시 성공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선택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옳으냐? 반드시 그 사람이 성공하느냐?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믿고 순종하면 성공할 것이고,

그게 아니고 주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면 실패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를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데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엄청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쓰시는 도구로서

우리는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을까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깨어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될 필요가 있고

나의 나됨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다,

내가 위대해서 이 일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던 어린 나귀가

그날 저녁에 나귀 우리로 돌아가서 동료 나귀들에게 자랑하기를

오늘 내가 예루살렘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주고,

또 내 앞에 옷을 벗어서 땅에 펴고, 나에게 호산나를 불러 주더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엉뚱한 나귀이죠.

 

자기에게 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태우고 있는 분에게 그렇게 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그렇게 하는 줄 알아요.

그것은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리스크가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일군들을 부르십니다.

 

1960, 70년대 캐서린 쿨만이라는 여자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부흥사가 많이 있지만 특별히 이 분에게는 신유의 은사가 현저하게 나타났어요.

많은 사람들이 병에서 나았습니다.

심지어는 집회 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된 경찰관들도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캐서린 쿨만에게 물어봤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마다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하나님의 첫 번째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두 번째나 세 번째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첫 번째로 남자를 부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부르심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미달 사태가 발생해서

그것이 결국은 저에게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겸손한 대답이죠. 그러나 동시에 실감이 가는 말입니다.

많은 소위 유능하고 유력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책임에 따르는,

그 자리에 따르는 희생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희생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자리를 결국은 거부하고 발로 차 버립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이유는 예수를 믿기 위함이요,

또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은혜를 받았어요.

 

은혜를 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예수님과 함께 무엇을 받아요? 영광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자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됩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묻지 말고

내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될 수 있느냐를 물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