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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삼열 선교사 (사무엘 마펫, Samuel A. Maffett)
지난 선교사 열전 7편에 소개되었던 왕길지. 겔슨 엥겔 선교사의 평양신학교 사역의
가장 큰 동역자를 생각하면 당연히 사무엘 마펫(Samuel A. Maffett),
한국 이름 마포삼열 선교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 지방의 놀라운 교회 성장의 기초를 놓은
한국장로교회 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업적은 목회자 배출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교육에 힘쓴 것이다.
그는 조선인 목사 양성을 위하여 1901년에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반을 시작하여
1903년에는 조선 최초의 평양장로교신학교 초대교장이 되었다.
수많은 교회와 학교들을 세우고 신도들과 제자들을 양성하는 등
한국장로교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864년 미국 인디아나주의 매디슨에서 태어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마펫은 1888년 당시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교로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한 시카고의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26세가 되던 다음 해 1889년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조선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90년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서북지역 선교 개척자
마펫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1890년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헐버트 선교사를 동반하고
서울을 떠나 처음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철도가 없는 당시에는 말을 타고 6일간이나 여행을 해야 했는데,
마침 우기라 황주에서 강을 건너다 홍수로 불어난 물에 빠져 익사할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고...
어렵게 평양에 도착한 마펫. 그가 투숙한 여관은
대동강 변에서 순직한 토마스와 깊은 관련이 있던 장소였다.
박영식이란 사람이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한문 성서를 주워 자기 집 벽에 도배했는데,
이후 최치량이 이 집을 사서 여관을 만들었다.
그 최치량은 이후 예수를 믿고 마펫의 돈독한 동역자가 되었다.
마펫의 2차 전도여행은 1891년 2월부터 5월까지 약 3개월간의 긴 여정이었다.
마펫은 게일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과 의주를 거쳐 중국 봉천(선양)에 도착했다.
그는 봉천에서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 평안도 북부와 중국 국경지역에서 이루어진
그의 사역에 대해 들었다.
여행을 마친 후 마펫은 서북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선교계획을 세웠으며
1893년의 제3차 전도여행을 통해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평양을 자신의 선교중심지로 확정하였다.
평양에 가옥을 구매하고 선교지부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평양에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를 세웠다.
후에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이후 성도의 수가 늘어나 1899년에는 장대현에 새로 예배당을 세우고
마펫이 제1대 담임으로 섬겼다. 장대현교회는 이후 남대현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등을
개척하였는데, 산정현교회는 마펫의 기부로 크게 지어졌다.
평양신학교 목회자 양성과 신학 교육 교회가 성장하고 목회자 양성이 시급해지자
마펫은 평양 서문 밖에 6여 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평양신학교를 설립해 한국교회 신학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1901년 가을 장대현교회 장로 방기창과 김종섭 두 사람으로 시작한 평양신학교는
1907년에 최초로 7인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진백 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1909년에는 재학생이 13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마켓은 1904년 평양신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해 24년간 교장으로 활동하며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사참배문제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많은 장로교회 목사들과 교역자들을 양성했으며,
오늘날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이 평양신학교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을 계승하여 설립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마펫 선교사는 평양의 대표 교육 기관인 숭실중학교, 숭실대학,
숭의여학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교육 사업에 힘썼다.
1903년 숭의여학교를 세우고, 1918년부터 10년간 숭실중학교와 숭실대학의 교장으로 섬겼다.
그런데 교장직에 취임한 지 1년이 못 되어 3·1 만세운동이 일어나
기독교 학교 운영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히 총독부는 성경 과목을 폐지할 것을 강요했지만 마펫은 성경만은 가르쳐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마펫은 평양 창덕학교를 비롯해 의주 및 황해도 일대에 110개 내외의 학교를 지원하는 등
교육 사업에 남다른 힘을 쏟았다.
조선인의 친구
마펫은 조선사람들을 자기 민족처럼 사랑했다. 의료와 교육을 통해 조심스럽게
복음 전도의 길을 모색하던 초창기의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마펫은 조롱과 야유를 받으면서도 직접 노방전도에 나섰으며
저녁에는 사랑방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가 노방전도를 하다가 후에 회개하고 목사가 된 이기풍의 돌팔매에 맞아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조선초기선교사에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마펫은 어디를 가든지 한국인처럼 친밀감을 느끼게 했는데 이런 그를 조선사람들은
“마포 목사님”이라고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한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매큔,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며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항의하고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마펫은 감시와 박해를 받았지만,
용감히 조선 민중의 편에서 일본 관원들과 맞서 싸웠으며,
해외에 진상을 알리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을 찾아와서 오직 조선 민족의 복음화와 독립을 위하여
모든 정성을 쏟았던 마펫은 1934년 70세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회로부터 은퇴하고도
계속 조선에 머물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서 싸우다가 1936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마펫은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고 미국으로 귀국하였으나
1939년 10월 24일 75세를 일기로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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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삼열이 끼친 영향력 연구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오덕교 박사)가 ‘선교사 사역 탐구 시리즈 강좌’를 시작했다.
연구소는 3월 25일 유나이티드문화재단에서 ‘마포삼열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첫 강좌를 마련했고, 이상규 교수(백석대), 박응규 교수(아신대), 이승구 교수(합신대)가
발제를 통해 마포삼열 선교사가 끼친 영향력을 조명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모습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 1864~1939) 선교사는
장로교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인물이다.
평양을 세계 최대 선교 지부로 발전시킨 20세기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한 사람이며
한국교회의 영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하노버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26세인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파송으로 내한했다.
1890년부터 1936년까지 46년간 한국의 평양을 중심으로 사역하면서
1천 여 교회와 300여 학교를 세웠다.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8백여 명의 목사를 배출하면서, 평양을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었다.
1907년 장로회 독노회 초대 노회장을 역임했고 장로회 총회장으로도 일했다.
이번 강좌에서 이승규 교수(합신대)는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를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이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업적을 성경중심의 복음주의 신학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고 우선 지적했다.
1890년 내한하자마자 자신의 집에서 사경회를 열 정도로
신앙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몸소 가르쳤다.
또 마포삼열하면 학교 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수많은 학교를 세운 것은 교육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경신학교, 숭덕학교, 숭의여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학교 설립에 관여했다.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교수요 교장으로 사역했던 것도
교육이 그리스도적 세계관을 전수하는 통로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승구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는 교회 중심 신학을 추구했다고 밝혔다.
그는 1917년이 되자 선교사는 2선으로 후퇴하고 한국인이 한국교회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회의 불상사가 있더라도 교회 내에서 권징을 행사하여 시정토록 해야지,
세상으로 끌고 나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주일 성수 등을 강조하며 교회 중심의 삶을 살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약점도 있다고 주장했다.
마포삼열 선교사 뿐 아니라 여러 구한말 선교사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세대주의에 대해 관대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초기 선교사들이 세대주의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둘째 부흥회식 예배 모범을 보였고, 예배 자체의 엄숙성만 더 강조했다는 것이다.
부흥회식 예배가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예배의 전통이나 격식이 소홀해졌고,
예배의 엄격성이 강조되는 만큼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덜 주목했다는 지적이다.
이승구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와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발전에 끼친 공로는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선교사들의 부정적인 신학관도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볼 때,
목회자와 선교사들은 교회 전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지고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방향을 생각하면서 사역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이번 학술발표에서 이상규 교수는 ‘마포삼열의 내한과 한국 선교’를 주제로,
박응규 교수는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를 주제로 발제했다.
이상규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한국 장로교회의 제도적 기초를 놓고
신앙 윤리적 표준을 제시했음을 강조했고,
박응규 교수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1907년에 안식년 중이었지만 한국 사역 후
일관되게 개혁주의적 경건주의를 심었던 것이, 대부흥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