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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

LNCK 2013. 12. 7. 23:02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    히3:1, 12:2      2010.04.04. 출처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 내가 만들어 집니다.

 

히브리서3:1은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12:2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보배로운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설교라는 의식을 가지고 설교하라고 말했는데,

저는 오늘 아침 그런 의식과 자세를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볼 때, 우리의 운명이 귀중하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질과 성향이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살과 피와 세포가 귀중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때라서 우리의 인생이 결정되고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세상만을 생각하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돈 만을 생각하면 탐욕적인 사람이 되고,

쾌락만을 생각하면 추한 사람이 되고,

권력만을 생각하면 폭력적인 사람이 되고,

명예만을 생각하면 교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하며

덕이 있고 기림이 있는 것들을 생각하라”(빌4:8).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이 <큰 바위 얼굴> 이라는 단편 소설을 썼는데

그 소설에 나오는 어니스트라는 소년이.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결국 자기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내용의 소설이었습니다.

 

인간은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땅만을 바라보면 땅에 속한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연예인만 바라보면 연예인 비슷하게 될 것이고,

정치인만 바라보면 정치인 비슷하게 될 것이고,

기업인만 바라보면 기업인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

 

문화적 유행만 바라보면 탤런트 비슷하게 될 것이고,

종교적 유행만 바라보면 무당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시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자기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사도 요한은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21:1).

 

사도 요한은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이었고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탄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성탄의 날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천사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아니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시고 우리 사람들 가운데서 사시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일은 이 우주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벌레나 지렁이가 되는 것과 비슷한 일일 것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너무 놀라서 자빠질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에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의 존재와 나의 기질을 고집하는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나게도 될 것입니다.

안셀름이라는 중세의 신학자는 성 육신의 사실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다가

“어떻게, 어떻게 cur, cur, why, why?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Why God Became Man” “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는가?” 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되 어른이 되시지 않고 한 ‘아기’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9:6).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마2:11).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아기’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천사나 어른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한 ‘아기’로 오신 이유는

범죄한 우리 인간들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닌 약하고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오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요!

 

지금 우리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졌습니다.

정치가들은 물론 종교인들의 모습마저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인들을 심판하는 판사나 검사의 모습을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너무 힘이 세어졌고 너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성탄의 정신은 ‘아기’의 모습이 되어 누구에게나 약하고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처럼.

 

▲하나님께서 성탄의 날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또한 부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니 가난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은 마구간의 여물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들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지적했습니다(고후8:9).

 

그가 자란 곳은 ‘가난한’ 천민들이 모여서 사는 갈릴리 나사렛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가난하게’ 사시다가 ‘가난한’ 모습으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부요함이나 풍요로움이나 과소비나 사치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가난’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까?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시기를 원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가난한’ 자들에게 첫째 복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6:20).

 

지금 한국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너무 부해지고 너무 강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자들보다는 힘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성탄의 정신은 ‘가난’의 모습을 지니고 ‘가난한’ 자들에게 찾아가서

사랑과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처럼.

 

▲하나님께서 성탄의 날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또한 평안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고난’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니 ‘고난’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자마자 헤롯 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고난’에 처했고,

애굽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 ‘고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모습을 ‘고난’의 종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3,4).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고난’의 운명을 짊어지시기 위해서

‘고난’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고난’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스승으로 삼으면서 가난하게 사셨고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고난과 고통을 사모하며 그의 몸에 고난과 고통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평안과 부요함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의 정신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불우한 동포와 지구촌 형제들의 ‘고난’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모습을 지니고 ‘고난’ 당한 자들에게 찾아가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 성탄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탄의 예수님은 ‘아기’가 되셨고 ‘가난’이 되셨고 ‘고난’이 되셨는데,

우리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시고 지극히 낮아지신 ‘온유’와 ‘겸손’의 극치를 봅니다.

 

 

◑2. 물과 피를 쏟으면서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십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이 아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칼을 뽑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팔을 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병들에게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칼을 뽑는 대신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팔을 벌리시며

하늘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마23:34).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에 어긋나는듯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가상 칠언 중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옆에서 자기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한 강도에게

진리와 정의의 칼을 뽑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팔을 벌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가상 칠언 중에서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기운이 너무 많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소위 진리의 깃발을 너무 세게 휘두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십자가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우리들의 가슴에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조금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가슴에 넘치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성 프랜시스의 가슴에 넘치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나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들과 모슬렘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볼 때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영혼에도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물결이

아주 조금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칼을 뽑는 대신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팔을 벌리셨는데,

우리는 여기서 저주받아 마땅한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품으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극치를 봅니다.

 

 

◑3.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십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은

두려움과 슬픔과 좌절에 쌓여 있던 제자들에게 생기와 생명을 불어넣으신 생명의 주님이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혁명적인 생명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부활과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지만

사실은 부활이 우리의 운명을 완전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생기가 넘치게 되었고, 기쁨이 넘치게 되었고

사명감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사람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눈이 밝아졌고 가슴이 뜨거워졌고 발걸음이 빨라지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저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는 생기와 기쁨과 사명감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저들은 즉시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문 닫아 걸고 숨어있던 열 한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한 주간 동안이나 문 닫아 걸고 숨어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저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생기가 넘치는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너무 놀라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열 한 제자들의 남은 생애와 삶과 죽음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열한 제자들은 땅까지 달려가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순교의 제물들이 되었습니다.

 

배신자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을 세 번이나 만난 후에도

여섯 제자들과 함께 주님을 등지고 디베랴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다가

부활의 주님을 또 다시 만났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의 믿음이 회복되고

사랑이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는 진정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는 평생 울면서 참회하는 참회의 사람이 되었고 평생 울면서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고

십자가를 지고 삶을 마무리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사울의 운명과 삶도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르셨을 때 그의 살과 피와 세포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사람이 되었고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사람이 되었고 십자가를 지고 삶을 마감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주의 날”에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서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라고 말씀했을 때

그는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닌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바꾸어졌고

하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하늘의 계시자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우리들의 삶에도 생명이 약동하는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세상 영화에 붙어있던 시시한 삶으로부터 하늘의

기쁨과 연결된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길선주 도사의 운명도, 이기풍 깡패의 운명도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길선주에게 나타나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부르셨을 때

길선주의 운명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길선주는 조선 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이기풍에게 나타나서 “이기풍아, 이기풍아” 라고 부르셨을 때

이기풍의 운명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우리들의 운명과 삶도 변화됩니다.

시시한 세상에 얽매어 사는 부끄러운 삶으로부터 하늘과 통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기쁨과 생기와 사랑과 사명감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4-3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부활의 예수님은 두려움과 슬픔과 좌절에 쌓여있던 제자들에게

생기와 기쁨과 사명감이 넘치는 부활과 부흥을 경험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부흥의 모델과 진정한 부흥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기독교는 만남과 변화의 종교입니다.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고

그리고 만나는 만남과 변화의 종교입니다.

 

교육도 훈련도 필요하지만, 만남과 변화가 없는 기독교는, 형식적인 종교가 되고 맙니다.

행사도 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만남과 변화가 없는 기독교는 기쁨이 없는 피곤한 종교가 되고 맙니다.

 

떠들썩한 마케팅의 종교가 되고 맙니다.

최근에 옥한흠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가 무슨 학원처럼 프로그램에 치중하고 있습니까?

프로그램과 교회성장에 우선순위를 두면 교회는 망합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수년 전부터 이런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전에는 우리들이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고 무릎 꿇고 회개하면서 기도했는데

지금 한국 교회는 각종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듭니다.”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들입니다.

 

기독교는 만남과 변화의 종교입니다. 만남이 운명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만남이 진정한 부흥을 가져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슴이 뛰는 뜨거운 감사를 주님께 드리고 또 드렸습니다.

이런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기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 어떻게 나에게도 이런 운명의 변화를 허락하셨습니까?

주님, 어떻게 나에게도 주님 만남의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셨습니까?

주님, 어떻게 나에게도 죽은 것이 살아나는 부흥을 경험하게 하셨습니까?

주님, 어떻게 나에게도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전하며

살게 하셨습니까?

 

주님, 어떻게 나에게도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죽어도 기뻐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십니까?

주님, 너무너무 황송하고 너무너무 감사한 것뿐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 위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 나 위하여 죽으신 주님!

나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

나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주님 위하여 죽게 하시옵소서!”

 

부활의 계절에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을 만나주셔야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겸손한 긍휼의 마음과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떠들썩한 행사들이 아닌, 조용한 삶의 변화가 필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4. 부활 승천하신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십시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부활 승천하신, 그리고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계5: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21:1).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22:20).

 

종말의 관점에서 재림의 주님 앞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을 때

우리는 방심하게 되고 자만하게 되고 무책임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또는 낙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시는 재림의 주님 앞에서 종말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정신 차리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책임감 있게 되고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림의 주님이야말로 우리들의 소망의 극치이고 우리들의 영광의 극치입니다.

재림의 주님이야말로 우리들의 겸손의 비결이고 우리들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서머나의 감독도, 길선주 목사님도, 이성봉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재림의 주님 앞에서 종말의 관점에서 자신들을 바라볼 때

고난과 환난과 핍박을 이기며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죽도록 충성을 다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스승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우리도 다시 오실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재림의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재림과 심판의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3-5).

 

우리들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보배로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우리들의 운명이 귀중하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기질과 성향이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살과 피와 세포가 귀중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주님과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과 재림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는 귀중하고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낮아지신 성탄의 주님, 지극히 사랑하신 십자가의 주님,

생기를 불어넣어 살게 하시는 부활의 주님, 하늘의 소망과 영광에 참예케 하실

재림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고 만나면서

날마다 모든 것이 변화되는 변화의 삶과 성화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