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감사 눅17:11~19 13.11.21.인터넷 설교 녹취
*원제목 :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
◑서론/ 감사의 실종은.. 큰 죄입니다.
▶인생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현미경에 관점과, 망원경의 관점이죠.
둘 다 무언인가 확대하여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현미경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미세한 것을,
실제보다 더 크게 확대해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계이지요.
반면에 망원경은, 실제로는 아주 크지만,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작아서 우리가 잘 볼 수 없는 것을, 실제 크기처럼 확대해서 보여주는 기계입니다.
불평은 현미경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아주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해서,
두렵게 하고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사는 망원경과 같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랍고 광대하신지
우리는 때로 우리의 눈이 가려져서, 우리의 죄로 인해서
그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잘 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감사의 망원경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때
우리가 평소에 잘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을,
실제로 우리가 밝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 주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잘 볼 수 없었고, 잘 깨달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감사로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딤후3장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서 많은 목록으로 열거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교만하고, 돈을 사랑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탐욕을 더 사랑하고..’ 이렇게 여러 목록들이 나오는데
다 우리가 볼 때, 다 죄로 알고, 다 문제로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목록 중에서, 우리가 죄로 여기지 않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언가 하면 <감사 하지 않는 것>입니다. 딤후3:2
‘감사하지 않는 것’도, 그 말세의 현상 목록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치 않는 것’을 그렇게 큰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 것을
성경은, 분명 그것은 ‘말세의 잘못된 현상’이요, 심각한 죄의 한 가지로 보았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1:21절에도, 이 ‘감사치 않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감사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이다.. ↑
그처럼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야 한다는 거죠.
감사는, 그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 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심각한 질병에 빠져 있다는 증거이고,
하나님을 영광돌리지 않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롬1:21절에 이어서 이렇게 나옵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감사하지 않는 그 신앙으로는, 그 결과,
우리에 생각이 어두워지고, 우리의 마음이 허망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우리에 영혼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것은, 성도의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이며,
감사 하는 것이 정상이다.. 라는 것입니다.
▶문제 제기.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고침을 받았는데,
그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고, 아홉 명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17:17
우리는 이 아홉 명을 두고서,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심각한 질병, 거의 죽음과 같은 나병을 고침을 받아놓고서,
어떻게 예수님께 나와서 감사치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는 이들을 정죄하고 이들을 비판하기 쉽지만
실제로 우리 가운데, 과연 하나님께 받은 죄용서와 구원의 은혜,
또 택함 받은 은혜, 인도함을 받은 은혜들을
우리가 깨닫고, 돌아와서 감사하는 영혼이
과연 십분의 일이 넘을까요?
한국의 크리스천들 가운데, 전 세계 성도들 가운데,
과연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영혼이,
십분의 일이 넘을 수 있는지 염려됩니다.
나도 또한 ‘이 아홉 명 중에 들지 않을까?’ .. 염려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감사 하지 않았던 아홉 명도,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믿음으로 치유/구원 받았고,
하나님에 은혜를 체험했던 믿음에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본론/ <믿음의 세 가지 단계>
▶1.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께 나아와,
그 문제와 필요를 가지고 <나아와 부르짖어 기도하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은, 그들 나환자들에게 복음 이었죠.
왜냐하면 다른 지역에서, 동일한 질병을 고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역을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인이 사는 지역으로 가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그 지역을 향해, 예수님이 찾아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내게로 찾아오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지역으로 직접 찾아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런 지역에 찾아 들어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버림받은 지역, 스스로는 해어 나올 수 없는 지역,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서, 예수님께서 그 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주1)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소리를 질러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멀찍이 서서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12
왜 멀찍이 서서 부르짖었습니까?
가까이 가면 율법에 저촉이 되며, 당시에 정상적인 사람들은 돌을 던지면서
그들을 오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부르짖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렇게 간구 하였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믿음이 없었다면, 이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부르짖지도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 이것은 기도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권위가 있으신 분, 자기들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분..
소문을 들은 거겠지만, 어쨌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임재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믿음의 증거입니다.
대개 보면 ‘나는 아무 문제없다’ 생각하고, ‘나는 성공 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갈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절실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3
이런 기도는, 좌절 가운데 있을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이 나의 희망이다.. 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기도를 하는 거예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증거인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여러분 때로는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쁘기 때문이 아니라,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루에 매 시간, 24번이상 계속해서 드려 보십시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런데 왜 이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불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불쌍하지 않아요. ‘나 정도면 됐지, 내가 뭐가 불쌍해서..?’
이렇게 자기 교만으로 인하여,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보지 못 하는 거예요.
자기의 불쌍한 영혼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모두는, 하나님 앞에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영혼입니다.
내 영혼은 괜찮지 않습니다. 내 영혼은 멀쩡하지 않습니다.
왜요? 감사치 않는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겸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간구를 무시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곳에 그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아셨고,
그 사람들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2. 그래서 두 번째 <믿음의 단계>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쳐 주리라’ 그렇게 말씀 하지 않으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의 몸을 보이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14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우리 같이 읽어 볼까요.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제사장에게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 나은 사람이 가는 거예요.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회복된 사람이 가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런 전제가 있는 거죠.
‘너희는 이미 고침을 받았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해라.’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병이 고쳐졌다’는 말씀은 아직 직접 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의 병이 나았음을, 이미 선포 하신 거예요.
그들이 생각 할 때는 의아했을 거예요.
‘아니 우리 몸이 나아진 것도 없는데, 나아진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여전히 우리의 몸은 병든 몸인데, 이 몸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라니..’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믿음을 요구 하신 거예요.
두 번째 단계에 믿음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서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을 통해서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단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하는 수준 정도가 아니라,
주님은, 나의 믿음을 참여시키십니다.
나의 믿음을 적용함으로써, 즉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단계로
예수님이 우리를 이끌어내십니다.
엘리사에게 찾아온 나아만 장군도 그랬죠.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
처음에 한 번 씻었을 때, 그의 몸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을 거예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내밀어 바다를 향하여 가라.. 그 때도
바다가 갈라진 다음에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때, 요단강을 건널 때도, 제사장들이 발을 요단강에 담그면
비로소 그 강물이 멈춰선 것입니다.
모두 다 ‘믿음의 행진’이었던 것입니다. ‘마음 속의 믿음’만 아니라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는
다 해주시고 ‘가라’ 하지 아니하시고
아직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도전하시는.. 그런 면이 반드시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내던지는 (일종의 무모한 믿음, 그러나 강한 내적 확신의 믿음)
그러한 것을 요구 하실 때가 있다는 거예요.
기적은 언제나 그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의 증거’를 보고나서, 안전하게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은.. 사실 ‘동의’요, ‘확인’일 뿐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증거가 보이지 않을 때, 내 믿음을 적용 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믿음은,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증거가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의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 믿음,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증거를 보여 주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몸이 달라진 것이 없는데, 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시는가?’
그러나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14
이것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행1:8절도,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
그런데 실제로 해 보면 ‘맨 땅에 박치기’ 하는 것처럼.. 무모하기 짝이 없습니다.
언어도 안 통하고, 전혀 선교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현실은 ‘맨 땅에 헤딩 하는 것’ 같지만,
‘주님이 안 될 일, 불가능한 일을 명하셨을리 없다’는 믿음으로
무모하게 나아가다 보면.. 신기하게.. 선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믿음의 단계는
이 설교의 주제, <감사의 단계>입니다.
열 명이 다 깨끗해졌지만, 그중에 한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로 되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에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한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와 필요를 가지고 나와 간절히 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1단계>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 하는 것도 분명 믿음입니다. <2단계>
그러나 믿음의 절정은, 진정한 믿음의 확증은,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것! <3단계>
- 이것이 믿음의 완성이요, 믿음의 절정이요, 참 믿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모든 성도들이,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말씀에 순종하여 기적을 체험하는 성도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다 부르짖어 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있었죠.
그리고 그들은 기적을 다 체험 했습니다. 믿음의 역사죠.
그러나 아홉 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감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셨죠.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예수님이 물어 보신 게 아니에요.
‘그 아홉 명의 영적인 현주소가 어디에 있느냐?’ 그렇게 질문 하신 겁니다.
추측컨대, 그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제일 먼저 제사장에게 확실히 갔을 겁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증명서를 받아야, 사회 속으로 가족에게도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서를 받고서,
가족에게로 가서 기뻐하고, 친구들에게, 이웃 주민들에게 가서 즐거워했을 거예요.
예수님이 그러한 행보를 정죄 하신 것이 아닐 거예요.
가족과 함께 삶을 나누고, 이웃과 함께 고침 받은 기쁨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당연히 일어나는 인생의 축복과 그런 기쁨들을 정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구해야 될 것, 그것을 지적하신 거죠.
그들 아홉 명은 틀림없이, 어떻게 나았냐고 사람들이 물어보았을 때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고 말했을 거예요.
그들이 ‘뭐 내가 스스로 고쳤다’고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돌아와서 예수님에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고 간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 가는 도중에, 예수님께 돌아 와서 감사하는 것과는
분명히 (우선순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혹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너희들도 그 아홉 명에 속하지 않았느냐?’ 질문하시면,
우리는 아마 이렇게 항변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감사하는 마음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마음으로는’ 감사하죠.
그러나 구체적인 감사의 액션, 표현, 우선순위!
그것을 본다면.. 우리는 아마 아홉에 속한 것이 맞을 것입니다.
좀 더 확대해서 적용해 보십시다.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필리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죠. 불쌍히 여기면 액션이 따라가야죠.
사람이 가야되고, 물건이 가야되고..,
그 다음에 한국에 돌아와서, 반드시 후원자들에게 감사해야 되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감사해야할 대상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그냥 감사하다는 ‘마음’이 있는 것과,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라는 거죠.
이 아홉 명은 바로 그런 상태였다는 거죠.
‘감사하는 마음은 있었겠지만, 예수님께 나아와 표현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사’로, ‘구원의 완성’에 이릅니다.
▶어떤 학자는, 이 기적의 아이러니컬한 결과는
‘감사하지 않은 9명의 나병환자들이,
고침 받은 후에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식으로도 추정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때,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할 때는 멀리서서 부르짖었지만
오히려 이 때는,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한 거예요.
우리도 문제와/ 고난과/ 그리고 필요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어 외칠 때에는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해결 받고, 상황이 좋아지고, 고난이 다 사라지면,
그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아홉 명은 ‘이전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했지만
고침 받은 이후에는 더 멀어졌다.’ 감사하지 않을 때.. 그렇게 되기 쉬운 겁니다.
하용조 목사님께서 이 본문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 때
아주 기가 막히게 지적 하셨어요. 잘 들어 보십시오.
‘기적만을 좋아하면, 기적이 끝날 때 감사도 끝난다.
그러나 기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기적은 계속될 것이다.’
나병환자 중에 열 명중에 아홉 명은 기적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한 명은 기적도 좋았지만,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생각했고 만족했다는 거예요.
제가 찾아본 주석 중에 제일 정확한 해석이에요.
기적만을 좋아하면, 기적이 끝나면, 감사도 끝나는 거예요.
기적과 함께, 감사가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또 다른 기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믿음, 그것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사다리에는, ‘감사’라는 가로막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더 높이 계속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지요.
감사하는 사람만이, 더 높은 은혜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은혜의 사다리를 계속 못 올라가는 것입니다.
<내 생애의 마지막 달>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열 사람 모두가 선물을 받았지만, 그 선물의 포장지를 벗겨서
진짜 선물을 확인한 사람은 한 사람이다.’ 무슨 뜻입니까?
진짜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나병을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거지요.
그것이 진짜 선물인 것입니다.
그들이 고침을 받았다고 안 죽었습니까. 얼마 지나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선물,
아홉 명은 고침을 받았지만, 고쳐 주시는 분은 만나지 못 했어요.
선물은 받았지만, 그 선물의 주인공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 명의 나병환자는,
지금 제사장에게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의미 있는 (또는 신학적인) 행동입니다.
이 사람의 행동은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어요. 유대인도 아니었어요.
제사장에게 먼저 가지 않았던 이유는 뭡니까?
제사장보다, 예수님께 먼저 나아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황상 이럴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에게 먼저 갔다가
예수님께 나왔다 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율법이 다 완성 되었지요.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은, 나은 줄을 깨달은 즉시로, 예수님께 돌아왔어요.
19절 말씀 같이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우리의 육신이 고침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고침은
감사를 일어버린 마음이 감사 하는 마음으로 고침을 받는 겁니다.
아홉 명은 육신은 고침 받았지만
감사하지 않는 마음에서는 고침 받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 한 명은 돌아와 예수님 앞에 감사 할 때
정말 우리 영혼에 고침 받아야 될 문제로부터 고침 받게 된 거예요.
그 온전한 구원 온전한 치유가 이 영혼에게 일어 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감사는 서두르지 않으면 못 한다.’ 라고요!
그만 감사를 빠트리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은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사고가 납니다.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되죠. 침착해야 합니다.
모든 인생에, 우리 행동 하나하나는 신중해야 되요, 서둘러서는 안 돼요.
그러나 단 한 가지 서둘러서 나쁠 게 없는 게 감사예요.
서둘러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의 사마리아인처럼, 즉시로 예수님께 돌아가서 감사해야 돼요.
즉시로 감사하지 않으면, 사단이 틈을 타요. 내 생각을 바꿔요.
‘그거 꼭 그렇게 안 해도 되는 거야. 그냥 내 마음속에 감사하면 되는 거지.
지금 빨리 가족을 만나야지..’ 이러다가 감사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본성상 감사하지 않는 죄성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아도, 감사는 그것 보다 훨씬 더 적게 합니다.
이미 자녀를 키워 보셨을 때 경험 해 보셨잖아요.
부모님에 은혜에 대해서 백퍼센트 감사하는 자녀는 없습니다.
그 은혜에 항상 미달 하죠.
그러나 우리가 풍성한 감사를 할 때, 죄악의 본성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유 받은 거예요. 감사가 치유예요. 최고의 내적 치유예요.
감사할 때, 우리는 치유 받은 것입니다.
온전케 되고, 우리가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 하지만
감사하지 않으면, 그 깊은 기도의 체험이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기적 또한, 감사하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진정한 구원의 성숙과 완성에 이르는
귀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주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지나가셨다’ 눅17:11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지만, 이 길은 보통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입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 지역을 싫어했고,
우회해서 저 광야의 길로 돌아서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와 같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사이의 이 길은, 일종의 DMZ와 같은 길이죠.
그 곳에는 버려진 사람들이 있었던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로부터 버려지고 갈릴리로부터 버려지고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육체적인 질병도 문제지만,
몸이 상해서 문들어져 떨어져 나가는 고통도 큰 고통이지만
더 큰 고통은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고통이었습니다.
전염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나병에 걸리면 격리 되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 되었습니다. 버림받는 거예요.
치료 할 길도 없고, 그들은 자연히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지역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도 나병환자들이 나왔고, 갈릴리에서도 나병환자들이 나왔고,
그 나병환자들은 서로 모여서 있을 때, 저 사람이 이방인인지 아닌지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 병을 통해서 그들은 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죠.
건강한 사람들은 서로를 차별하고 구별하고 소외시키지만,
그러나 병든 사람들은 동병상련이라고 하죠.
같은 병으로 인해서, 그들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사마리아인이건 갈릴리인이건
그들은 상관없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는 거죠.
그중에 열 명이 아홉 명은 유대인이고, 한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분류 없음 >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절에 상처 받는 사람들에게 / John Knight (0) | 2013.12.24 |
---|---|
따뜻한 어른 (0) | 2013.12.22 |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0) | 2013.12.16 |
평화 (0) | 2013.12.14 |
만델라를 존경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4360 (0) | 2013.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