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인터넷설교 녹취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바울은 본문에서, 한 짧은 절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화두 두 단어를 대조해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고난’이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 과 <미래의 영광>, 이 2가지를 잘 대조하고 있습니다.
◑서론/ 삶은 총체적 고난의 집합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삶은 총체적으로 고난이다’ 이렇게 말해도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주를 받은 이후로,
사람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어 있고, 해산의 고통, 여러 죄악의 결과와 열매들을
자기가 고스란히 받게 되어서.. ‘삶은 그야말로 총체적 고난’이 맞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苦海’라고 하는데, 비록 해답은 주지 못하지만, 그 분석은 맞습니다.
고난의 종류도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류에 인구만큼이나 고난의 종류가 다르죠,
암이라고 해도 똑같은 암도 아니고, 겪는 고통은 다 다른 것입니다. 총천연색 같아요.
또한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구약 성경에 유명한 ‘야베스’라는 사람은, 그 이름의 뜻이 ‘고통의 아들’입니다.
엄마가 엄청 힘들게 난산을 했는지, 아니면 아기가 장애우로 태어났든지..
아기 이름을 ‘고통의 아들 (야베스)’로 지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이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으앙 하고 우는데..
편안했던 모태를 벗어나서,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고통을 느낀다는 거죠.
또 아이들이 자라면서도 ‘성장통’이라는 게 있잖아요.
생존해 가는 게 만만하지 않아요. 입시공부가 얼마니 치열한지, ‘전쟁’이란 말을 씁니다.
입시전쟁, 취업전쟁 등, 전쟁이라고요! 전쟁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또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자연적으로 노쇠로 인하여 늙고 병드는 것도,
정말 심각한 고통입니다.
또한 때로는 타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억울하게 피해를 당해서 겪는 고통들이 있어요.
물론 자기 죄로 인한 실수들, 탐욕들로 당하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또 배신당하고, 복수 당하고, 각종 중독에 빠져서 고통 당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나아가 사회구조적 악으로 인하여, 저개발국 국민들이 고스란히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천재지변, 대기오염, 환경공해 등으로 인한 질병들로 고통을 당합니다.
각종 음식물과 식품들로 인한 암이 발병하고 있습니다.
요즘 소아병동에 가 보면, 어린아이들의 소아암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난의 길이도 참 다양해요.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고난도 있지만,
어떤 때는 내 인생에 계속적으로 머물러서, 떠나지 않는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의 강도도 마찬가지로 다양합니다.
참을 만한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버티어내기 힘든 고난이 있습니다.
◑1. 크리스천의 고난
그런데 위에 나온 ‘삶의 고난’에 더 보태서,
바울이 오늘 특별히 우리에게 말씀하는 고난은 어떤 것입니까?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겪는 고난이 또 있다는 거예요.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려고 할 때,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인 것이죠.
주님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것이나 담대하라.
-나로 인하여 너희가 환란과 핍박을 당할 것이다.
-내가 양을 이리와 뱀들 가운데로 보낸다.. 라고,
크리스천들이 당할 고난을, 거듭 예고해 주셨습니다.
아래 문제가, 오늘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가/ 아닌가?’ - 이 싸움을 해야 되는데,
‘나는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얼마나 복을 받았는가/ 아닌가?’ - 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변질된 ‘번영 신학’을 수용해서, 세속적인 성공을 부추긴 면이 있었습니다.
현재 당해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보다는,
형통과 영광에 자기 눈독을 들였던 부분은 없는지..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히2:10절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원래 그리스도께서 조금 불완전 하셨다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완전하게 되셨다는 뜻이 물론 아닙니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께서는 원래 완전하신 분이지만,
고난을 받으실 때.. 그 분의 완전성이 더 뚜렷이 드러난다.
십자가 고난을 통과하면서.. 그 분의 완전성이 더 확실히 나타난다.. 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들이지만,
우리가 의인됨, 성도됨이 언제 가장 잘 드러나느냐?
-그건 바로,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통과하는 우리의 삶과 태도.. 거기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이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목사님이 모두 다 훌륭하신 분이셨지만,
그분들이 당하신 고난을 통해서, 정말 성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일면 원치 않는 면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고난'을, 우리에게 기꺼이 허락하십니다.
▲이 비밀을 깨달았던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은,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을 내 몸 안에 가지는’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신앙이 세속화 되어서,
그 고난을 피해, 오직 영광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가 많아요.
십자가 고난 없는 영광.. 그거 가짜 영광입니다.
마귀가 주는 영광이에요.
그렇게 해서, 더더욱 십자가 길을 못 가도록 막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건 사실입니다.
교회가 타락할 때는
항상 성직자와 성도들이 ‘고난’의 길 대신에, ‘영광’의 길을 갔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크리스천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고난 없는 신앙생활을 도모한다면,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고난을 멀리하고 싫어합니다. 고난을 좋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고난은 어떤 것이든 힘듭니다.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또 다른 면이 있어요.
그래서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이예요.
고난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고난은 삶을 깊게 만들어요.
여러분 고난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경박스럽습니까.
고난을 겪어보지 않았던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고개를 드는 교만함이 있는 것이지요.
우쭐거림이 있는 것이지요.
고난은 내 신앙인격을 다듬어 줍니다.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신앙인격이 연마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품을 줄 압니다.
고난을 만이 당하여 본 사람만이 인간을 이해하는 폭이 넓은 것입니다.
고난은 영혼에 성장에 필수영양소와 같습니다.
고난을 통하여서 성숙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고난은 삶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우리의 신앙인격이 단련되면서, 불순물이 제거되고,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으로 인해 만사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 해도, 우리의 삶에 큰 유익을 얻습니다.
내 마음대로, 내 모든 생각하는 대로 다 되는 환경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독재자, CEO가 그렇게 하다가.. 다 몰락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서, 내가 본질에 더 충실하게 만듭니다.
삶의 불순물들이 다 제거되고 나면, 내 삶의 핵심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지요.
고난을 통하여 삶의 가지를 쳐주면서 (예수님이 포도나무를 깨끗케 하십니다.)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이며,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게 됩니다.
인생의 초점이 정확하게 맞춰지는 것이지요.
불필요한 욕심에 매달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고난이에요.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을 미련을 가지지 않고,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됩니다.
여러분, 회심하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변화의 시기가 언제인지 물어보면
거의가 대부분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고난을 통하여 기도를 배우게 되고,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이 자랐다고 간증합니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너무나 다른 것 같아요.
마치 불로 연단된 검과, 그렇지 않은 검이 차이가 나는 것처럼요!
◑2. 고난은 피할 수 없고, 내 반응이 중요합니다.
자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반응입니다.
고난은 신자/불신자를 막론하고 필수적이기에, 더 자세히 거론할 필요 없고요.
고난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에 따라서
그 고난은 전혀 다른 국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잘못된 반응
① 어떤 사람은 고난에 대해서 도피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자꾸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②어떤 사람은 고난이 오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불평을 늘어놓으며, 사람과 환경에 탓을 합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우리의 고난을 해결해 주는 방법이 아닙니다.
③어떤 사람은 자학적인 사람이 있어요. 운명적으로 받아 들여요.
④어떤 사람은 고통에 이유를 묻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가?’
여러분 고난에, 이유를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알 수 없는 고난이 더 많아요.
고난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에 대한 쉬운 답이 없어요.
누가 고난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면, 주의하십시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고난은 언제나 혼란스럽고,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고난은 짙은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⑤특히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할 때가 있어요.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가있는가?
내가 고통을 당할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 이렇게 큰 시험에 빠져버립니다.
여러분, 고난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고난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고난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가져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고난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지지 않는다면,
고난의 급류에, 우리의 신앙이 한순간 휩쓸려 가고 말 것입니다.
①신자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받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진위를, 고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우리 믿음의 수준을, 고난의 강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고난은 힘든 것이지만, 이겨내면 반드시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깊이 참여할 때, 신앙은 굉장히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비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고난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어떻게 이겨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최고의 레슨은, 고난을 이겨내는 경험(관록)이예요.
최고 경영자 수업을 받았다 할지라도, 고난을 이기는 기술을 익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순간에 고난에 파도 앞에, 자기 인생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3. 고난만 바라보면 패하지만, 영광을 바라보면 승리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고난 자체만 바라본다면, 고난을 이겨낼 수 가 없습니다.
고난의 파도에 휩쓸려 가는 사람들은, 고난을 집중하여 바라보는 것이지요.
고난만 바라보면, 그 고난의 무게에, 고난을 이겨낼 길이 없는 겁니다.
고난의 파도를 바라보면, 거대한 급류에 휩쓸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만 바라보면, 고난을 이길 수가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고난이 닥칠 때, 고난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에
그 고난에 철저하게 휩쓸려, 자신의 인생이 끝나 버린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바울은 우리에게 기가 막힌 말씀을 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 할 수 없도다.” 롬8:18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한 단어에 우리는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비교>라는 단어예요.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이 고난보다 더 큰, 다가 올 영광을 비교볼 때
우리는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우리에게 비교를 통해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비교는 어떠한 일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우리가 무엇이든지 비교한 후에 결정합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에도, 내가 정말 피 땀 흘려서 번 이 돈과
구입하고자하는 물건의 가치를, 마음속으로 먼저 비교해 봅니다.
그것의 가치를 충분히 비교하고 난 다음에, 내가 이 돈을 들여서 사는 것이 밑지지 않는다
라고 여길 때, 비로소 거래가 되는 것이지요.
▲잘못된 비교.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저울로 무게를 젤 수 있는 것이면 참 쉽겠지만,
문제는 무형의 것들입니다. 우정과 돈의 문제를 비교하는 것이지요.
때로는 돈보다 우정이 더 귀중하다고 여길 때
우리는 돈을 손해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비교에 의해서 이루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우정보다 더 귀중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냥 돈을 붙잡고, 우정을 내 팽개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결정은 비교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비교를 잘못하면, 인생이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정절을 팔아버리고,
돈 때문에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무가치 하게 던져 버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죠.
막10장에, 한 부자 청년은, 천국과 재물과의 비교에서, 제물에 무게를 둡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제물을 움켜쥐었습니다.
마침내 그 제물 때문에 천국을 놓친 것입니다.
여러분 비교할 줄 모르면 미련해 지는 것입니다.
비교 할 줄 아는 것이 지혜요, 비교할 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무엇이 더 귀중한가를 비교할 줄 알면.. 축복된 삶이요
분별할 줄 모르면.. 비극적인 삶을 살게 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누구일까요? 크리스천은 올바로 비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교의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비교할 줄 아는 눈!
오늘 여러분 안에, 이 비교할 줄 아는 눈, 이 영안이 열려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안타까운 게 뭐냐 하면
좋은 것 good 때문에, 더 좋은 것 best 을 놓친 다는 거예요.
어떤 좋은 것에 눈이 가려서,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놓친 다는 거예요.
‘잠시의 쾌락’과 ‘영원한 즐거움’의 차이를 비교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신자로 살아 갈수 있는 거죠.
여러분 흔히 말하는 ‘저 분은 고수다’ 라고 할 때,
그 고수는 누구냐 하면, 보는 눈이 다른 것입니다.
하수와 고수의 차이는 보는 눈의 차이에요. 수를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은 고수죠.
그러나 자기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꽂혀 있는 사람은, 하수예요.
하수는,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 대마가 죽는 줄은 모르고, 무조건 상대의 ‘아다리’를 치는 것입니다.
자기 모든 것을 잃는 줄은 모르고, 세상 것들을 잠시 붙잡으려고, 또는 남을 죽이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바둑에서 우리는 9단을 입신이라고 얘기하죠.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뭐든지 9단이라고 하면 최고에 경지에 이렇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기업에도 '9단 기업가'가 있습니다.
어느 사무실에 들어가서 척 둘러보면, 단 2분 만에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잘 되는 이유, 안 되는 이유, 현재의 문제, 장래의 나아갈 길을 척척 분석해 냅니다.
9단이라서, 척 둘러봐도 다 아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적세계에 고수가 되길 바랍니다. 9단이 되기 바랍니다.
그냥 그냥 정신없이 살아가는 게 인생이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다음에는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이런 일들에 대해 간파하지 못한다면, 즉 현재와 미래를 올바로 직시하는 눈이 없다면,
현실의 고난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은 현재 고난에 휩쓸려 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기다릴 줄 아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은 뭐냐면
이 고난 뒷면에 (비욘드) 그 다음에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비욘드 beyond를 보면서, 비교를 통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영적인 9단입니다.
▲인생의 싸움은 여기에 달려 있어요. 신자는 누구입니까?
현재 다가오는 영광을 비교하고, 결론을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예요.
현재의 고난은 크지만, 장차 다가올 영광에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고 견디기 힘들어,
탄식과 절규를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비욘드) 더 큰 영광에 세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게 믿음에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여기서 '비교'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가벼운) 것’이라 했어요.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고난을
너무 가볍게 (경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환란이 잠시예요.
어떤 때는 이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삶을 짓누르는 고통이 큰데,
‘잠시’라니요?
그러나 영원에 비교하니까, 잠시가 맞지요!
이렇게 비교에 의해서,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무거운) 것’과 비교됩니다.
이 때, 지금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작은 것이라는 거지요.
▲여러분이, 지금 당하는 고난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우리의 당하는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 버린다면.. 이거야 말로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죠.
그러나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에 우리에게 찾아올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그 영광에 주목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여러분 죽도록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 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이예요.
그런데 더 허무한 일이 있어요.
여러분 보상이 주어진 다해도, 보상 자체가, 내가 바친 피와 땀에 비해 너무도 초라하다면
그것 역시 허무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난이, 고난으로 끝난다면.. 허무극이에요
중요한 것은 ‘지금 고난을 당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에 무엇이 보장 되어 있느냐.. 의 싸움인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로 모든 것이 귀결됩니다.
현재의 일어날 일에 눌려 살 것인가?
아니면 미래에 다가올 그런 영광에 무게를 두고 살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가는 길이 달라지는 거예요.
바울은 현재의 고난보다, 미래의 영광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유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비교를 잘 합시다.
▲고난을 이해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통제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미래에 다가올 ‘영광’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다가오는 그 고난 앞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순례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장차 다가올 영광’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요?
이에 대해 C. S. 루이스가 그의 책 <영광의 무게>에서 그런 말을 해요.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한다. 마치 바닷가 리조트에서 멋진 휴가를 보내자고 해도
그저 동네 한쪽 구석에서 진흙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이'
우리의 소망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한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훨씬 더 좋은 것이 있는데, 한심한 것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C. S. 루이스는 지적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중 아무리 좋은 것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일종의 모조품 이예요.
진품은 아직 없고요,
우리의 미래에 다가올 완전한 진짜를 알려 주기위해서
하나의 모조품으로써 우리에게 예시를 한 것밖에 없어요.
진짜 좋은 것은,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영광이라는 것이예요.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우리의 촛불이나 모든 빛들은 초라해지는 것처럼
지금은 대단해 보이지만, 그 진짜 천국의 영광이 다가올 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 버리고, 빛을 잃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여행 중에, 참 좋은 관광지에, 좋은 호텔에 있으면 참 좋지요.
그런데 여러분, 호텔이 아무리 좋아도, 잠시 휴식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곳을 너무 좋다고, 그곳을 집으로 착각 하면 안 돼요.
▲고난의 유익함이 뭔가 하면, 내가 지금 이곳에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어떤 좋은 것도, 반대로 끔직한 것도.. 언젠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서, 확실히 보상은 다가올 하늘에 영광입니다.
고난에 대해서 너무 절망 하지 마세요.
우리의 고난에는 반드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을, 영원한 즐거움으로 바꿔놓을 날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장차 다가올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함께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즐거워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믿음의 선진들은 그랬습니다.
그 고난의 강도가 깊어질 때, 자기 영혼이 더욱더 하나님 앞에서 연단되면서
그 영혼이 거룩해지고 청결해 지면서, 영의 눈이 밝아질 때
육체적으로나 삶의 환경은 굉장히 신음과 고통 속에 있었지만
영혼은 그 고통으로 인하여 더 맑아지므로, 하늘의 천국을 사모하고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마치 멀리 있지만, 지금 내 손안에 잡은 것 같은
지금 이미 다가온 것 같은, 그 영광에 강력한 영광스러움에 휩싸여서
현재 다가오는 그 고통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었던 거지요.
중요한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고난보다 더 크고 영광스러운 하늘의 영광을 보는 영안이 열리는 거예요.
현재의 고난에 집중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에 집중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현실에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어요.
사도 요한은 그 몸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었지만
그의 눈이 열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회복되는 마지막 날의 환상을
그가 바라보게 되지요.
그걸 보고 나서,
현실의 자기 고난과 비교해 보니까,
게임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오늘도 우리에 현실이 쉽지가 않습니다.
척박한 이 시대 속에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직장과 삶의 현장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치열한 전쟁과 같은 삶입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항해할 때
끊임 없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고난들
오늘 우리에게 고난의 삶으로써, 우리 인생이 끝난다면
그야 말로 우리의 삶이야 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로마서 8장 18절을 통하여
하나님에 백성들의 생각하건대
여러분 이 ‘생각 하건대’ 하는 말은, ‘느끼건데’ 하는 말과 달라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에 말씀에 사로잡혀 있어서
분명한 확신 가운데, '생각 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
그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간 여러분들의 눈이 활짝열려 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고후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러분 겉 사람은 후패 해질 수밖에 없어요.
안티 에이징 크림을 아무리 발라도, 휘트니스 센터를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겉사람이 후패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져 가는도다’
여러분의 삶이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이 세상에 미련이 더 강해지는 게 아니 예요.
하늘의 영광에 압도를 당하면서, 미래의 삶에 더욱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이 아니예요, 나중에 복이 터질 사람들이예요.
세상에서 비교 할 수 없는 것을 누릴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게 있습니다.
아마 만족도 되고, 행복도 올 수가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특징이 있어요.
이 세상은 잠시예요. 어떤 만족도 영원한 게 없어요. 어떤 행복도 짧아요. 인스턴트 행복입니다.
아주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행복한건 있지만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지만,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나 천국은 뭐예요?
영원한 만족, 영원한 기쁨,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행복,
끊임 없이 이어지는, 끝없는 행복을
샘솟듯 넘쳐흐르는 완벽한 행복감,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해요.
그래서 그곳은 태양이 필요 없잖아요.
영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존재로 인하여, 더 이상 어떤 햇빛도 달빛도 필요 없어요.
그 곳은 눈물이 없어요. 눈물을 씻기시고 완벽한 위로를 주세요.
오늘 여러분 현실에 찾아오는 고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질문을 던지지 마세요. 인간적 해답을 주려고 하지도 마세요.
만약에 하나님이 답을 해주셔도, 지금 우리는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는 현재의 고난에 집중 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영광에 집중 하는 거예요.
그날 하나님에 백성들에게 반드시 주어질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지는 영광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반드시 보증(게런티) 되었다는 사실!
이 약속을 믿고, 그 찬란한 영광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없는 그 영광, 그걸 바라보십시다.
▲교부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모든 고난을 다 모아도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에 단 1초에도 비교할 수 없다.. 라고 말했어요.
그 영광이 얼마나 강력하고,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우리는 한 번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고, 헤아릴 길이 없지만
성경이 분명히 약속한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미래의 그 영광은
우리의 현재 삶에 겪었던 모든 고난을 한순간에 덮어 버리고도 남는
완벽한 위로요, 완벽한 회복의 복이 우리에게 다가 오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면,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오늘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이 고난의 파도에 급류에 휘말려서 정신을 잃어 버리고 말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버텨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조들이, 끊임없이 찾아 왔던 숫한 고문과 학대와 핍박과 굶주림과
매 맞음과 투옥 속에서도, 그들이 믿음을 지켜냈던 것은
찬란하게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영광, 그 미래에 그 약속을 붙잡고, 소망가운데 살아갔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 속에 흔들리지 말고, 찬란한 영광에 눈을 뜨시고
믿음의 경주에서 완주하시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고난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고난의 뒷면에 기다리고 있는 하늘에 영광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