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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세례

LNCK 2014. 1. 30. 13:46

https://www.youtube.com/watch?v=lmmzhAWVW5s 

 

◈세 번의 세례                      마20:22, 막10:38             십자가 시리즈 전체보기

  

◑세 번의 세례가 있습니다나는 몇 번의 세례를 받았습니까?

 

첫 번째는 물세례지요.

두 번째는 성령의 세례.

  

세 번째의 세례가 있는데.. <고난의 세례>입니다.

막10:38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세례’(밥티조)라는 말은, 

유리병이 바다에 빠지듯이, 물속에 빠져가지고 꼬르륵 가라앉는, 완전히 잠긴다는 뜻입니다.

 

즉 ‘고난의 잔’, 또는 ‘고난의 세례’란,

그 고난 속에 푹 빠져가지고

완전히 고난으로 점철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고난인

그러한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죠.

 

▶그래서 세 번의 세례가 있는 데요.

첫 번째는 물세례고,

두 번째는 성령의 세례이고.. 그런데 성령의 세례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세 번째 세례까지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 다 물세례만 강조했습니다.

지금도 물세례만 강조해서 뭐 세례만 받으면 다 구원받은 것처럼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

이런 식으로 나가는 그러한 곳도 있는데 그건 제쳐놓고요 (잘못되었고요)

 

두 번째는 ‘이제 물세례만 받으면 안 된다.

예수님을 그냥 지식적으로만 알면 안 된다. 우리가 거듭나야 된다.

진정으로 회심해야 된다. 어떤 분들은 radical concersion 이란 말을 씁니다.

사람이 극단적으로 좀 이렇게 확 뒤집혀져야 된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어요.

처음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것도, 성령으로 인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지만

그 후에, 성령의 충만을 받는 그러한 성령의 세례를 받는 단계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한 단계 높은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세 번째로 <고난의 세례> 마가복음 10장 38절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초청하신다는 것이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진짜 마실 수 있겠니?

내가 받는 세례를 즉 십자가를 너희도 정말 그 길을 갈 수 있겠니?’

 

이 예수님의 초청에 우리가 예, 하고 응답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부름 받은 종이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귀한 종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서 이러한 요청을 내게 하신다는 것은

벌써 그만한 그릇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를 각오와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그 미래의 결과를 다 내다보시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탈락할 사람은, 예수님이 아예 부르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마귀의 유혹도 있고, 시련과 핍박도 있고,

내 속에 육적인 요소도 있어서

 

예수님이 나를 고난의 길로 부르시고,

‘내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니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니?’ 하시면서

그 십자가의 길로 우리 각자를 인도하시지만

 

매일 순간순간 내가 도전에 직면할 때, 내가 어떠한 고난과 고통에 직면할 때

내 마음속이 뭐 이렇게 순순대로 달리듯이

그렇게 쉽게 순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마치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듯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교회에서 유명한 순교자 목사님들이

그냥 순순하게 마음에 태평스럽게 순교의 길을 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순간순간 갈등이 있었고, 매일같이 포기하고 싶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순간순간 닥치는 그러한 갈등을.. 매일 순종하며 나아갔다는 것이지요.

'예, 저도 주님의 잔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예, 주님이 받으신 세례에, 저도 함께 받기를 원합니다..' 하면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받으시는 잔을 같이 내가 마시고

주님 받으시는 세례를 내가 같이 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다 잘 아시겠죠.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만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만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만 영혼 구원의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크게 부자 되고, 승승장구하고 팔자 고친다 그런 뜻이 아니고요.

그런 고난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혼 구원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며

 

그런 예수님이 마시신 잔을, 내가 함께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내 속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잔을 마신다는 것이 뭐에요? 그 피가 내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피와 내 몸이 일심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라’ 그랬잖아요. 신12:23

 

그 예수님의 생명(피)이 내 몸속에 들어와서

내 속에서 내 몸과 일심동체가 되었을 적에

그가 하는 말이나, 그가 하는 사역이나, 그가 사는 삶은

모두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작은 예수로서 예수님의 그 권위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기 시대에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좀 알면.. 길을 알면.. 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깜깜 모르는 길을, 더듬으며 갈 수도 있습니다만,

배우면.. 알고 가기에.. 그 길을 더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소명을 받아서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생명을 살리는 그러한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부르심은, 십자가로의 부르심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대답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같은 말씀이 막10:38에도 나오지요. 지금 정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세베대의 두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합세해서

자기 아들들을 ‘주의 나라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소서.’ 이렇게 요청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답이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염두에 두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자기가 높아지겠다.. 라는 그러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교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분들이 생각하는 ‘신학교로 가라’는 소명은,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어떤 큰 교회에서 그래도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도 하고, 예배 사회도 보고..

이러는 것이 좀 아름답고 고상하게 보이니까.. 아 내가 세상 직장을 버리고 신학교를 갔으면 좋겠다..> 라는

그러한 마음이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자기가 기도하는 중에 <자기가 큰 교회를 목회하는 그러한 비전>을 환상 가운데 보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를 목회하도록 비전이나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는, 자기가 받았다는 소명은,

‘뭔가 좀 자기가 큰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부름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자기의 야망을 골돌히 생각하다가.. 거짓 환상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목회’ 하는 부름 받고, 환상을 보는 것을.. 우리가 부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부르심으로.. 주님은 오늘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설교 제목입니다. ‘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오늘날 주님은,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고, 나를 초청하십니다.

‘너희는 이 나라의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겠니?’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네 주님, 제가 기꺼이 큰 교회를 목회하겠습니다.’ 큰 교회도 필요하지만요.

 

오늘날 주님은,

‘너희는 세상에 복음전파와 선교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겠니?’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물론입니다. 주님, 그래서 저를 좀 크고 유명한 인물로 만들어 주십시오.’

동문서답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본문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염두에 두시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고,

우리들은, 자기 성공을 염두에 두고, 좌우에 앉을 사람이 되고자..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진정한 소명감이 뭐냐?’는 겁니다.

진정한 소명감은,

-내가 신학교로 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내가 큰 교회를 목회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것도 소명감이 될 수 있겠지만

 

정말 진정한 소명감은 무엇인가 하면,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것이 진정한 소명감입니다.

 

즉, ‘고난의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 희생의 십자가를.. 네가 지고 갈 수 있겠니?’

하는 주님의 초청에

‘예 주님. 기꺼이 지겠습니다. 제가 기꺼이 그 잔을 마시겠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 소명감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를 하든지/작은 교회를 하든지.. 그건 부차적인 부르심이고요,

먼저 십자가로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 이것이 일차적인 부르심(=소명)입니다.

 

당신은 진짜 소명감을 가지셨습니까?

혹시 아직 ‘내 잔을 마실 수 있겠니?’라는 초청을, 한 번도 듣지 못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재확인하고, 재점검 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주의 종의 길을 간다’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의 영광의 길에 동참한다는 그러한 부르심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길, 주님의 고난의 길에 부르심이라는 것을.

그 길에 동참이요, 그 잔을 같이 마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늘 읽는다고 하지만

사실 본문 마20:22절이나, 같은 말씀 막10:38절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을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신앙생활을

10년~ 20년 이상 계속할 수 있습니다..

 

생전에 미국의 3대 영향력 있는 기독교 저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혔던 헨리 나우웬

<이 잔을 들겠느냐?> 라는 책을 한 권 썼는데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마20:22절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이 말씀에 꽂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자기가 평소에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직자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성찬식에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어떠한 감동을 주셔서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이 말씀에 ‘꽂혔습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을 썼는데요..  <이 잔을 들겠느냐?>

  

나우웬의 책에 그런 점이 약간 언급되어져 있습니다.

자기가 과거에 막연히 생각한 성직자 이미지는,

처음에는 뭔가 좀 영화롭고, 존경받고, 우러럼을 받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성직자가 되고난 후에,

진정한 성직자의 길이 무엇인가? .. 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게 과연 무엇입니까?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성직자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란 뜻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은, 진짜 소명을 받은 사람은,

 

-내가 큰 교회에서 예배 사회 보는 목회자가 되겠다.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많은 청년들 앞에서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겠다.

그런 부름을 받은 사람은.. 아직 부르심이 분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주님의 부르심은 십자가로의 부르심이고, 고난의 장으로의 초청인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한 번도 주님의 이러한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소명/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미래에 그러한 초청과 부르심을 받을 수는 있겠지요.

 

어쨌든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서,

내가 주님 앞에서 내가 소명calling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 번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내가 부름 받은 이 길은

무슨 큰 영광을 얻고, 위대하고 우러러 보이는 그러한 일로서의 부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 자기의 육신을 따라 나오는 야망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야, 내가 너희를 우러럼을 받는, 높이 들림과 존경을 받는

그러한 자로 만들어줄게..’ 이런 식으로 성경에 약속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부르심은 오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라는 그러한 부르심이고

그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꼭 목회자 말고도, 소명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꼭 목회자만 이러한 부르심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고요.

여러 가지 은사가 있고, 여러 가지 직임이 있고,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오늘날 한국 교회 약화의 원인이 바로 선교단체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선교 단체, 패러처치 para-church 라고 그러죠.

 

para가 둘러싼다는 뜻입니다.

교회 바깥에, 교회를 둘러싼 교회.. 즉 선교단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패러처치들이 부흥했을 때는.. 한국 교회가 부흥했는데

패러처치들이 (선교단체들이) 약화되었을 때는.. 한국 교회가 약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패러처치 선교단체들이 약화되었느냐하면,

연도를 추정하자면 약 1980년대 후반부터, 88서울올림픽 열릴 때 즈음부터

선교단체 간사들이, 대거 신학교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신학교 나와서 뭐 전도사, 목사가 되면

어엿한 성직자 대접을 받는데

선교단체에서 아무리 열심히 고생해도, 뭐 간사 (스태프 staff) 이런 호칭밖에 주어지지 않으니까

 

제 생각에는 어쩌면 그 분들이

‘뭐 저렇게 신학교가서 목사 되는 사람이나, 선교단체에서 일하는 내나.. 다른 게 무엇이냐?’ (없다)

 

그래서 선교단체 간사들이 다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신학교로 다 들어와서 목회자가 된 이후로 보니까,

선교단체도 약화되고, 교회도 약화되더라는 것입니다.

 

목회자 말고도, 주의 종으로 여러 부르심이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교회가 부흥을 회복하려면, 선교단체들이 활성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선교단체 간사들이, 자기의 부르심을 소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꼭 우리를 부르는 부르심은

안수 받는 교단목회자가 되는 것만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안수를 받는 목회자가 되는 부르심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 어떤 외적 형식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뭐 어떤 자리로 부르심을 받든지, 그 부르심의 핵심은 무엇인가하면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이 말씀을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해본 그 사람이, 진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이 말씀/ 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한 번도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고

그저 신학교에 간 사람들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베대의 두 아들이나, 다른 제자들처럼..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나중에 성숙해서 십자가를 질 수 있겠지요.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다 정답을 알고

처음부터 뭐 십자가 질 것을 다 계산하고 해서

신중하게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거나 우리가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한 번은 이 고비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시신 잔을 진정 내가 마실 수 있겠는가?’

내가 가는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박수갈채를 받고, 우러름을 받는 그러한 길이 아니라

내가 가는 이 길은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이다! .. 고민해 봐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이 2천 년 전에만 있었고, 지금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길은 반드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잠시 정신이 혼미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자기가 이렇게 국내에서 사역을 크게 확장한 것은

다 우리 조상이 잘 믿었기 때문이고

또 내가 하나님께 헌신을 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내가 뭐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린다..’ 라는 뜻으로,

자기 자랑을 하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여러분도 나를 잘 따라오면, 이렇게 부귀영화를 잘 누리게 될 것입니다.’

라는 뜻도, 거기에 복선으로 깔려있습니다.

 

설교가, 십자가의 길로 초청을 해야 되는데..

부귀영화의 길로, 자꾸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말을 들을 적에,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오해인가 하면

‘주의 길을 가는 길이, 주님의 부르신 그 길을 충성스럽게 가면

저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 세상에서 팔자 고치게 된다.’

그런 뜻으로 말을 하거나/ 그런 뜻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십자가의 길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가고 있으면서도

그런 (잘 믿으면 부귀영화 얻는다) 말에 미혹을 당해서

자기 스스로 혼란에 빠지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자기가 많은 고난을 당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구나.

내가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고생만 진탕 하는 것을 보니까..

이게 내가 지금 무엇인가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닌가!’

 

물론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 분도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는 그 고난의 잔을 마시고

그 길을 올바로 가고 있기 때문에도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그게 권위고, 영광이긴 하지만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