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가 계속 높아져야 합니다 신18:22, 고전14:29 아래 설교 녹취, 출처보기
*원제목 / 분별력 없는 믿음과 순종
※한 나라에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정치가만 잘 해야 되는 게 아니고
전체 민도民度가 높아져야 한다고 하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달라지려면, 지도자급 목회자 몇 명이 잘 해야 되는 면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신자 전체 민도가 높아져야 합니다. 지금 꾸준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지도자 몇 사람이 잘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를 개혁하려는 분들이 실수한 것은
개혁대상을 대형교회와 목회자들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또한 목사와 평신도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대형교회와 목사들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입니다.
개혁의 대상은, 대형교회도 아니고 소형교회도 아니고.. 모든 교회이고
목회자도 아니고 평신도도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물론 목사들의 잘못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을 잘못 가르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국의 속담에 ‘탱고 춤을 추려면 파트너가 있어야 된다’고 한 것처럼
성도들이 맞장구를 쳐주고 동조하고 *It takes two to tango
심지어 잘못된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같이 어려운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 뜻이 맞고 통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 그릇된 관행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김영준 목사 는 전형적인 개혁스타일이 아닙니다.
저는 보수적인 사람이고, 신앙과 삶이 보수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위기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물어보게 만들고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느냐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국가의 의한 것이 아닌, 언론에 의한 것이 아닌, A
교회에 의한 교회의 개혁, B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의한 신앙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B가 안 되면, 파국적으로 A가 올 수 있습니다. 역사가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기독 개신교를 개혁하기 위해서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컨대 교회마다 정관을 만들어야 된다.
-또 교회의 재정을 투명하게 만들어야 된다.
-또는 목사의 권위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라고 주장하는데,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신학과 신앙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제.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제도적인 개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변화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돌아다니면서 운동을 한 것이 아니고,
그는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고/ 책을 쓴 것 뿐입니다.
그러나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젊은 독일 신학자의 쓴 글이, 유럽 교회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 발생 약 50년 전에,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기를 발명하여
유럽 사회에 대도시마다 인쇄소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르틴 루터가 글을 쓰기만 하면, 그것이 삽시간에 전 유럽에 퍼졌던 것입니다.
원본 1부가 최초에 (일례로) 50부 인쇄되고, 그 50부가 말을 통해 인근 각 도시에 전달되면,
그 도시들에서 다시 인쇄기로 대량 찍어 내어서, 주변 소도시로 확산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소위 ‘설교 소책자’를, 2~3주 간격으로 계속 써냈고,
전 유럽에 그것이 단 기간내 확산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개신교가 다른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신학과 신앙의 변화가 일어나야 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역설적인 현상으로, 지금 한국 개신교에는
이미 말씀이 많습니다. 말씀의 홍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TV를 틀면 24시간 설교를 방송합니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달리, 예전 또는 예식 중심의 예배가 아니고
설교중심의 예배이기 때문에
교회마다 설교말씀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혹자는 ‘무슨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하느냐?
이미 말씀이 풍족한 것이 아니냐.’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것은 미묘한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가 말씀을 강조하다보니까
실제로 성경말씀을 강조하기 보다는
설교자의 권위를 더 강조하는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성도들이 뒷받침/맞장구 쳐 주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보다는 설교자의 권위가 더 높아지다 보니까
성경의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제가 과거에 LA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LA를 방문해서, 수정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친구 몇 친구를 데리고, 그 부흥회에 참석을 했는데
그 친구는 그 목사님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의 첫 인상이 무엇이었냐 하면
‘목사님이 성경을 별로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설교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제 삼자(모르는 객관적인 사람)가 확실하게 분별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이름난 설교자들의 명성과 권위가 커지다보니까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사상과/ 개인의 경험을 가르치는 설교로
변질이 되고 있었는 것입니다. (과거의 얘기죠)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와 맘먹습니다.
교회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개신교회는, 교회의 권위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설교자의 권위만이 있는 것 뿐입니다.
만약 마르틴 루터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이와 같이 성경보다도 커지고, 교회보다도 커진 설교자의 권위에 대해서
반발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회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탱고 춤도 파트너가 있어야 된다고,
성도들이 동조하고 성도들이 맞장구친 면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 개인의 잘못으로 화살을 돌리지 말아야 하고,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점입니다.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립니다.
어느 여자 성도님이, 생활비가 부족해서, 친오빠에게 돈을 꾸었어요.
다행히 오빠가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 성도님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에게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그 빌린 돈의 십일조를 내라’고 하더래요.
그런데 그 목사님의 지론은,
‘당신이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이 오빠의 마음을 움직여서,
돈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했어요.
어이가 없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한국 개신교의 과거의 현 주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명목으로 탐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도 탐욕이 있고, 또한 그것이 성도의 탐욕에 어필하는 것입니다.
여성도도, 그와 같은 억지를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요.
▲일례를 들었지만, 다른 예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관행은, 큰 교회/ 작은 교회를 가리지 않고 편만하게 펴져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를 가르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이러한 그릇된 관행이 있습니다.
큰 교회는, 오히려 세상의 이목을 받기 때문에
실수를 하더라도, 실수가 노출이 될 수 있지만,
작은 교회는, 당사자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실수가 노출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왜 한국의 개신교 교인의 숫자가 늘지 않느냐..
왜 전도가 힘드냐를 궁금하게 생각하는데..
만일 여러분이, 제가 말씀드린 그런 교회를 다니셨다면
교회를 다닐 마음이 나겠습니까. 교회에 나갔다가 시험에 들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의 수준이 더 똑똑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잘못 배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우리가 좀 더 뜨겁게 믿기만 하면, 좀 더 열심을 내기만 하면,
그런 부흥이 오고, 이런 문제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성경적 진리를 떠난 무조건적인 열심은
흔히 광신이 되어버리고, 외부인들에게 맹신으로 비춰지고,
무의미하고 또한 모욕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교회와 신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전통 신앙의 영향력 때문인지
영력 앞에서는 껌뻑 죽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 예언을 한다고 하면, 그냥 깜빡 죽는 것뿐만이 아니고
머리를 들이밀고 나한테도 좀 예언을 해주시와요.. 이렇게 합니다.
성경말씀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도, 예언한다고 하면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몇 해 전에 어느 아프리카목사님(데이빗 오워)이 대한민국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그것이 인터넷을 통해서 널리 퍼졌습니다.
이 분이 예언하기를,
‘한국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용한 선지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가 과거에 아이티에 지진도 예언했고 맞추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했습니다.
아이티가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치셨다는 논리였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하필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를
지진으로 치신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 이길래.. 가장 가난한 나라를
지진으로 쳐야 그들이 회개를 합니까.
그럼 멀쩡한 나라는 얼마나 거룩하길래..
지진도 없고, 기근도 없는 나라는, 도대체 얼마나 경건하길래.. 무사한 것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거룩하길래 그동안 편안하게 살아왔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그런 식으로 흑백논리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때 나마 그 분을 따라가고 추종한
수많은 한국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지인이, 주한미군 카투사에 복무하고 있었는데,
주한미군의 분위기도 바짝 긴장했다고 합니다. 데이빗 오워의 예언대로, 진짜 전쟁이 일어날까봐요..
▲일단 누가 예언을 하면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거부하기에는 두렵고, 받아들이기에는 꺼림직 하고..
여러분,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분별력입니다. 분별력!
한국 교회는 그 동안 너무 오랜 시간동안 믿음과 순종만을 가르치고
분별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냥 믿어라. 순종하라. 라는 것만 가르쳤지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 결과로 대한민국의 개신교도들이 우둔한 백성들이 되었어요.
대한민국 사람들은 결코 우둔한 사람들이 아닌데,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우둔합니다.
사회지도층이던/ 지성인이던/ 학생이던
다른 면에 있어서는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우둔하고 분별력을 결여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분별력을 배우지 못하고,
순종과 믿음만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그것이
어떤 특별한 신령한 은사가 아니고
성경말씀을 알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되는데
성경말씀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신령한 은사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많아요.
그러다보니까 신비주의가 되어버리고/ 기복신앙이 되어버리고/
미신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목사나 평신도나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이 꾼 꿈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데,
무슨 꿈으로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순위를 바로 잡아야 되는 것이에요.
(혹시나 신령한 꿈을 꾸더라도, 반드시 말씀으로 확증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시면, 성경을 읽으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수천 년에 걸쳐서 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이것을 건너뛰시고
이 말씀의 기준에 어긋나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천사의 계시든/ 꿈이던/ 환상이던/ 아무리 기발한 경험이라도
만약에 이 성경말씀의 기준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거짓이요. 거짓 예언이요.
거짓 선지자요. 미혹인 것이요.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4:29에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예언은 한 사람의 예언만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알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을 겪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한 사람만을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도, 민족적 배경을 알 수 없는 외국 사람이
우리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기도하고 예언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확인하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고 분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정말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냐 옳은 예언이냐/ 이루어지느냐
분별해야 됩니다.
살전 5:20절에도 ‘예언을 멸시치 말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들 주변에도 예언하는 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정의 대소사가 있을 때, 찾아가서 기도와 예언을 받는 그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혹시 유익할 수도 있기 때문에요.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예언은 위험하고
여러분의 신앙에 혼동을 가지고 오고
그리고 때로는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오빠에게 꾼 돈에 대해서 십일조 내라고 말씀하신 그 목사님도
예언한다는 분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분별을 하지 못하면 교회에서 시험 들기 아주 십상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그 동안 믿음과 순종만을 강조했지, 분별력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교인들을 우둔한 사람으로 남겨두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잘 믿는 줄로 생각했어요. 그것이 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로, 은혜를 사모하지만 미신적이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기복 신앙적이고
목회자의 말을 잘 듣지만, 우둔한 성도들을 양산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뭔가 거짓선지자와 거짓 가르침이 교회에 스며들어도, 분별하지 못하고,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시겠지. 어떻게 되겠지.’ 이런 식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영력이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거짓) 예언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내가 뭐라고 했다가 벌 받지 않을까.. 저주 받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다른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데 영력이 있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두렵기 때문에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신18:22절에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이미 거짓 예언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신약에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에 성령을 주시고 성령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 소싯적 기도했다는 사람치고 예언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방언하고 방언통역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예언이.. 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을 한다고 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에는 방자히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방자하다는 말은, 건방지다/ 거리낌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어 입에 올린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자기의 욕심을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속에 꺼림직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하고 넘어가는 사람들 많아요.
여러분 한국 개신교가 변화가 더딘 이유는
근거 없는 두려움 무익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분별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목회자들이 두려움을 장려합니다. '주의 종의 말을 들어야 된다.'
이런 식으로 성도들이 이 자기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냥 무분별하게 순종하도록 만드는 그런 것은
그건 목회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은 두려움을 무기로 삼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요,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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