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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삼도

LNCK 2014. 4. 7. 12:39

◈복음삼도                 행10:38, 마5;16                      출처보기 17분부터~

 

복음이 내포하는 3가지 중요한 신앙은, 약함, 착함, 주변성입니다.

 

인생칠도, 복음삼도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입니다.

 

 

◑1. 약함

 

제가 2000년 7월에, 영국 케직 사경회에 가서,

존 스토트 박사의 다섯 번의 설교를 너무 감명 깊게 들었어요.

그 분의 강조점이 ‘power through weakness 약함을 통한 강함’이었습니다.

 

그 분이 세 가지의 약함을 지적하시더라고요.

 

-고린도전서 1장 ‘십자가 복음은,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도, 약하고 어리석어야 된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받는 사람도, 약하고 어리석어야 된다.

너무 중요한 말씀이에요.

 

▶1.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멋지게 치장하려고 안 그랬어요.

이것은 어리석어야 되니까. 약해야 되니까요.

로마의 웅변술로 포장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헬라의 지혜로 포장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복음이 그러면 이상해지니까요.

 

인간의 어눌한 목소리로, 어눌한 논리로 복음을 변질시키면 안 되니까

복음의 컬러 그대로, 약하고 어리석게,

그래야 성령이 나타나시니까요.

 

▶2. 복음을 전도하는 전도자가.. 약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도하는 자를 가리켜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저 설교자, 저 유명한 설교자를 대단히 높이니까

아볼로 선생, 바울 선생, 게바 선생이라고 높이니까..

바울은 집어 치워라. 중성 명사를 썼습니다. (고전3:22 ‘모든 것’이 너희 것?)

남성 명사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조금 내려가면 중성도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이 뭐냐,

없는 것이다. 낫싱이다. (고전4:4~5)

조금 내려가 보니까 ‘scum of the earth 만물의 찌기다.’ (고전4:13)

‘나는 시궁창에 버려진 쓰레기다. 음식 찌꺼기다.’

이것이 복음 전도자가 갖춰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 약함을 갖추었죠. 스토트 박사님 약함을 갖추었죠.

스토트 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세상을 다녀보아도, 이런 약함을 갖춘 설교자를 찾아보기가 너무 힘들다.’

 

스토트 박사님이 자기 간증 하나 하는데

자기가 매년 호주에 가서 큰 선교 집회를 인도하는데

어느 해, 자기 목이 꽉 막혀서

그 분의 심오한 성경 강해, 그것을 전혀 할 수가 없었어요. 목이 꽉 막혔어요.

 

그래도 안 할 수 없으니까, 청년들하고 함께 기도하고 올라가서

까마귀 소리로 몇 마디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도 그랬고, 그 일 후에 몇 년 마다 가면, 수많은 젊은이들 수 백 명이

‘그 때 목사님 목이 막혀서 몇 마디 하셨죠. 그 때 제가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러니까 스토트 박사님도 놀랐습니다.

‘이런 내 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구나.’

괜찮은 설교가 아니라도, 약한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복음을 받는 자도 약해야 합니다.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잘 난 것이 하나 있냐.

지혜로운 것들이 하나 있냐. 문벌 좋은 것들이 하나 있냐..

이렇게 약하고 어리석다는 말이 자꾸 나와요.

 

지방 얘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만,

평안도에서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어요.

왜냐하면 평안도가 옛날에 멸시를 많이 받았어요. 참 이상해요.

 

또 전라도에 가면 순교자들이 많아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제가 보기에는, 전라도가 멸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멸시 받는 사람들을, 불러서 쓰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 전파자, 하나님의 종은, 멸시를 받아야 되요. 받게 되어 있어요.

바울도 ‘너희 부르심을 보라.’ 그랬잖아요.

‘나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다. 십자가는 약한 것이다’ .. 그 얘기지요.

 

초기에 조선 교회는 참으로 가난하고 약하고 힘이 없었어요.

그래서 교회는 겸손히 땅에 엎드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어요.

조선 사람들이 아주 땅에 엎드려졌어요.

그 때 하나님이 축복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지금 한국 교회는, 너무 커지고/ 너무 강해지고/ 너무 지혜로워 졌어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너무 위대해 졌어요. 거의 우상화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사회로부터 실망과 불신을 받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한국 교회가, 조금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일부러 바보가 될 수는 없을까요?

춘원 이광수 선생이, 젊었을 때, 평양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자기를 치료하는 장기려 박사님보고 ‘당신은 성자가 아니면 바보요!’ 했다지요.

 

바보 소리를 듣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에요.

조금 모르는 것이, 무식해 지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리석어질 때 하나님이 지혜로 역사하실 틈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약해질 때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타나실 여지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이제 어리석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지혜,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해야 되겠어요.

 

예수님의 삶과 기독교 복음의 첫째 특성은 약함이에요.

목회자들, 신자들,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겠어요.

약하게, 일부로라도 약하게 살아야지요.

 

사실 너무 강한 아내를, 남편들은 좋아하지 않겠죠.

조금 약해야지. 조금 모자라야지.. 이게 사람의 심리에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너무 강하고 너무 부유한 신분을

예수님은 조금 버거워할지도 몰라요. 조금 약해야죠.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분은, 일부러 약하게 살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2. 둘째는 주님께서 사신 삶은 <착한 삶>이었어요.

 

▶예수님은 말씀이셨지만, 육신을 입으시고는 ‘착한 삶’이 되셨어요.

말씀도 하셨지만, 그의 행하시며 가르치심, 그 착함이 먼저였어요.

설교는 조금 다음이에요.

 

착한 일을 먼저 하셨어요. 그저 고치죠, 병자를 고치죠, 안아주죠, 품어주죠,

그 다음에 뭔가 설교를 한 마디 하셨어요.

 

문둥병자, 중풍병자, 로마 백부장, 소경,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인간쓰레기, 막달라 마리아,

배신자 베드로, 그저 와서 ‘이 배신자야’ 이렇게 말 안 해요.

 

얘들아,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저 부드럽게 착하게,

뭐 ‘이 자식아’ 이런 것도 아니고

‘사울아’ 어떻게 그렇게 부드럽게, 착하게 말씀하셨는지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예수님은 착해요.

그 사마리아 여인과 비슷하게 몸이 피곤해지셨어요. 목이 말라지셨어요.

그리고 나 목마른데 물 한 모금 줄 수 있어? 착한 모습이에요.

 

무슨 유창한 설교 아니에요. 설교는 ‘은’이에요. (‘금’은 착함이에요)

그저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착하게 대하셨어요.

아이들보면 안아주고 품어주시고, 3년 동안의 삶은

모든 약한 자, 모든 가난한자, 모든 병자들을 도와주시고 먹여주시고 치료하시는 착한 삶이에요.

 

마지막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최고의 착한 삶을,

착한 죽음을 죽으셨어요.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착하게 행하신 분이세요.

베드로는 보았어요. 예수님이 이방인, 원수 나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세요.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거기서 이방인 백부장을 축복하시는 것을 보고

 

‘아 유대인만이 아니구나. 가문도 아니구나. 혈통도 아니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착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사야 1장, 58장, 전부 착한 일을 강조해요.

예수님이 ‘너희는 소금과 빛인데,’

소금과 빛이 뭐냐 설명을 하셨어요. ‘착한 행실을 나타내는 것이 소금과 빛이다.’ ↓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었어요.

 

‘저희가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의 복음의 둘째 특성은 ‘착함’이란 뜻입니다.

첫 번째 특성은 ‘약함’이었고요.

 

▶종교개혁의 그 모토가 옳긴 옳아요.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그런데 믿음만/ 말씀만/ 은혜만.. 하고 나간다면.. 그건 틀려요.

 

믿음만! 그러고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이라고 그랬어요.

말씀만! 그러면서 책상 신학/ 이론에만 빠져서도 안 되고,

은혜만! 말하면서도.. 자기 책임이 있어야 하고요.

 

은혜를 강조해야죠. 말씀을 강조해야죠.

그러나 두루두루 성경을 봐야지요.

 

한국 교회가 설교, 신앙, 은혜가 충만한 것은 감사한 일인데

착함이 없는, 눈물과 긍휼이 없는 설교, 신앙, 그것은 가짜예요.

 

사도가 천사의 말 하면 뭐하냐,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으면 뭐냐.

착한게 사람이죠. 그게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바울이 그랬으니까요.

 

조금만 착한 일 하면, 천사도 보내주십니다.

도르가, 루디아, 디모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어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다’라고 성경에 그랬어요.

 

그 다음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요. 바나바가 없으면 사울은 없어요.

안디옥 교회 없어요. 유럽 선교 없어요.

착한 사람들이, 다 사도행전의 주인공들이 되었어요.

 

▶저는 어떨 때 하루 종일 ‘네가 십 만원 가지고 어디를 좀 가봐라.’ 라는

내적 음성을 들을 때가 있어요.

 

제 개인적 이야기를 설교에 해서는 안 되는데요, 한 번만 용서하고 들어주십시오.

보니까, 옛날부터,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남대문 지하도에 가면, 노숙자들이 거기에서 자요.

 

제가 작년에 서울역에 갔더니, 노숙자 수 백 명이 있었고,

여러 단체가 먹을 것을 주고는 했어요. ‘밥 퍼 사역’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작은 돈이라도, 성령의 지시하시는 음성이 있을 때

얼마라도 갖고서, 도우러 갑니다.

그래도 오십만 원이면, 적어도 100명 식사 값은 되고,

어떨 때 백만원이면, 적어도 200명 식사 값은 되잖아요.

그래서 조금 가지고 갔어요.

 

제가 교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십 만원 가지고 좀 가보세요. 일부라도 감당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의 DNA가 조금 바꿔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면, 성경이 말하는 ‘착한 행실’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아요.

 

사도행전은 착한 사람들의 행전이에요.

‘성령의 행전’이지만, 동시에 ‘착한 사람들의 행전’이에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도르가, 쭉 나와요. 예수님이 착하셨다.

우리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착해야 되요..

 

 

◑3. 세 번째 마지막.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복음의 특성이 뭐냐.

주변으로 가는 거예요.

 

우리는 이기적이에요. 지역적이에요.

고향, 민족, 내 국가, 내 교회. 예수님은 하늘을 떠났어요. 주변으로 오셨어요.

땅으로 오셨어요.

 

예루살렘으로 처음에 안 오시고 베들레헴, 갈릴리로 가세요. 사마리아로 가세요.

마지막에는 지옥에 가셔요. 신비로운 이야기인데 옥에 갇힌 영들에게.. 이렇게 주변으로 가셔요.

 

제자들 보고, ‘너희도 교회를 떠나 저 주변으로 가라’고, 사실 명하셨죠.

 

베드로 보고도, 마지막에 로마까지 갈 수는 없냐.

바울보고, 자꾸 로마까지 갈 수 없냐.

 

▶당시 로마는 지금으로 말하면 ‘악의 축’이었죠.

그렇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시는 거예요.

 

‘마귀’ 그놈 외에는 다 선교 대상이에요.

공산권도 모슬람권도,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변 지역’으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역사는 바꾸어져요. 소망이 없던 곳에서 진짜 교회가 나오기도 해요.

 

예수님은 상류층에도 가셨지만,

땅 끝, 주변 지역 marginal place 등이, 예수님이 주로 가신 곳입니다.

사회적으로는 하류층, 창기, 세리들, 이방인들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땅 끝으로 가라고 명하셨어요.

 

구약의 아브라함보고도, 땅 끝으로 가라고 하고

이사야보고도 너는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이사야 19:24에 보면

이제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 앗수르, 애굽, 셋이 서로 교류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세상의 복이 된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 애굽 같은 이방국가들까지

모두 말일에는,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 예언되어 있는 겁니다.

☞이사야서 19장 주해 보기 http://blog.daum.net/yhbg67/6906986

 

그래서 우리는, 지경을 넓혀야 해요.

우리가 바라보는 비전의 한계를.. 땅 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민족은, 한반도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유교라는 사회 문화적 전통 때문에,

개인 중심, 지역 중심성이 강합니다. 그리고 타 지역에 대해서는 배타적이 되죠.

경상도면 제일이고, 전라도면 제일이고

내 교회면 제일이고, 장로교회면 제일이고

내 교파면 제일이고.. 내 교파, 이것은 성경주의는 아니에요.

 

조만식 장로님, 주기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까지 민족주의를 비판했어요.

민족주의, 국수주의는 성경 주의가 아니다.

‘민족주의자는 이 교회에서 나가라.’ 이런 설교까지 했어요.

 

주기철 목사님이 ‘일본 놈이라고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조만식 장로님이, ‘일본 사람들 고이 보내드려라.’

한경직 목사님 마지막까지 ‘일본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어요.

 

자기가 박해를 받은 그 장본인인데도 ‘땅 끝으로 가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네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을 닮은 삶은, 언제나 주변성을 가집니다. 땅끝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아내가 자기 친정집에만 매여 있으면, 남편이 좋아하지 않겠지요.

주변을 바라보고, 땅 끝을 바라보는.. 그런 복음의 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치는 말.

예수님의 삶의 특징, 기독교 복음의 특징,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어요.

(저는 이것을 줄여서 ‘복음삼도’라고 부릅니다.)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의 삶.

그 삶을 대표적으로 산 사람들을 제가 지적하면

성 프란시스,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등입니다.

 

성 프란시스

첫째, 버림과 청빈과 약함의 삶.. 버리면 약해져요.

뭐가 있어야지 강하지요. 버림과 청빈과 약함의 삶을 살았어요.

 

둘째로, 프란시스는 모두를 사랑하는 착함의 삶을 살았어요.

셋째는, 고난과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주변 지향적 삶을 살았어요.

 

손양원 목사님도 마찬가지에요. 가난하고 약하게 사셨어요.

가장 불행한 암 환자들과 원수같은 사람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착한 삶을 살았어요.

양지가 아닌 음지를 향해서, 평안이 아닌 고난을 향해서

삶의 땅이 아닌, 순교와 죽음의 땅을 향해서 달려가는, 주변 지향의 삶을 사셨어요.

 

한경직 목사님이 그랬어요. 그 분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했어요.

그저 누가 오라고하면 이렇게 가고. 떠나자고 하면 떠나고,

그래서 늘 고민을 했어요. ‘내가 또 여기를 버리고 떠나는구나.’

 

그래서 전두환, 박정희, 이런 사람들이 오라고 하면 가서 기도해 주고요.

약했어요.

그런데 그 분은 약한 가운데 위대함이 나타났어요.

 

그 분은 착했어요. 한국에 나타난 모든 착한 기관들,

한 목사님의 손을 통하지 않고, 이 착한 일을 하는 기관이 생겨난 게 어디에 있느냐..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다 한경직 목사님 통해서, 소위 NGO 자선단체들이 생겨났지요.

마지막 ‘사랑의 쌀’ 나눔 운동까지요.

 

그 분은 주변 지향적이었어요. 일본도 북한도, 아프리카도,

교파가 다른 신현균 목사님도, 김준곤 목사님도 모두를 품어요.

불교 대표도, 천주교 대표도, 다 품으셨어요.

 

그래서 천도교 대표, 불교 대표도

‘그 분은 진짜 성자였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사랑했던 성자였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니까,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요. 모두를 품으셨어요.

 

▶이제 말씀을 마치는데, 지금은 주님을 조금 바라봐야 할 때에요.

목사님들 바라볼 때도 아니에요. 물론 목사님 말을 듣지 말라는 건 아닌데

완전한 목사는 하나도 없어요.

 

모두는 한경직 목사님을 존경해요. 그러나 주님을 본 받아야죠.

물론 목사님도 존경해야 돼요. 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에요.

 

저를 포함한 모두.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약한 자, 어리석은 자,

죄인들을 부르셨어요. 저는 죄인들을 부르셨다는 것이 너무 고마워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셨구나. 그래서 거기에 나도 속해 있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 저는 너무 좋아해요.

‘아 내가 죄가 많으니까 은혜가 더 넘치겠구나.’ 완전한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복음의 특징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약해지고, 착해지고, 주변성 (복음의 소외 지역으로 가는 것)인데

사실 제가 하나 더 하려다가, 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