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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의 끊기 - 베드로

LNCK 2014. 7. 6. 14:15

◈자기 의 끊기 - 베드로             마16:18~24, 마26:75, 요21:17              아래 설교 녹취, 출처

 

 

 

 

 

▲복습.

앞 시간에서 보셨듯이,

성경이 다윗의 영웅적인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신앙의 모델을 삼지 않고,

다윗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확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이 조명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짓겠다 하는데 대한, 하나님의 답이었죠.

‘(오히려) 내가 네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다윗의 왕권의 영원함과 승리함이

다윗의 어떤 것, 그의 능력이나 믿음에도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그런 일을 작정하시고,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윗이 그의 안에 가진 남다른 종교심, 남다른 신앙심에 의하여

성경이 그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우리가 어떻게 우리 안에 죄만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과 용서하심의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한가.. 의 본보기로

다윗이 서있다.. 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은 이 시간에 확인할 베드로에 있어서나

(다음 시간에 살펴 볼) 바울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모든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장 내용도

베드로가 어떻게 베드로가 되는가.

다윗에게 일어났던 일이,

베드로의 생애 속에서 어떻게 그대로 반복하여 강조되는가를 확인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물었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천국 열쇠를 주어 매고/ 풀고의 권리까지 교회에 주었습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교회가 선다고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사실 위에, 교회가 섭니다.

 

이것하고는 다릅니다.

베드로의 불같은 고백 위에 서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진심과 헌신과 열정에 서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베드로의 믿음 위에도 서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한 고백의 사실, 예수, 그는 메시아며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 위에 교회가 섭니다.

 

예수께서 구원자 되시며 하나님인 사실 위에,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의 남다른 헌신 위에 서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앞 시간에 이야기한 것과 같이,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으로 다윗을 만들지 말고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무너진 다윗의 깨우침,

‘우리는 죄의 종자입니다. 주께서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않습니다.’와 연결됩니다.

 

이 사건에서의 초점은 교회를 예수님이 세웠다. 하는 것과 함께

그것은 예수의 누구 되심,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열심/헌신/순수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걸 증명이나 하듯이

베드로가 그런 놀라운 고백을 한 후에

방금 넘어지고, 주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21절에,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죠.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죽도록 내가 놔두지 않겠습니다.’ 이것이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라고 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그의 고백이

맞는 고백이면서도,

그가 기대한 그 고백의 핵심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해방자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해방자이기를 바랬다는 것이 여기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는

베드로(인간)의 헌신, 순수함, 결심, 신앙고백 위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예수께서 구원자 되시며 하나님인 사실 위에, 교회를 세웁니다.

라는 사실을, 마16장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눅22장으로 가 봅시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또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베드로의 “자기 의”가 깨어지는 사건들이, 이렇게 전개되어집니다.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죽을 준비를 하고 있고

제자들은 누구 공이 더 크냐를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눅22:24.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때 예수님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라는 청천병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눅22:31~32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한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대표로 해서 하셨고,

사실 따져보면 제자들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믿음의 핵심이 빗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같이 동행한 제자들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이 실제로 잡혀가자 다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인 승리를 할 것이고

그때 누가 더 큰 상을 받을까 외에는 모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사탄이 내달라고 할 만하죠.

다만 주께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늘 일종의 대표자입니다.

사단의 청구를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랍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3

 

그러니까 아까 마16장에서 볼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충성의 다짐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34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특별한 진심과 열심을 가지고, 주를 편들며 충성을 약속하고 있는데도

주께서 이 세 번 부인하는 이 실수, 실패를 방치하십니다.

 

심지어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한 것을 거절하시면서도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은 놓아두셨습니다. 참 의아로운 일이죠.

 

마26장에 가면,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26:75

 

운다는 것이 뭐죠?

소원은 있으되, 이룰 능력이 없을 때.. 우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충성 서약은 진심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심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은 왜 필요했을까요?

베드로는 조금 더 멋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설교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베드로를 영웅시하려고 들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자꾸 영웅화 합니다. 남다른 사람이라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 대표적인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우리는 사실 성경이 말 하는 대로 쫓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성경 속에 위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위인은 없습니다.

 

아무도 구원을 자신의 실력으로 이룰 자가 없으며

죄 아닌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누구든 윤리 도덕적으로 꽤 깨끗한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라는 것은, 또는 선, 또는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만들어질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며 화목 되어 있지 않으며 연결 되어 있지 않으면 죄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윤리 도덕의 이전의 문제죠.

 

베드로에게서도 확인하는 것이 뭐냐 하면

베드로가 가진 남다른 열심 때문에, 그가 제자가 된 것이나, 그가 쓸모 있게 되었다..를

성경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다른 자들이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쓰셨기 때문에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썼다’ 라는 것은 그들이 남달라서, 유용했다, 쓸모 있었다..

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면 그가 아무리 못났어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전달되는 한 모든 능력들이 결과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마치 그 일을 만들어 낸 것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차단하려는 것이 성경의 목적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21장으로 가 보시면

이 모든 일의 결론이 이렇게 납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사건이,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회복하시는 것으로 마감이 됩니다.

 

이 내용은 물론 베드로의 세 번 부인 때문에,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그의 사도직을 회복시키는 사건으로서, 그 첫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첫 질문이 이것이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 것은 진심입니다. 충성도 진심입니다.

그 때는 ‘주여,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용감하게, 자기 의에 가득 차서 고백했지만,

 

지금 요21장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내용상 다른 고백을 하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21:17

뭐가 달라졌나요?

제가 진심이 있사오나, 능력은 없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된 것이죠.

“자기 의”가 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결국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진심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고, 진심을 결실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자기 의의 깨어짐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상의 여러분 교회 안에서 믿음의 이웃들과 보세요.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이런 비판적 마음이 생기면, 여러분은 신앙을 개뿔도 모르시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 의”가 죽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한 ‘말을 하고, 잘 가르쳐주면 알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을 하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도 없고, 알아도 행하지 못합니다.

행해도, 정당한 결실로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하여, 굉장히 자존심상해 하고는 합니다만,

다윗, 베드로, (다음 시간에 살펴 볼) 바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실상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완성 시키려고 하십니다.

베드로서식으로 이야기하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신앙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자꾸 나를 좌절시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의 진심, 능력, 열정 까지도 하나님이 좌절시키는 이유는

그것으로 대신 채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채우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철저히 ‘하는 일’ 보다 ‘존재’에 우선합니다.

됨됨이가 우선하고

그것이 인생 상의 모든 삶의 보존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이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드러난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시는가를, 배웁니다.

 

다윗에게 그랬다시피

베드로에게도, 베드로의 진심, 헌신, 충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고백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왜요? 우리가 하나님이 의도하는 구원의 완성과 목적을 위하여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주시려는 것들로 채워서 완성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

 

그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성경에 다윗의 생애나,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증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후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사도행전 3장으로 가봅시다.

 

▲사도행전 3장에는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나오고

그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제 갑작스러운 설교를 하게 되었죠.

 

행3:11~16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고백을 보면, 베드로가 확연히 달라졌지요?

이전에는 베드로가 자신의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에 어떤 조그마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즉 이제는, 자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만이 시작이고 끝이며, 모든 것으로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도, 베드로가 한 경험(자기 의의 깨어짐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을 가졌으니

당연히 세상적인 일에서 승리하고 형통하게 되리라..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제 이루시는 일에,

내가 쓸모 있기를 바라고,

나의 열심과 헌신을, 당연히 하나님이 바랄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이렇게 잘못해도, 신앙생활이 꽤 괜찮게 가기도 합니다.

얼추 비슷하게 가지만, 근본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꼭 우리가 신앙에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자기 의”라는 것이 붙어 다닙니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 이렇게 심판자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너는 왜 안 하냐. 너는 왜 그 꼴이냐.’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자기 의’가 충만한 것이죠.

 

우리 중에 누가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는 자가 있으며

우리 중에 누가 자기 진심을 바쳐서, 뭘 이룬 것이 있습니까.(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인데도

베드로를 통해서, 성경이 확인 시키고

다윗을 통해서 확인 시킨 이 일을.. 성도들은 늘 오해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식으로 경험을 하느냐 하면

예수를 만나고, 구원함을 얻고, 열심을 가지고..

그 때로부터 사실 다윗의 경험과 베드로의 경험을 하는 꼴이 되죠.

 

(신앙에 열심 있고, 믿음 있는 자들이.. 먼저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넘어져서, 자기 의가 깨어지는 것이.. 오히려 은총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신앙의 가장 중요한 표준은

누가 더 많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가.

누가 더 많이 그리스도께 의지하는가.. 하는 싸움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실 일은 다 해주셨으니까

이제는 내가 주를 위해서 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지없이 실패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뜻밖의 모든 성도들이 경험하는 신앙의 현실은 무엇이냐 하면..

좌절이에요. 그리고 실패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느냐 하면.. 절망하게 되요.

‘내가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이 생각을 하죠.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하나님이 내 진심을 안 받아주실까?’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고백에서 본 것과 똑같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혈서 쓰는 것과 같은 정열이 있어서,

‘그래서 내가 주를 위해서 다 할 테니, 주는 가만히 계십시오.’

그렇게 했다가, 뭐라고 욕을 먹는다고요? 사탄이라고요!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하시고 결론이 뭐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지니라.’ 마16:24

그러니까 신앙은 결국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처음 하게 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구원 받은 신자의 현실의 승리를 주시지 않는가?

죄에 대한 승리를 왜 주시지 않는가?

죄에 대하여 나는 왜 지는가?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자기 의를 꺾기 위해서입니다.

이 자기 의를 꺾는 싸움이야말로 다윗에게 나타난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베드로에게서도 나타나는 제일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반복하지만

마태복음 5장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있다. 라는 성경의 표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고,

스스로 의로운 행동을 만족스럽게 할 자가 없어서

목 말라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을 소원하는 신앙적인 모습이 아니고

자신의 파산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절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놀라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분명히 어딘가 열심히 부족했다. 어딘가 진심이 부족했다. 라고 생각해서

우리는 금식기도를 들어가거나, 산 기도를 들어가거나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거나 하는 열심과 진심을 더 치열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감동할 때까지요.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뭐였다고요?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을 내려놓으라고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는 생각을 버리시고 무엇을 하라고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도우심을 구하라고요.

 

 

◑베드로전서 1장으로 가봅시다. (중략)

 

▲마치는 말.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의 현실은, 기대와 달리 절망과 좌절입니다.

 

여러분들의 절망과 좌절은, 여러분의 신앙적 열심과 진지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행하는 일과

여러분의 욕심내는 것이, 초점이 달라서 생긴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가 왜 필요 했는지 기억하셔서

사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 제대로 지금 인도하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번듯한 신앙의 승리 한 번 못했다고 좌절하지 마시고

 

모든 실패 속에서 더 자기를 부수는, 더 자기를 부인하는,

마태복음 16장 24절 그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을 완성해나가는, 신자의 신앙이 진전이요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하는 올바른 이해로

여러분이 자랑할 것 없어 보이는 신앙의 현실이

사실은 하나님의 귀한 인도하심 속에 있고 인도함을 받아 자라나가고 있는 과정인 것을

꼭 이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