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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로 알리라

LNCK 2014. 6. 9. 08:14

◈열매로 알리라               눅6:43~46, 겔33:31~33                      14.03.23.설교녹취, 출처

 

※출처를 클릭해서, 직접 들어보세요.

 

◑서론

 

▶‘제복에 맞는 사람’이 되는 위험성

최근에 제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유명한 크리스천 정신의학자인

폴 트루니에가 쓴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입니다.

 

사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은 쉽게 풀어 쓴 것이고

책의 원 제목은 <등장인물과 실제 인격> 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많은 관계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되다 보면

마치 연극의 어떤 등장인물처럼

그 등장인물이 행해야 하는 어떤 역할과 기능 때문에 생겨나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어떤 인격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 자기 내면의 인격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이 등장인물로서 나타나는 자기 모습에 익숙해진 나머지

실제 자신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등장인물로서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하는 존재로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완전히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연결이 되기 때문이죠.

나폴레옹이 그런 말을 했죠. ‘자기가 입는 제복에 맞는 사람이 된다.’

 

자기가 어떤 역할이 되고 어떤 기능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실제 내면에 자기 인격에도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이것을 떼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등장인물로서의 인격, 그 모습에만 익숙하다면

실제 자기의 내면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요?

폴 트루니에 박사는 명확한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상담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과 대화가 일어나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실 때에는,

우리를 ‘등장인물’ 또는 ‘제복’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외모,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떤 직업을 가지는가,

심지어 내가 가족 간에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만나시고, 우리 실제 인격과 만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가 일어나야

우리는 실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살아있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등장인물로, 어떤 캐릭터로 살아가던지 간에

내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라고 그 책은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실 때 우리의 겉모습으로 만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등장인물’로 자꾸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절대로 만날 수 없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캐릭터로서, 어떤 등장인물로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모든 겉 사람에 속한, 껍데기 같은 것을 다 내려놓고

나의 위치, 나의 직업, 나의 기능, 나의 역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내 중심에 있는 실제 나의 인격, 실제 나의 모습, 실제 나의 내면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단어를, 사도 바울이 사용했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우리를 겉 사람에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킴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사람에 새로운 탄생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킴으로써

새로운 탄생을 잉태케 하심으로써,

그 생명이 점점 자라나서 속사람이 완전히 변화되고

결국 겉 사람까지 변화되는 것. 이것이 구원이라고 말 하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우리 안에 속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

거듭남이라고 말하죠.

속사람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으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구원은 점점 이루어가야 되는 것이고, 완성 되어가는 것이고, 아직 미완성이죠.

 

그 구원의 완성이란,

다시 말하면, 겉사람과 속사람이 점점 서로 일치해가는 과정과 같다.. 라고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나무와 열매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본질을 설명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죠.

 

나무가 있기 전에 씨앗이 있었죠.

그 씨앗이 심겨져서 그것이 자라나서 나중에 열매를 맺는 그 과정이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가 받는 구원은, 우리 안에 속사람에 새로운 영적인 생명이 심겨지고

그 생명이 점점 나무처럼 자라나서, 결국 열매를 맺어서

우리의 겉 사람까지 변화 되는, 그러한 과정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죠.

 

★관련글/ 포도나무와 열매에 대한 오해 http://blog.daum.net/rfcdrfcd/15972669

 

우리가 신앙생활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목록을 주셔서

그 목록을 가지고 지켜가는.. 즉 딱딱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은 못 하는.. 그러한 것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겉 사람’이 충만한 그러한 종교적인 생활일 뿐입니다.

그런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것은 본질적 신앙생활이 아니죠.

 

나무와 열매의 관계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생명의 관계이고 자연스러운 결과입니까.

나무로부터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열매를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부터 자연스럽게 열매가 나타나지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To do가 아니라

To be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의 존재 being 으로부터, 행위 doing 이 나오는 것이죠.

우리의 내면의 실제 인격으로부터

우리가 등장인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데요..

 

그런데 때로는 이것이 거꾸로 되는 것이죠.

실제로 내 내면에는 참된 영적인 생명이 없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고,

그냥 등장인물, 겉모습으로서

교회에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만.. 대충 눈치 봐서 구분하는..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죠.

 

▶참된 신앙은, 씨앗이 심겨졌을 때에는 아무런 즉각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죠.

그러나 땅 속에 씨앗이 심겨졌을 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속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을 때

즉각적인 겉 사람의 변화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습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속사람으로부터 점점 자라나서 나무가 자라나듯이

점점/ 꾸준히/ 서서히 자라나서

우리의 속사람이 완전히 변화 되고, 그 다음에는 겉 사람까지 변화되는 것.

그래서 나무로부터 열매가 맺어지는 이런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우리 신앙생활은 너무 자연스럽고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되어지는 그러한 모습, 결과라는 것이지요.

 

‘이웃사랑’을 예로 들면

이웃사랑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이웃사랑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속 본질이 변화/성숙되었으니까요.

 

▶그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이 “열매”라는 단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당위성으로만 강조하다보면

신앙의 본질을 율법적으로 또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열매는 맺어지는 것입니다.

열매라는 단어의 가장 정확한 설명은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죠.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은 자라게 되어있고 자랐다면

그 생명에 합당한 열매는.. 저절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열매의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드라마의 등장인물처럼, 여러 가지 가면을 가지고

 

내가 가정과 일터와 직장과 사회에 일하는 것에

또 하나의 등장인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거나 교회 직분을 감당한다면,

어쩌면 그건 근본적으로

자기가 ‘진정 거듭나지 않았다’는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본질적인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날 수 없는 그 하나님,

겉 사람이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만 지키는.. 그런 종교생활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의 속사람부터 시작된 영적인 생명,

그 거듭난 생명이 점점 더 자라나서

우리 속사람과 겉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나무에서 열매가 나타나는 그런 변화,

그것이 참된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도, 아마 진정 거듭난 사람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예로 들어서 설명한 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을 너무 잘 설명해주는 말씀이죠.

 

눅6:43~45절의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

그 열매를 보면,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으니

열매를 보고, 어떤 나무인지 분별하라는 거예요.

 

내 안에 이런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지 못한다면

나의 겉 사람이 변화되고 있지 않다면.. ‘못된 나무’, ‘거듭나지 못한 나무’인 것이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마땅히 나타나야 될 열매가 있죠.

씨앗이 심겨지고 적당한 환경이 주어지면 나무가 자라나서

이제 열매를 기대해야 할 때인데

만약에 열매가 없다, 혹은 다른 열매가 나왔다면

그것은 말 할 필요도 없이, 그 생명이 없거나, 아니면 다른 나무라는 거예요.

 

열매를 보고 나무의 본질을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언어, 행실, 우리의 모습이라는 열매.

우리 겉 사람에게서 나타는 열매가

우리 속사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라는 것이죠.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는 봉사도, 어떤 역할로 그치게 되면

그것은 등장인물로서 한 것 밖에 안 돼요.

 

내가 교회 생활 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 돼.

등장인물로서, 하나의 캐릭터로서 봉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직분도 받고, 어떤 역할도 하지만

다 역할일 뿐이지, 등장인물일 뿐이지

실제 내면에서 일어나는 열매로서 나타나는 봉사이냐/ 아니냐.

그것을 우리가 늘 끊임없이 점검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나는 어떤 나무인가?’

내 안에 영적인 생명이 심겨져서 그것이 자라나서 나타나는 열매인가.

그것으로 드려지는 봉사인가.

 

아니면 하나의 캐릭터로서, 어떤 등장인물로의 역할로서 내가 할 뿐인가.

라는 거예요.

 

우리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등장인물로, 어떤 캐릭터로,

역할로 만나는 신앙생활에는

절대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열매는 좋은 나무/변화된 나무에서 자연스레 맺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역할로 생각하지 말고

열매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갈5:22~23절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할 율법은 없습니다.’

 

그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했나요?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말씀인데

더 중요한 말씀이에요. 뭐냐 하면 “이런 것들을 금지할 율법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만약 ‘이상한 나라’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 사랑하면 벌금 500만 원.. 이상한 나라죠.

서로 용서하면 벌금 300만 원.. 정말 이상한 나라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오래 참으면.. 벌금 100만 원.

이런 것들을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셨어요.

그 속사람이 자라서, 이제 그 겉사람까지 변화된 사람이 되었어요.

그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어졌어요.

성령 벌금을 낼지언정, 그 열매를 버릴 수 없다.. 라는 것이죠.

금지를 못 시키는 것입니다. 금지할 법이 없어요.

 

아무리 열매를 못 맺도록 억압해도, 감옥에 보낸다 해도,반드시 그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직분자요,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그 어떤 법과 상관없이,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어있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님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려고 할 때에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다.. 라고 했어요. 성령의 열매죠.

 

스데반 집사님이 이런 의식을 했을까요?

‘지금 내 순교 순간이 나중에 사도행전에 기록 되겠지.

누가가 나의 행적을 기록하겠지.’

 

그래서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얼굴과 포즈를 환하게 웃는 것처럼

‘내가 이 무서운 공포의 순간에서도 나는 인상을 좋게 만들어야 돼.’ 생각하며,

돌로 치려는 사람 앞에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연기를 했을까요?

그런 일은 없죠. 자연스런 열매입니다.

 

참아야 된다.. 이것이 아니라

참아진 것이고, 절제가 된 것이고, 용서가 되어진 거예요.

 

왜요, 그의 속사람 안에 임하신 성령님이

그 속사람을 변화 시키시고, 겉사람에게 까지 흘러넘친 거예요.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어떤 상황, 문화, 어떠한 체계 속에 들어가도, 성령의 열매는 자연스레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눅6:46절 이하에서

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쁜 나무의 하나의 케이스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주여, 주여’ 라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주님으로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면 행해야 되는 실천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눅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절대 주이신 그 분이 말씀하신 것이, 왜 실천/열매로 나타나지 않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죠.

 

▶1. 첫 번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그 고백이

실제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제가 말씀드린 등장인물로서 그냥 한 거예요.

 

‘아, 교회 가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해야 하지.

그래놓고 집에 가서는 아닐 것이야. 또 사회에 가서는 아닐 수도 있어.

교회에서는 내가 교회에 앉아 있는 등장인물로서 주님이라고 인정해 드려야지.’

라고 하는 고백이라면, 전혀 그 열매는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겉 사람이 한 고백이지 이 속 사람, 실제 내면에 인격이 한 고백이 아니죠.

절대 열매는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되풀이 해 온 고백입니다.

그래서 제가 폴 트루니에라는 사람이 쓴 <등장인물과 실제 인격>이라는 책이

저에게 아주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에스겔 시대에서 주전 600년에도 이런 문제들이 그래도 나타난 것을

이미 에스겔 선지자가 폭로했습니다.

 

에스겔서 33:31~33절입니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쉽게 말하면 ‘그들은 백성이 구경거리를 보러 나오는 것처럼 네게 나와서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 네 말을 듣지만

그들은 그것들을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입으로는 사랑을 행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탐욕을 추구하고 있다.

너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사랑이 나오고 아름다운 노래, 사랑의 노래가 있지만

그 실제 내면의 인격에는 전혀 그것이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고백을 정말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을 우리가 되돌아 봐야 해요.

 

우리 어느 성도님 가운데 봉헌 찬송 가운데에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받으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그 찬송에 대해서 저에 대해서 그것을 바꾸어달라고 요청하는 분이 계셨어요.

왜냐하면 거짓말 하게 된다.. 라는 거예요.

 

실제로는 다 드리지도 않으면서, 다 드릴 마음도 없으면서,

입술로는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거짓말 하는 것이냐는 거예요.

 

그 분은, 자기의 실제 인물과 등장인물이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고민을 하는 거예요.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찬송가 다 바꾸어야 하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도

‘내게 있는 일부만을 주께 드리네.’로 바꾸어야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어떤 등장인물로서의 인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고백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서로 연결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도, C. S. 루이스가 말하기를

원수를 사랑하는 법의 첫 번째는, 원수를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다.

그게 어떤 등장인물로서 자기가 그렇게 행동 하다보면

마음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라는 것이죠. 그런 면도 있습니다.

 

효도도 하는 척 하다 보면, 실제로 효도하게 되고요.

아내/남편도, 사랑하는 척 하다 보면, 실제로 사랑하게 됩니다.

 

▶2. 그러면 두 번째는 뭔가. 진실한 고백은 맞아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온 고백은 맞아요.

 

그런데 겉 사람의 영향에 막혀서

등장인물로서 했던 모든 우리의 역할에 막혀서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뭡니까.

 

예수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셨어요. 가지치기를 해야 된다.

요15: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자르실 것이요,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손질하신다.’

 

그런 가지를 쳐서 열매 맺는 수액이 흐르도록 가지를 쳐야만

우리 속사람이 시작 된 영적인 나무가 자라나서

겉 사람까지 변화 시키는 열매가 맺어진다.. 라는 거예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가지치기’에요. 영적 가지치기.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나의 가지를 쳐 내는 거예요. 겉 사람을 끊어내는 것이죠.

 

속사람이 우리의 피부가 상했을 때, 그 상한 피부가 있는데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그 피부가 재생되어서, 그 딱지가 떨어지는 것이죠.

 

우리 안에 겉 사람이 날마다 끊어져 나가면

우리의 속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 생명력이 이겨나가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고백을 했죠. 나의 겉 사람은 후퇴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는 그런 영적인 생명력이 살아나는 인생,

 

그러므로 열매를 맺는 우리가 주여, 주여, 하는 고백 그대로

우리의 겉 사람에도 나타나는 우리의 속사람에게만 담겨있는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겉 사람까지도 우리의 몸이 복종 되어지는 그런 역사,

그런 역사가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죠.

 

우리의 속사람이 겉 사람을 변화 시키지 못하면

겉 사람이 속사람을 변화시키게 된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