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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한 설교

LNCK 2014. 6. 7. 21:39

◈무뚝뚝한 설교             삼상4:1-11                     2014.01.26.설교스크랩, 편집

                                                                                       *비슷한 설교 보기 : 반역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한 에스겔처럼

◑예수님의 설교는, 상냥했을까요? 무뚝뚝했을까요?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성경말씀은 의외로 친절하지 않습니다.

무뚝뚝합니다. 영어로 하면 blunt - 성경은 ‘무뚝뚝한 진실’이에요.

 

예스는 예스, 노는 노.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의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로 하라 그 이외의 것은 악을 좇아 나느니라’

 

성경 어디에서, 죽을 사람에게 살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망할 자에게 흥하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잘 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습관인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을 찾아가서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졌습니다.

‘네가 낫지 못하고 죽으리라’ 어쩜 그렇게 냉정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어요.

 

또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찾아가서 한마디 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너희는 멸망한다.’ 얼마나 직설적이고 불친절한 말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여운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죽는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안 죽었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15년을 더해 주셨습니다.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 말씀을 들었지만.. 멸망 안 했습니다.

니느웨가 임금으로부터 짐승까지 금식하고 회개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사해주셨습니다.

 

그 여운 속에도 하나님의 진실이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보장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람이 결코 보장해줄 수 없는,

사람의 친절함이나, 사람의 선한 의도로 이를 수 없는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진실을 찾아야 됩니다.

 

친절함과 선한 의도로,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데 (생기는데)

그 말씀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진리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친절함이나 따뜻한 말을 통하여,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원리를 잘 간파했습니다.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놀라운 말입니다. 권하는 친절하고도 부드러운 말이 없어도 됩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을 변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변증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진리를 변증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사장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변증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의 지혜를 동원해서, 친절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실과 하나님을 사람들 앞에 변증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불필요한 일이요, 오지랖이 넓은 것입니다.

 

▲‘잔인한 진실, 친절한 거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령 누가 불치병을 선고받았을 때, 가족들이 그 사실을 차마 알릴수가 없기 때문에

병이 곧 나을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 친절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잠시나마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요.

 

그러나 그 말에 ‘성령의 권위’가 있느냐/없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성령의 권위가 있다면

무뚝뚝한 설교,

잔인한 진실일지라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과가 더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진리를 변호하십니다.

 

▲진리를 정직하고/무뚝뚝하게 전달할 때.. 망할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진리를 변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을 변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방법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기업체나 사설단체처럼 PR 업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기업체들은 기업 이미지를 홍보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랑해요 LG’라든가, ‘철이 사람을 만듭니다. POSCO’ 라든가

기업체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서

사람들이 그들의 제품을 구매하게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서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을 홍보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인기를 관리해서,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설교보다 ‘홍보 영상 제작’에 더 열을 올리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설교보다 ‘교회 홍보 소식 10분 비디오 클립’이 더 교회성장에 보탬이 된다고 여깁니다만,

‘홍보’로.. 숫자가 모여들지는 모르나.. ‘전도/구령’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도와 구령은

무뚝뚝한 설교, 딱딱한 진리의 선포..를 통해서 되어집니다.

상냥한 말과, 유창한 언변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기 전의 한 에피소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영토문제로 블레셋과 자주 전쟁을 했습니다.

 

요즘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영토문제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자주 전쟁을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습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가자.

언약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징표이기 때문에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가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실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내서, 정말로 언약궤를 메고 전쟁에 나갔어요.

 

그 소식을 블레셋이 듣고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심히 싸웠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대패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적나라한 진실을 성경이 가감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을 자기가 주제넘게 행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시키시지도 않은 일을

자기 생각대로 주제넘게 행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 언약궤는 어떻게 하느냐?

언약궤를 빼앗겼는데 그건 마치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 같지 아니하냐?

 

언약궤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 대하여 염려하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지

성도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요즘에 교회가 염려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마는

교회를 사랑해야 될 필요는 있지만, 교회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어요.

하나님이 스스로, 진리를/교회를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이 반석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교회가 아니고 목사의 교회도 아니고, 교단의 교회도 아니고

예수님의 교회요, 예수님이 친히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역할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믿음만 지키면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당신이 세우시고 지키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람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기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미지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 무뚝뚝한 설교를 무뚝뚝하게 선포하시고.. 결과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아 갔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삼상5:3절을 보면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블레셋 우상의 이름입니다.)

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밤에 다곤의 신전에 언약궤를 갖다 놨더니

아침에 보니까 다곤이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세워놨는데 그 다음 절에 보니까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든지 변증/보호하십니다.

 

무뚝뚝한 설교를 한다고 해서, 그 결과를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를 스스로 변증/보호하십니다.

진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날 선 검이 되어 승리합니다.

 

이제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아 오기는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될 차례에요.

 

다곤이 그 앞에 넘어지고 머리와 손목이 깨져서 몸뚱이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 독종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몸에 독종(독한 종기)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건 여호와의 궤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노하셨다,

그래서 결국은 그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는데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속건제물을 가득 담아서 돌려보냈다는 얘기입니다.

언약궤를 찾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블레셋이 스스로 돌려보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진리를) 변증할 수도 없고, 또 변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을 변증하십니다.

 

 세상 문화가 아무리 바뀌어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고 믿을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것을 분명히 믿어야 됩니다.

 

살기 좋아지고 과학이 발달한다고,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은 더 속이 허망하고, 더 고독하고,

인생이 줄 수 없는 해답을 찾기 때문에

 

세상 문화가 아무리 바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른 염려시키지 않았어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네게 당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그것만을 명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성경말씀은 '친절한 거짓'도 아니고 '잔인한 진실'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다보니까, 그런 논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을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 다름에서 하나님의 저작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건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 다름에서 하나님의 저작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무뚝뚝한 설교! 진리의 액면 그대로 선포!

이것은 잔인한 진리도 아니요, 친절한 거짓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진리에요. 진리의 속성은 미끄럽거나 상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합니다. 할렐루야! 

 

 

▲반대하는 사람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떨어져 나갑니다.(펀글)

어떤 사람이 미얀마에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님을 방문했을 때

가슴까지 차오르는 제법 깊은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그런 여정이 있었는데

 

그 강물을 건너서 나와 보니까, 자기 온 몸에 거머리가 다 붙어있다. 라는 거예요.

그가 깜짝 놀라서 거머리를 떼려고 발버둥을 치니까

 

선교사님이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살점이 같이 떨어집니다. 큰일 납니다.”

붙어있는 거머리를 떼어내려고 하지 말고

집에 가서 얼른 이 발삼 향이 나는 아주 향기로운 물에 몸을 가만히 담그고 있으면

거머리가 스스로 그 물었던 것을 푼다는 거예요.

 

우리 인생의 때로 불필요한 판단, 선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악하게 판단하고 그렇게 괴롭히는 판단이 나를 사로잡을 때에는

그 판단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내 몸을 깊이 담그고 있으면

언젠가 모든 그 거머리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지혜로운 선교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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