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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의 끊기 - 바울

LNCK 2014. 7. 7. 09:09

◈자기 의 끊기 - 바울              고후1:8~9                아래 설교 녹취

 

 

 

 

◑서론 및 전체 주제

 

▲지난 이 시간에 우리는 베드로를 생각했고, 그 전 시간은 다윗을 생각했습니다.

뭐에 관한 내용이냐 하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들 중에 조금 더 나은 사람이

그의 신앙심을 발휘하여 영웅이 된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사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시며,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대로 이끌어 가사

 

우리 보잘 것 없는 죄인 된 인생이 은혜를 입어

말하자면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되는가.. 성경이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는 시각에서 다윗과 베드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던졌던 그 질문을 기억하십시오.

‘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그 감격과 각오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현실이 순조롭지 못 한가, 기대만큼 못한가요?’ ←문제 제기

 

그 이유는, (그 답은)

신앙의 승리라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쓸모 있고 영웅적인 어떤 일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즉 내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길이,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세 번 부인하는 일을 말하자면 방치하셔서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신앙에 들어오도록.. 그렇게 인도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같은 증거를, 오늘 이 시간에는, 바울에게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때, 바울의 생애를

자기 신앙에 가장 좋은 모델로, 누구나 다 부러워하고, 그와 같은 인생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생을 우리가 그렇게 높이 평가 하는 것은

그 결과를 보고, 바울을 부러워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바울을 어떻게 쓰셨는가를 제대로 성경대로 추적해보면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즉 바울의 자기 능력, 자기 헌신, 자기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즉 바울이 유능하고, 남 달리 잘나서가 아니라, ‘자기 의’가 아니라,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공로요, 주님의 은혜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없애려고, 바울을 죽이시는 하나님

 

지금 오늘 본문으로 택한 고후1:8~9절을 보면

바울이 아시아에서 너무나 심한 고난을 받아서

‘이제는 죽었다’ 라는 지경까지 갔었다는 경험을 쓰고 있습니다.

 

고후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왜 바울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느끼는, 극심한 고통이 있었느냐?

그 답은 9절에 보는바와 같습니다.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한 마디로 자기 의/자기 능력/자기 열심/자기 선의.. 이런 걸 없애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이,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의지나/ 신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근거하여

이런 일들이 시작이 되었고, 결과 되고 있다는 것을

 

일을 하는 바울 자신에게나,

그로 인하여 증거를 받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분명히 말하려고 이렇게 했다. 사형선고를 느낄 정도였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고린도후서 11장에 사도 바울이 자기가 당한 고난들을 열거하는데

그 내용들이 여기에 함축 되어 표현되었습니다.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본문 고후1:8~9절의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법상 사형할 것이 아니고, 다만 중형에 처해서

사형하지 않고 가장 중한 벌을 줄 때, 처하는 매가 39대입니다.

 

그것을 다섯 번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매 주 맞지는 않았겠죠.

맞고 회복하고, 다시 맞고, 그렇게 3년에 한 번씩 맞았어도 15년은 걸렸을 테고

그 사이에 돌로도 한 번 맞아서 죽은 줄 알아서, 내다 버려졌던 일도 있고

태장(큰 매)도 맞고, 파선도 당하고, 강도도 당하고.. 뭐 여러 번 고난을 당해서

 

바울의 전 생애는 말하자면 고난의 연속이었는데.. 왜 그랬느냐..

하나님께서 이 큰 일꾼을 왜 이런 식으로 대접했느냐?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여러분은 납득 되셔야 합니다.

바울의 자기 의/자기 공로/자기 자랑을.. 수시로 부수시는 겁니다.

 

바울은,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꾼을 택해서 쓰시려면

처음부터 좋은 집에 태어나고, 좋은 교육 받고, 심성이 훌륭하고, 여러 재능이 있고,

어려서부터 벌써 하는 일이 남다르고, 이렇게 우리가 기대를 하지만..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께 우리의 자격/공로/성실함으로 바칠만한 자는 없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윗을 공부할 때 확인했습니다.

다윗이 시편 51편에 기록한대로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의미는, 우리의 정성, 우리의 가진 것을 받지 않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것이 왜 복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질, 하나님께 열납 될 만한 것을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요,

그게 복을 받은 증거라고요. 

 

왜요? 하나님을 만난 자만이 이것을 깨닫거든요.

그래서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하나님만 소원하고 하나님께 있는 것만을 원하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시키는 작업을, 하나님은 예외 없이,

그의 종들에게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모든 신자)에게까지 요구합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공통된, 예외 없는 신앙의 현실은

자기의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라는 사실을 확인 받는 일이기 때문에

바울처럼 실패와 좌절로 경험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으로 근거를 삼는 날까지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의욕이나 자랑이나 능력이 쓸모없다는 것을 확인 시키는 작업을 하셔서

 

실제로 신자들의 현실 경험은

‘하나님은 왜 나를 외면하시는가, 왜 내 정성은 받아주시지 않는가’ 라는

절망으로 경험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예수 믿고 잘된 사람도 “소수” 있습니다.

 

물론 주변에 열심히 하나님께 헌신하고, 보상을 받고, 응답을 받는 분들이

간혹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소수입니다.

 

그런 잘 풀린 분들은.. 두드러져 나오고,

그렇게 못한 사람들은.. 입 다물고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헌신해서 보상을 받았다’는 논리는, 일반적이 아니라, 사실 소수에게만 해당됩니다.

 

다수는, 사실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아서

조용히 속상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는 열심히 믿었는데도 안 돼.’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못 하거든요.

 

▲그래서 소수의 형통한 이들은.

다 하나님이 온천하만물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며

복을 주시는 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한 분들.

그렇게 쓰임 받는 이들이 일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시는가를 확인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이런 풍부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이들을 잘 풀리는 자로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입니다.

 

결국 하나님만이 우리를 승리케 하시며, 복 되게 하시며,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어 이런 복을 받았다. 이런 승리가 있었다.’ 라는 간증이

우리 주변에 소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다수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의지하던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 안에서 하나님만 붙들고 매달리도록 하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만 우리의 소원이 있다.

하나님 안에만 우리의 답이 있다.

 

시편의 표현대로 하면

'여호와는 나의 상급이시오, 방패, 구원의 뿌리, 나의 복, 나의 자랑이시오.' 그러는데

 

현실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도 보상을 못 받고 있지 않습니까. 왜요?

하나님은 철저히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고 계십니다.

 

 

◑묵사발된 바울을, 들어서 쓰십니다.

 

그래서 다시 이 설교의 주인공, 바울로 돌아와서

바울은, 그 시작을, 영웅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선 그는 첫 열 두 사도에 끼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스데반을 죽이죠.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죠. 그러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벌써 결정적인 흠을 하나 안고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는 이 기독교 신앙에, 큰 공헌을 하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

가장 악질적인 적군이었던 과거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게다가 성경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외모도 신통하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말 구사 능력, 구변도 별로 없었고

또 신체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서, 간질이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몸에 있다.’ 라고 스스로 말했고

‘사탄의 가시가 내 몸에 있다.’ 라고 고백했을 정도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잘 복음 전하고 게거품 품고 버둥거리면 누가 은혜를 받겠습니까.

 

바울은, 자기는 구원 못하는가,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주제에 무슨 영생을 운운하는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공격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것들이 왜 있어야 하는가를, 바울이 이해하고 있고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고린도후서 12:7~10에서 이렇게 연결하고 있죠.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 본문을 잘못 읽으면, 감동적으로 읽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이해를 하세요. ‘하나님은 쓸 만한 사람은 쓰는 적이 없다.’

그것이 성경의 고백입니다. 왜 그렇다고요?

 

‘기독교의 신앙이, 구원의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죄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으로부터 출발했다.’

이것이 바로 이 설교의 주제이자,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진리입니다.

 

 

◑적용

 

그러니까 지금 한국 교회를, (제가 감히 한국 교회 운운해서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 시대의 한국 교회 형편을 보시면

우리는 한국 경제의 부흥과 함께, 교회의 양적 부흥을 함께 경험을 해서

소위 ‘성공시대’가 되었죠. 능력과 성공이 어디나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그저 새겨들어주시고, 의미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목사 열 분을 마음속에 생각해보십시오.

그 열 분 중에, 학벌이 좋은 분들이 있습니까?

그 열 분의 설교를 들어보시고, 참 뛰어난 지성을 가졌다.

그렇게 느끼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 분들 중에 외모가 괜찮은 분들이 있습니까?

 

그것은 다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약하고, 자기 자랑이 없는 자를, 들어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 가상의 열 분이,

성경에 당신들의 내용이 예화로 등장한다는 것을 위로로 삼으시고

이 비유를 오해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자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는 일(성공)에, 우리가, 그 이유와 근거와 자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며 복음을 전하는데 쓰는 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어떤 자들을 쓴다고요? - 못난 자들을 쓴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런 큰 목회를 성공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 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관심이 되어서

목회 성공 세미나가 당시에 아주 유행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큰 교회를 하시는 목회자를 불러서 어떻게 해서 이렇게 목회를 성공했습니까.

솔직하게 답은 이게 정답입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정답인데

다들 결과가 있으니까 뭔가 이유를 자꾸 만들어냅니다.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것은 원인이 자기한테 없다는 말이거든요.

기도가 뭐예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빌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기도가 원인(자기 공로)이 되고 있어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못 나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저는 또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또 괜찮은 선택과 분별을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렇게 자기 공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했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 이 길로 빠지면 곤란합니다.

 

▲지휘관은 따로 있고

저는 그 손에 붙잡힌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이게 정당한 답이죠.

 

그런데도 자꾸 막대기한테 와서 ‘너 어떻게 했더니 하나님이 너를 쓰시냐?’

그러니까 막대기가 대답하는 말이

‘나는 매일 일찍 새벽기도 가서 하나님에게 보챘다.’

이따위 답이 된 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을 쓰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 구원을 얻었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라는 원인과 이유를 자기 안에서 확인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내가 이 복음을 알게 되었는가. 어쩌다가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가.’

그 은혜에 놀라야 되는 것이죠.

그 우리 찬송가에도 있는 ‘자비로운 주 하나님. 어메이징 그레이스.’

놀라운 은혜입니다.

정말 기이하고 정말 측량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왜요? 우리에게 이유가 없거든요.

인간적으로 볼 때는, 훨씬 더 도덕성이 있고 신실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훨씬 못한 사람에게 구원이 먼저 오거든요.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리고 그 중에서도, 더 못난 사람을 보통 목사로 씁니다.

그러니까 목사들이 재는 것은, 원님 태운 당나귀라서 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나귀가 나이가 들면 가끔 돌아요.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믿는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면

펄쩍 뛰는 사람이 있는데. 이유가 많죠. 너는 성격이 안 된다. 너무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 될 때 저의 아버님이 반대를 극심하게 하셨는데,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너는 나를 닮아서 안 된다.’ 저희 아버님 성격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런데 저희 아버님이, 제가 이렇게 잘된 것을 못 보시고, 일찍 소천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 공로(방금 말한 '내가 잘 된 것')로 나가면 안 된다니까요. 하하하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기 공로로 빠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어떻게 썼나 보십시오.

부를 때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해서 부르시더니

사역하는 내내 그때마다 또 잘난 척 할까봐

패고 죽이려 들고

그것도 안 되어서, 아예 가시를 하나 박아놓았다니까요.

 

그게 너무 자신의 문제라기보다, 복음에 방해가 될까봐

이 사탄의 가시를 빼달라고 했더니 뭐라 그랬다고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왜요?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할 말이 없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어느 날 보니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받아놓고, 우리는 거꾸로 정리를 하죠.

 

어떻게? 무슨 이유가 있어서 내가 구원을 받았을까?

-자기에게 잘된 점을 찾기 시작하고,

-심지어 자기 조상에게서 잘된 점을 찾습니다.

 

그러다가는, 사도바울과 같은 심한 고난을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랬다는 뜻은 아니고요)

 

▲모든 성도들에게, 왜 이게 심각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는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되었더라.’

요즘 무슨 세미나 가 보십시오. 다 그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내 것/내 공로/내 성실/내 충성/내 자랑’으로 가지 말고..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성 밖에 없습니다.

헛된 것이오, 썩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채우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에 걸맞는 완성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자꾸 어떻게 하라고 해요? 다 버리라는 것이죠.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이죠. 자기를 포기하라는 것이죠.

 

오직 하나님께 매어 달려있으라는 것이죠.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비유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은 바울서신의 전반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내용에서 2장으로 넘어가면 이렇습니다.

 

고전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 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가장 걱정했던 것이 뭐라고요?

바울이 철학자로써 인간이 만든 고급한 사상을 전하는 것으로 저들이 이해할까봐

제일 걱정을 했다는 거예요.

 

복음을 받는 자들이

자신들의 지성으로 이해한 복음이 될까봐.. 가장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체의 생애 전체를 보고, 외모도 그렇고, 조건도 그렇고

바울이 이해한 복음을 전할 때의 자세에 있어서, 철저히 무엇이 배제되고 있습니까?

 

인간의 가능성, 인간이 가지는 어떤 원인이나 근거도 배제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이 확인하셔야 됩니다.

 

▲디모데전서 1:12절 이하에, 사도 바울이 자신을 설명하는 일종의 간증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시면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성경이 바울을 통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가 나옵니다.

 

딤전1:12~16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바울을 일반적으로 믿음의 영웅으로,

하나님의 종들 중에 가장 능력 있는 자로

이렇게 자꾸 인간적인 평가로 덧칠을 합니다.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내가 사도가 된 이유는 뭐냐

내가 더 쓸모가 있고 유능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장 복음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적합했느냐?

전적으로 은혜를 나타내는데 가장 적합했다.’ 이것입니다. 왜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 나 같은 것도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사도까지 되었다.

그렇다면 나보다 조금 덜한 죄인들은 오죽하겠느냐.

그것 때문에 나는 쓰임 받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자꾸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고, 바울의 위대성을 논합니다.  

바울도 그렇게 이해 하고 있지 않은데

우리는 사람의 조건을 너무 크게 만든다는 말이죠.

 

▲물론 여러분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전부라면, 그러면 인간적 열심은 아무 필요도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자가 가지는 어떤 특권을 가지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고

주시는 복과 함께 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서

정말 신앙이 좋아집니다.

(열심은) 쓰임을 받는 자가 가지게 되는 결과이지, 조건은 아닙니다.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내가 왜 종이 되었는지 아느냐.

내가 너희보다 나아서가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왜 바울, 바울 (영웅시 하고) 그러세요?

 

바울이 되려고 하지 말고

바울을 세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는 은혜,

하나님이 아버지로 찾아오시는, 그 복을 놓치시지 말라고요.

 

바울에게 감사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며, 지키시며, 복 주시는 일에 신실하시다.'

이것을 발견하며, 이런 귀한 일에 쓰임 받는 자는 참 복 되다. 라고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지

바울은 얼마나 잘나서 이 일에 쓰임을 받았을까.. 이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생각의 귀착점은 이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자책하는 것은 참 좋지만

내가 부족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덜 하다.. 이건 틀린 생각입니다.

 

그것은 바울을 영웅시하는 것과 똑같이

저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실만한 이유가 있어서 더 주었고

나는 그렇지 못해서 못 받았다.. 라는 식의 생각을

신앙에서는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반응이나 우리의 됨됨이로 하나님이 사랑을 많이 주고 적게 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의 간증은 끝이 여기로 갑니다.

17절.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왜 갑자기 하나님 찬양으로 가죠?

당연하죠.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우리에게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이

우리에게 이 놀라운 구원과 복이 오게 된 이유였기 때문에

모든 찬송을 하나님께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영웅시 하지 않으며

우리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도 차별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을 본보기(샘플)로 삼아 지금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죠.

 

 

.................................. 더 읽으실 분 .................................

 

 

◑그래서 빌립보서 4장의 이 결론이 이해가 됩니다.

 

빌4:10~13절 이하의 말씀 봅시다. 자주 암송하고 많이들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13절의 구절을 많은 성도들이 좋아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의욕과 담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지금으로 말하면 그리스에 있고, 로마 감옥은 이탈리아에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그 먼 길을 찾아 와서,

감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보고 위로했습니다.

 

바울이 고맙다고 하면서 4:11절에서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요.

 

너희가 나를 찾아와서 고마운데, 내 궁핍한 것을 도와줘서 고마운 것이 아니라고 해요.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해서 고맙다고 한다.

너희가 이 사랑을 배운 것이 내가 고맙다.

 

그러면서 ‘나는 어떠한 형편에도 자족하기를 배운자다.’ 라고 이야기해서

비천에 처하기도 하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즉 배고프며 배부름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워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그럽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어떤 난관이 생기던지 극복할 수 있다.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

무슨 꼴이든 당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가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감옥에 매었으나 하나님 말씀에는 매이지 않았느니라.’

 

바울은 오늘 내내 설명 드린 바와 같이, 가장 나쁜 조건으로 출발하고,

그의 생애 절반에 걸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함으로써

그가 전하는 일들이,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을 드러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감옥에 갇혀서, 전도활동을 할 수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 바울이 잡혀서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양쪽이 다 열심히 전도를 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서

‘잘 되었다. 나는 기뻐한다’ 라는 간증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하는 이야기는 그가 하는 일은

세상이 편을 든다고, 형통하다고 도움이 되지 않고

세상이 신앙 문제를 도울 수 없기 때문에

방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이것을 ‘내가 모든 일에 자족하기를 배웠다.’ 라는 간증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분 보시면 풍족하다고 해서 여러분이 도움 받지 않고

세상적으로 고난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서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마땅하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을 붙잡고 가야하며 여러분들이 실패와 좌절로 느끼는 순간이

결단코 여러분에게 손해를 보게 되는 환경이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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