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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4

종과 사도.. 라는 정체성

LNCK 2014. 10. 1. 15:00

◈종과 사도.. 라는 정체성                롬1:1                 설교 녹취, 편집

 

 

롬1:1절 ‘예수 그리스도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기 1절에 보면, "종"이면서 "사도"라고

사도바울은, 자기 정체성을 이중적으로 설명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1:1

 

▲자 오늘 우리가 먼저 처음으로 1절에서 바울이 자기 자신을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그랬어요.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서두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그 소개가 매우 독특합니다.

 

어쩌면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이기 보다는

그가 진짜로 소개하려고 하는 분이 따로 있는 듯 한 소개에요.

 

여러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을 할 때,

이 바울 시대의 종이라는 단어는 한 마디로 노예를 말하는 것이에요.

 

노예란 그 당시에 ‘흔히 가축과 노예의 차이는 노예는 말 할 줄 아는 가축이다’

그렇게 말할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짐승 취급을 했던 시대에요.

거기에는 인격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냥 짐승취급 당하는,

돈으로 사는, 죽여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노예라고 하는 단어에서 주는 경멸함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자기 자신에게 노예라는 단어를 가져다가 썼어요. 희한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뿐만 아니라 서신서에, 그의 편지 곳곳에서

이 종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있어요.

 

여러분 무엇보다 그냥 ‘종’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 더 충격적입니다.

그냥 종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굉장히 충격적인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 무슨 의미인가 하면,

 

여러분, 오늘 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당시 문화 속에서 예수가 아닙니다.

존경심이나 명예가, 같은 이름이지만, 현저히 달랐어요.

 

그 당시에 ‘예수’라는 이 이름은

십자가의, 그 저주의 죽음을 당한, 유대의 반란의 죄와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그냥 십자가 형틀에 사형을 당한 유대의 한 청년의 이름이 예수란 말이에요.

 

여러분 며칠 전에 신문에 올랐던 사형수의 이름에, 내 이름을 붙여서

내가 그의 사형수의 종입니다.. 라고 한다면 미친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의 아들이다. 누구의 친구다. 누구의 동창이다.’

뭐 앞에 누구 이름을 붙일 때는, 뭔가 내게 이득이 되는,

뭔가 내게 도움이 될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내 이름을 거기에 붙이잖아요.

그래서 사돈의 팔촌이라도 끌고 와서, ‘내가 그 명사의 누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바울의 소개는 다른 거예요.

사형수 그것도 유대인, 한 청년의 이름의 뒤에

 

그것도 아주 경멸을 당하는 짐승과 같이 취급을 받는 ‘노예’라는 표현을

자기가 가져다가 쓴다는 것은 아주 극적인 표현이에요.

 

▲여러분 이것은 바울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평소에 어떻게 소개하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직함을 소개하는 것을 좋아하죠. 특별히 장字를 좋아하잖아요.

한국 사람은 장字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회장, 명예 회장. 대표 회장. 직전 회장. 증경 회장.. 복잡해요.

 

그런데 바울은, 지금 자기를 소개하는데 너무 간단해요. 기가 막혀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여러분 여기에서 바울의 삶이 보이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바울의 속 뜻은 무엇입니까?

 

‘나는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다!’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늘 만나는 모습들이 어떤 것입니까.

다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막 열심히 하는데.. 결국에 보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매일 충성한다고 하는데.. 결국에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

내가 얼마나 드러날 것인가..

내가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찬사를 받을 것인가..

다 그 싸움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바울에게서 그런 것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어요.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지 않아요.

 

그의 이름은 어떻게 보면 숨겨져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자신이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한 바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 바울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내세울 것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에요.

우리가 흔히 나에게서 내세울 것이 없을 때, 무엇인가를 수식하려고 하는데요,

 

사람은, 자기가 없으니까 반대로 있는 체를 합니다.

부자인체 하는 사람은, 진짜 부자보다는, 사실 가난하니까 부자인체 합니다.

 

자신을 자꾸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 자존감이 스스로 낮은 것입니다.

자기 자존감이 스스로 높은 사람은, 자기를 높이지 않고, 그냥 잠잠히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은 자신의 인생 자체가 상당히 무언가 있는 사람이에요.

빌립보서 3장에, 그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으로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고,

그 시대에 학문을 뭐 섭렵했고, 최고의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분 뼈대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랑거리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말은, 밑지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종이라고 하는 말은 완전히 종속된 존재를 의미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성공을 이야기 할 때,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자신의 존재를 인정을 받을 때, 우리는 성공이라고 말해요.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은 전혀 달라요. 우리의 인생은 우리 스스로 빛날 수 없어요.

그리스도의 종이란,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에 있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냈을 때, 그 인생은 가장 빛이 나는 인생이에요.

 

▲여러분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은 열심히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잖아요.

 

회사를 위해서 충성은 하지만, 목적 자체가 회사가 아니고

사실은 자기 자신의 인생의 성공이잖아요.

자신의 유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더 이상 그 충성은 의미가 없어지죠.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충분히 부합되지 않는 상황에 닥치면

끝이 나는 관계가 우리 세상에서 흔히 만나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말 속에, 무슨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 자체가 목적이에요.

그 이상 다른 목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종’이라는 말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의 종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내 삶에 목적이 되는가, 아니면 수단이 되는가에 따라

신앙과 삶의 향방이 결정이 됩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다가 경력이 쌓여지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출발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자신의 이름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될 때,

그것을 우리는 신앙의 변질이라고 말하고,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용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자신이 편지에,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을 잘 들여다보아야

이 로마서를 통하여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서

자신의 삶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한 분에게만 집중하고 있게 만드는가요?

 

여러분 이것은 복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결단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에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 그의 눈이 뜬 것이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은 없다는 것을

바울은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에만

우리의 삶은 빛이 난다..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광채이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 너무 몰두할 필요가 없어요.

누가 나를 어떻게 보아줄 것인가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관심은, 어떤 직함이나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종이 될 때,

그리스도에게 있는 그 광채가 우리의 삶에 발휘 되는..

그 인생이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바울은, 바울의 대화는, 그의 간증이나 모든 대화 속에는

언제나 그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있어요.

 

노예, 종은.. 자기 존재가 주인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모든 대화의 주제는 그리스도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종다운 삶을 살았어요.

 

▲여러분 우리 인생에 마지막 남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 것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보다 더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는 없어요.

그리스도를 높여드리는 만큼만, 우리의 삶은 그 빛으로 오는 광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 인생에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그는 첫 번째 가장 첫 단어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영광스럽게 자신의 이름 앞에 그리스도를 붙이고, 종 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우리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다. 자 여러분 이것이 사도바울의 정체성이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 프란시스 셰펴박사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그렇게 살아지고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종)에 대한 구약적 배경을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야 되요.

 

신명기 15:12절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 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한다.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함으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늘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몰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렇게 하리라.’ 아멘.

 

여러분 이게 유명한 신명기 법의 노예에 대한 이해입니다. 정의입니다.

자, 내용은 간단해요. 집에 돈으로 주고 산 노예가 있었어요.

이 노예를 6년 동안 부려먹습니다. 그리고 7년 째, 안식년 되는 해

이 노예를 반드시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 노예가 주인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집도 사랑하게 되었어요.

‘자 이제 7년째 해 너 자유다. 네 가고 싶은 대로 가라.’ 풀어주었어요.

 

그런데 이 노예가 와서 주인님 제가 6년 동안 이 집에 종으로 있으면서

‘주인님의 인품과 인격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도 너무 좋습니다.

저 떠나지 않겠습니다. 자유, 제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히 주인님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자원하는 노예가 있어요.

 

그러면 그 노예를 데려다가 귀를 문에다가 대고, 송곳으로 뚫어요.

송곳으로 귀를 뚫어서 귀에 구멍이 난 노예는, 자원한 노예에요.

사도 바울이 바로 그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는 (자원한)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헌신을 하고 하나님 앞에 섬기는 모든 행동은

억지나 율법이 아니라 율법은 끝났어요.

6년 기간, 율법이 정한 기간이 끝나서 완성이 되었어요.

이 노예는 이제 사랑에 메인 노예에요. 자유를 얻었어요.

 

그런데 스스로 주인을 사랑해서 사랑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그 개념을 담은 이야기를 여기에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로마서 1장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저를 따라서 해보세요.

가슴 한 가운데다가 자기 손을 대고 저를 따라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 고백은 굉장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자기 정의를 새롭게 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자 이제 손을 내리셔도 됩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이 고백을 기초로 사람을 대하고

인생을 판단하고 삶을 살아야 됩니다. 중요한 고백이죠.

‘나는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그런데 삯 때문에 일하는 노예가 아니고, 율법 때문에 억지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랑의 노예입니다. 이 고백이에요.  

그래서 이 그림을 어디서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 어머니들 같아요.

제 와이프가 아이들 키우는 것 보면 사랑의 노예 같아요.

꼭 사는 것이 사랑의 노예 같아요.

 

엄마는 히죽 히죽 웃으면서 좋아라. 그 일을 해요.

왜 그게 가능할까요? 사랑의 노예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노예처럼 자녀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서 그 일을 하죠.

그게 사랑의 노예에요.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해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렇게 섬겨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이 글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다. 그리스도의 행복한 노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그렇게 선교하고 그렇게 봉사하고 그렇게 헌신하기를 축복합니다.

 

 

 

◑2.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1:1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르심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 앞에 소명 의식이 넘쳐흐르고 있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울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그는 이야기 하고 있어요.

마치 하나님의 부르심을 떼어내어서,

자신이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바울을 보면 그는 열정의 사나이에요. 생명을 건 투혼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투지들. 날마다 솟아오르는 열정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인가요?

 

복음에 사로잡혔던 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소명의식에서 나왔어요.

여러분 이 소명의식이 생기는 것은 대단한 거예요.

그냥 일하는 사람과, 소명의식이 생겨서 일하는 사람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에요.

 

저도 오늘 설교를 하지만 이것은 소명의식에서 하는 것이거든요.

설교자로서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이 소명의식.

그냥 온 몸이 너덜너덜해서 다 죽어가더라도,

이 소명의식이 내 안에 살아 있으면, 사역에 거부를 못하는 거예요.

 

선이 아주 굵고 선명한 인생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 하면,

확실한 소명감입니다. 부르심이에요.

소명이 뚜렷할수록 선명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초점이 잘 맞춰진 렌즈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은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이 없으면, 우리는 아직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시작해도 언제 그만둘지 몰라요. 우리의 삶은 소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부르심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누군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누구예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살아야할 이유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살아야할 이유가 나에게서 나왔다면, 그것은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나에게서 나온 것은 선한 것이 없고,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나중에 어떻게 퇴보 될지 아무도 몰라요.

 

내가 살아야 할 이유,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이유와 모든 근원이,

그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되는 거예요.

 

오늘 바울이 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기가 막힌 단어에요.

 

여러분 오늘 인생에 내가 못 먹고 굶어 죽어가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면 그 인생은 아무도 막을 자가 없어요.

기가 막힌 인생을 사는 거예요.

 

천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정확한 부르심이 없으면

헷갈리는 밤 길을 걷는 것이에요.

 

여러분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이 있어요.

그것이 "부르심" 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일인가, 아닌가.

뭐 열심히 산다. 성실하게 산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바쁘냐는 거예요.

누가 그 일을 하라고 했느냐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100명, 500명이 모여서 의기투합해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정확하지 않으면, 그것은 안 되는 거예요.

 

사업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하라고 한 일이냐, 내가 원해서 한 일이냐,

다른 거예요.

 

여러분 내가 나를 임명하면 어떻게 해요. 그 인생은 허접한 인생인 거예요.

하나님이 임명하신 인생이 참 인생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또 어느 날 하기 싫으면 그만 두는 거예요.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임명한 것입니다.

 

삶의 동기부여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 내적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자기 감정에 따라서 굴곡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신 정확한 사람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 부르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워지기 전에는, 자기 인생을 포기할 수 없어요.

 

▲바울은 지금 하나님이 자기를 ‘사도로 부르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라는 뜻은 뭡니까.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써의 삶의 근거가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부르심이라는 말은, 내 삶의 근거가 나에게서 있지 않아요.

하나님에게서 있어요.

 

여러분 이 근거 위에 세워진 인생은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거는 것이죠.

 

여러분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은 간단해요. 복잡하지 않아요.

부르신 자에게 집중하고 그 부르신 자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그 분에 의해서 결정이 나요. 부르신 분이 책임지는 거예요.

 

▲오늘 날 우리가 소명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이유는

부르신 분이 반드시 있다는 거예요.

부르신 분이 없는데, 소명이 어디 있어요?

 

부르신 분이 반드시 있는데, 그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이 분명한 삶의 근거가

바울의 자기의 전 생애를 터닝하게 만들었고

자기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서 바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구원 받은 자는,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명자입니다.

내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않던 우리는 소명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라고 한 일을 하고 있느냐..

열심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백성들은 구원을 받는 순간부터, 내 안에 질문이 떠오르게 되어있어요.

구원이 분명하게 일어난 사람은, 아주 틀림없이 우리에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는데

‘구원 받은 나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아주 간단한 질문이에요.

 

내가 구원을 받았는데, 내가 전과 똑같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구원 받은 자는 반드시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에 부르심이 연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의 사건이 분명하면, 사실 부르심도 소명도 같이 오는 거예요.

구원 사건이 분명하게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부르심의 경험을 가질 수가 없어요.

 

구원 사건과, 소명은, 사실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구원 사건이 희미하기 때문에, 소명의식도 없는 거예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해답이 없기 때문에

삶은 딜레마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죠. 이 문제로부터 풀려나야

내 삶의 모든 것들이 이제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는 물론 사도도 아니고, 사도적 계승자도 아니에요.

그런데 사도들의 신앙과 그 고백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고백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누구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어디를 향해서. 세상 속으로.

 

이것을 우리는 요셉을 통해서 제일 정확하게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17세에 이상한 꿈을 연거푸 두 번 꾸죠.

그 꿈 때문에, 안 그래도 관계가 안 좋았던 형제들하고, 관계가 더욱 악화됩니다.

 

이 형들이 요셉을 잡으려고 하죠.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심부름으로 오는 거예요.

해서 그를 옷을 벗기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 때 한 형제가 말리죠.

‘죽일 것 까지 있나.’

마침 애굽 상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은전 20냥에 팔아버려요.

 

이때부터 요셉은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경험하게 되요.

남에 나라에 팔려가고 종살이를 하고 감옥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뒤 바뀌어서 국무총리까지 앉게 되요.

 

그런데 이 요셉에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국무총리 된 자리가 아닙니다.

어느 날 온 땅에 기근이 임하고 가나안에서부터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왔는데

동생 앞에 머리를 조아린 것입니다. 깜짝 놀랐죠.

그리고 자기를 커밍아웃하고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형님들,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야 내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기근의 때를 위해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이다.’

 

거기서 요셉이 내가 그제야

이 하나님의 전체 그림이 보여지지 않을 때는, 운명이 기구해서, 팔자가 사나워서

이런 일을 겪나 했어요.

 

그래서 ‘팔렸다’고 이야기 했어요.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서.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눈이 열어지면서

요셉이 내가 팔자가 기구하고 운명이 사나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곳에 “보내셨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전체 그림이 열어집니다. 여기가 요셉의 인생의 절정이에요.

 

여러분. 그 가정에 신랑 잘못 만나서 시집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입니다. 믿습니까?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 그 직장 밖에 안 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정확하게 보내신 자리입니다.

 

여기에 눈이 열어지지 않으면, 사도의 신앙적 계승자가 될 수 없어요.

우리는 보냄을 받는 자에요. 이것은 동의하던 안 하던 믿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그 학교, 내가 저 친구보다 성적이 10점 모자라서 온 학교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내신 학교에요.

여기에 눈이 열어지고 하나님의 전체 그림이 열어져야 해요.

 

당장 이 주일이 끝나고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 될 때, 일터를 향해서 나아갈 때,

거기는 내 밥벌이하러 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시는 자리여야 합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면 내가 모든 가치와 일의 판단이 달라져요. 새로워져요.

그리스도의 행복한 노예로써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바울이 가지고 있던 이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되기를 기꺼이 원했던,

그리스도의 이름만 붙여도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시대 속에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기꺼이 표현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에서 일어난 것입니까?

 

그것은 억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바울의 위대한 사건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났죠.

 

대낮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찾아오셔서 그를 한 순간에 넘어뜨리죠.

그 복음의 빛 앞에 눈이 멀고 그의 인생이 그 때 뒤집어집니다.

 

도무지 예수를 믿을 수 없었던, 예수를 핍박하는 편에 섰던, 율법의 의로 가득했던,

바리새인들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한 순간에 예수의 종으로, 예수의 전사로 생명을 거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가 경험했던 그 복음의 그 경의로움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우리에게도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오늘 이 로마서 가운데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여러분들은 바쁘게 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을 보면 모두 무언가에 메어서 살고 있습니다.

고삐가 메여 있어요. 꼼짝도 못하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여러분. 고삐 메인 삶이라는 말은, 내 삶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에요.

 

먹고 사는 일에 꼼짝없이, 돈 때문에 메어 살고 있다면, 그것이 내 주인인 것이죠.

거기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이죠.

 

그것이 아니라고 말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는 내 삶을 쥐고 있는 고삐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것을 노예적 삶이라고 말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던 우리의 삶을 가두고 속박하고 노예적 삶을 살아가도록

오늘 이 시대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무엇들이 있어요.

 

복음은 오늘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 복음의 능력은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고삐들,

 

그리스도가 아닌 것들로 내 삶을 끌고 가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케 하고

온전히 한 분만 바라보는 노예가 되어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참된 자유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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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도바울이 선교를 하고 목회를 하면서 제일 시비를 받았던 그의 신분이

‘네가 정말 사도냐. 네가 언제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냐.

언제 주님께 가르침을 받았냐?’

 

그래서 바울도 자기의 약점을 알기 때문에

‘나는 만삭되진 못한 자 같은 데서 났다.’ 그랬어요. 겸손한 표현이죠.

 

그런데 정확히 사도 바울은 사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 했죠.

어디에서 했을까요. 다메섹 도상에서 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자를 예수를 그리스도라 알지 못할 때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에서 저 시리아 북쪽 다마스크스 언덕까지 쫓아가다가

그 언덕에서 앞을 볼 수 없는 초자연적인 빛이 내리 쬐면서, 그는 눈을 멀게 합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죠.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이렇게 핍박하느냐.’

 

이 때 사울이 물어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부활의 주님이 사울에게 나타납니다.

 

그제야 바울의 신앙 인식 세계 속에 자기가 그렇게 경멸하고 핍박하던 예수가

자기 선조들이 수 천 년 동안 예언해오던 오시리라 약속한 그 메시아인 것이

관통하는 경험을 하게 되요.

 

드디어 바울의 신앙 인식 속에 예수와 그리스도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놀랍죠.

여기에서 주님에게 직접 가르침이 이루어지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너는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랬어요.

 

누가 보낸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보낸 것입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강렬하게 이 세 가지 조건을

마치 우리 수업의 인텐시브 코스처럼 다메섹 언덕에서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사도로 인정을 받고 거기서 보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다메섹 언덕에서 이 세 가지 조건을 정확하게 맞아지면서

그는 ‘만삭되지 못한 자 같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요.

 

▲자 그런데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신약에 절반에 가까운 여러 가지 책을 써요.

그런데 어떤 책에는 자기가 사도인 것을 정확하게 밝힙니다.

그런데 어떤 책에는 안 써요. 여기에는 일정한 룰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빌립보서 같은 책에는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일부러 밝히지 않아요.

그냥 그리스도의 종 사울이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골로새서나 고린도전서나 이런 책들은, 자기를 정확히 사도라고 밝힙니다.

어떤 룰이 적용될까요?

 

사도 권에 대한 시비가 없었던 곳에서는, 밝히지를 않습니다.

시비를 하지 않는데, 일부러 밝힐 필요가 없죠.

 

그런데 늘 이 사도 권에 대한 시비가 일어났던 데는

항상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있던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도 알고

사도 바울이 어떤 경로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지 알기 때문에

항상 사도권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전하고 가르치는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정확하게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사도라는 것을

일부러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람이 원래 그렇잖아요.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죠.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사도 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훼파 될까봐.. 그것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자기의 사도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 지역에는 이미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개종을 해서

예수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사도로 밝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