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떡과 술 맡은 자인가? 창40:5-23 김성수 목사님 창세기 89강
◑십자가와 부활을 예표하는 떡과 포도주 맡은 관원장 -이 단락 편집자 글-
▶오늘 아침에 성경을 듣다가
문득 왜 하필 ‘떡 맡은 관원장’인가, ‘술 맡은 관원장’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내각 중에는,
군대장관도 있을 것이고, 짐승 맡은 자, 강을 관리하는 자, 재정 맡은 자 등
그 내각들이 수두룩 했는데, 왜 하필이면 ‘떡과 포도주’를 상징하는
‘떡 맡은 자’와 ‘술 맡은 자’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무슨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떡 맡은 관원장'에서 '떡'은, 예수님의 몸.. 십자가에서 깨어지신 몸을 상징하고요,
그는 결국, 나무에 달려 죽게 됩니다.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창50:19
‘술 맡은 관원장’에서, ‘술’을 → ‘포도주’로 연결시키는 것은, 비약이 아닙니다.
창40:9~11절에 그가 꾼 꿈은, 포도밭에 들어가서, 포도열매를 따서, 포도주를 만들어서
바로왕에게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창40장에 나오는 떡/술 맡은 관원장은
예수님의 떡과 잔을 예표하며
즉 예수님이 3일 동안 무덤에서 죽으시고(떡 맡은 관원장의 처형)
또 3일후에 부활하시는 모습을(술 맡은 관원장의 복직) 예표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당시 정황에서, 요셉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는 것이라 봅니다.
▶왜 하필 ‘사흘’입니까?
술 맡은 관원장도.. ‘세 가지 three branches’ 꿈을 꾸었는데,
요셉은 ‘사흘 안에’ 복직될 것을 해석하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떡 맡은 관원장도.. ‘떡 세 광주리’ 꿈을 꾸었는데,
요셉은 ‘사흘 안에’ 죽을 것을 해석했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열 흘이 될 수도 있는 것을,
왜 하필, 사흘이었을까요?
즉 예수님의 죽음(사흘 동안 무덤에 장사되심)과
예수님의 부활(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창세기 40장 본문이 예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누구를 위한 꿈이요, 해석입니까?
일차적으로, 요셉을 위한 꿈이요, 해석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는 것으로 봅니다.
▶요셉은, 아시다시피,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런 그가, 꿈을 해석한지 3년 만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필 3년이네요.
만 이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하숫가에 섰는데.. 창41:1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이후부터,
바로의 꿈 해석으로, 총리가 되기까지는
‘3년째 되던 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흘만에 부활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작은 예수인 우리 각자의 삶의 패턴인 것이지요.
성도인 우리 각자도, 사흘 동안 죽었다가, 사흘 후에 부활합니다.
현재 부활을 사는 우리들이, 그저 쉽게 자동적으로 그 혜택을 누리는 게 아니라
반드시 "사흘"(상징적 기간) 동안 무덤과 죽음을 경험한 후에, 자기 자아가 완전히 죽고 나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요셉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패턴에 대해서는
아래 설교가 자세히, 길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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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왜 이리도 힘이 드는가? 김성수 목사님 창세기 강해 89강, 출처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는 사건들 속에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들의 뜻을 묵사발 내면서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시는, 거대한 하나님의 성공 스토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하나님의 성공은 이미 결정이 되어 있는 것이고
왜 인간의 도모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성공이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가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과정이
역사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내어놓는 행복을 향한 도모와 역사의 해결책들을 기각하시면서
오직 당신의 뜻만이 ‘선’임을 확인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정된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확정된 미래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지혜를 동원하여 미래를 개척하겠다고 열심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그것을 깨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하나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순종의 상태’입니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고,
그 존재에게 완전한 의존을 하게 될 때, 그 둘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순종의 상태에서는, 쌍방이 계획하고 목적하는 것과,
도달하려는 목적지가 같아야합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목적지인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선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절대 하위의 인간들이 자기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들의 행복에 도달하려 했고, 자신들의 최종 목적지를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그 모든 피조물들을 다 쓸어버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반란을 허락하셨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꿈과 비전과 야망을 내어놓으며
스스로가 고안하고 만들어 낸 행복의 고지에 도달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스스로의 행복을 찾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고안하고, 추구하는 그 어떤 것들도
결코 인간들을 만족스럽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하겠다고 하는 인간의 시도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출산해 내는 열매라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전쟁과 억지와
모순과 허점투성이로 점철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 중에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은
신인류가 구별되어 존재합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상속해 주시기로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서 격발되는,
인간의 탐욕에 근거한 뜻과 야망과 비전들을 하나하나 꺾어 버리시면서
당신의 뜻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그들을 이끌어 들이십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뜻이 꺾이는 과정이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는 항상 고난이라는 것이 숙명처럼 따라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의 고난은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이 올 때 ‘기뻐하라’고까지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의 개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고난의 목적은 한마디로 연단이며,
완성의 자리로 향하는 필연적 과정이라 했습니다.
그 연단의 목적지가 바로 우리의 뜻이 제대로, 완전하게 꺾여 지는 지점인 것입니다.
죄인들의 허황한 뜻이 꺾이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이 참 가치이며, 참 행복의 길인지를 분별하게 하는 데에 쓰이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고난을, 성도의 삶에 유익한 것으로 정의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보세요.
그가 꿈을 꾼 후에, 그도 그 꿈에 대해 은근한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의 기대를 사정없이 무너뜨려 버리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오롯이 드러난 것이
요셉의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고난을 통하여 요셉이 갖고 있는
꿈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비워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비워진 그릇 속에 당신의 꿈을 채우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총리 등극이, 그의 꿈의 실현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요셉의 총리 등극은 요셉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애굽에 보내어
430년간 종살이를 하게 만들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쓰여진 것이 요셉의 총리 자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애굽 행에 요셉을 쓰시기 위해 애굽의 왕조까지 바꾸셨습니다.
원래 애굽의 왕조는 함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시대에 셈족인 힉소스 왕조가 애굽을 공격하여
애굽 왕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셈족이었던 요셉이
거부감 없이 총리가 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 위에서 성도가 처해지게 되는 빈부귀천, 크고 작음, 높고 낮음, 예쁘고 추함 등은
요셉의 총리 직분이 단순한 하나님 사역의 도구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잠시 쓰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으로 그들의 최종가치가 결정 지워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모든 것들을 다 비워내고, 하나님의 순전한 그릇이 되어가는 것이
성도의 본분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라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그 가난을 비워내야 하는 자리에,
어떤 사람은 부함이라는 상황에 교만하지 않고, 그 부함을 비워내는 자리에,
어떤 사람은 높은 지위를 비워내는 자리에,
어떤 사람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직업 속에서,
그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비워내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지는 하나입니다.
그 모든 상황과 처지와 사건과 정황들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묶이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난 부자야, 난 예뻐, 난 못 생겼어.’
이러한 것들로 자기 정체성을 정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부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사셔야 하는 여러분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천국에는 빈부귀천이나, 높고 낮음, 예쁘고 추함의 구별이 없습니다.
물론 천국에도 여러 종류의 직업이 있을 것이고,
각기 다른 모양의 부활의 육체를 입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 세상에서처럼 인간들이 합의하고 결정한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이 없으며,
천하고 귀한 것의 구분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처한 직업, 상황, 처지 등에 묶이지 않고
그러한 천국의 평등을 훈련하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나 힘도
우리 자신의 가치 평가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비움의 과정 속에 고난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그릇을 완전히 비워내게 되면
그 안에 비로소 하나님의 풍성함이 원 없이 채워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풍성하게 부음 받아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전형적인 모델이
이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순종을 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밝히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요셉의 삶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의 작은 모형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은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지어져 가는 모습을 한 면으로 담고 있는 반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내는 자,
즉 천국 백성의 삶의 표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또 한 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무죄한 자가,
자기를 해하려는 자들의 죄를 오히려 뒤집어쓰고 수난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 예수님이 오시기
2천년 전에 미리 작은 그림으로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요셉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삶은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낸 삶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비전이 깡그리 비워지고,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 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셉의 삶은
우리 성도들의 현실 이해에 아주 큰 도움을 주는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하여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39장 서두에 보면 (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여호바 에트-요셉) ..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의 고난이 시작되는 장 맨 앞에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어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트 אֶת’라는 전치사는 ‘동행’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창세기 5장의 하나님과 에녹의 동행입니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에녹 할락 에트-하엘로힘)
여기에서 동행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에트’입니다. 에녹만 하나님과 동행을 했나요?
(창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니 (에트-하엘로힘)
여기서도 역시 ‘에트’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렇게 아담,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바울 등등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삶이 모두 어떠했습니까?
자신들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는 삶이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의 삶은
하나같이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섣불리 추측하기를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하시는 삶 속에는
배신도, 모함도, 감옥행도, 미움 받음도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요셉의 삶을 보십시오. 어디 하나 요셉 뜻대로 된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
‘저는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입니다’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요셉이 무조건 꾹 참고만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요셉의 억울함을 곧바로 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시간표 안에서, 그가 겪어야 할 것은 다 겪게 놔두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시간표에 자신을 맞추는 자가 되어지는 것,
그게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시지요?
(눅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꿈과 원과 희망과 기대를 오히려 빼앗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복인 것입니다.
반면에 그러한 것들을 기필코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고
안감 힘을 쓰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찾아서 읽었던 시편105:17절 이하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105:17-19)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셔서 종으로 팔리게 하시고,
그 발이 착고에 상하게 하셨으며, 그의 영혼이 쇠꼬챙이에 뚫리는 것과 같은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앞서 간 사람의 수난과 고통으로 그를 팔아버린 자들이
사망에서 건져지게 되었습니다.
이 요셉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앞서 보내셨다’라는 어구입니다.
누군가가 앞서 보내졌다는 것은,
그 뒤로 그 길을 따라 가야 할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앞서 보내짐이라는 어구가 담고 있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셉의 삶, 예수의 삶이,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뒤를 따라 가야하는 모든 성도들의 삶 또한
요셉의 삶과 예수의 삶을 닮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죄가 아닌,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죄의 무서움과 집요함과 추악함을 깨닫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구족을 멸해도 시원치 않을 나의 원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그러한 수난의 삶을 통해, 세상의 죄가 폭로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은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삶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뜻과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자기부인이라는 이미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자동적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게 예수의 삶이었고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꿈 이야기로 잠깐 시선을 돌려보지요. 요셉이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에서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납니다.
요나단의 탈굼(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해 놓은 것)에 보면
그들이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갇히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몽해 주지요?
그런데 그 해몽이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만에 복직을 하게 될 것이고
떡 맡은 관원장은 목이 달려 죽습니다.
신통하게 꿈에서 계시된 내용이 그대로 현실에서 이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음 시간에 공부하게 될 바로의 꿈 또한
현실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지요?
성경이 이렇게 어떤 이들의 꿈들이 현실에서 성취가 되는 장면들을 기록해 놓은 것은,
이 역사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나 떡 맡은 관원장, 그리고 바로가 꿈을 꾸어서
그 일들이 성취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들이,
그들의 꿈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그 분이 목적하고 계신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러한 꿈의 현실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현재에 꿈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미래에 성취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정해진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꿈들과 그 꿈들의 성취는 하나님의 뜻,
다른 말로 하나님의 꿈이 인간의 꿈속에 계시의 형식으로 보여진 것뿐이지
인간들이 꿈을 갖고 비전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이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꿈의 성취의 현장인 것이지
인간의 꿈이 성취되어져 가는 장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꿈과 목표 앞에서 겸허하게
자기의 욕심과 꿈을 버리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와 기대와 욕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채워가며 살아갑니다.
...........................<쉬어가는 곳>................................
◑대체욕망
▶본문을 보시면 요셉의 대척점에 보디발과 보디발의 아내가 서 있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 이하를 보시면 보디발이 요셉의 형통함을 보고
집안의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보디발이 요셉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보디발에게 필요한 것이 요셉에게 있었기 때문에
보디발이 요셉에게 집안의 전권을 맡긴 것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요셉이 보디발 집안의 전권을 맡은 것이 아니라
보디발이 요셉의 전부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필요한 자를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해, 그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집안 전체의 일을 맡긴 것은, 그러한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게 라캉의 이론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아형성을 할 때, 나에게는 없는 어떤 것을 가진 타인,
즉 나 이외의 다른 인격체가 가진 것으로 내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는데
그것을 대체욕망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최진실이라는 배우가 자살을 했을 때
한국의 많은 주부들이 한동안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 자기와는 일면식도 없는 여배우가 자살을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을까요?
왜냐하면 20년 이상을 TV 드라마나 광고 등을 통해 보아왔던 그녀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자아형성에 개입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 그리고 자기가 도달하지 못하는 것, 윤리나 도덕, 양심,
사회법에 의해 감히 저질러 버리지 못하는 것 등을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을 통해 대리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사유화 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슴 속에는 너무나 큰 공허의 구멍이 뚫려 있거든요.
최진실이 그들의 대체욕망이었고, 그가 죽자, 그래서 패닉에 빠졌던 것이지요.
(대체)욕망의 출구가 사라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사람들은 람보라는 영웅을 보면서
그 람보의 힘을 자신의 자아 속에 깊숙이 담아 놓습니다.
구준표의 무례함과 당당함과 부유함을 보면서 도달할 수 없는 그의 삶을 동경합니다.
그 동경이 자아 속 한켠에 자리를 잡습니다.
여배우들의 미모와 화려한 삶을 보면서
아줌마들의 자아 속에 그 배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자아라는 것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영웅주의는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비스타, 스포츠 스타, 정치적 스타,
온통 스타들을 만들어 놓고
자기의 욕망을 거기에 투사하여, 대리만족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긴 하는데,
자기 안에 없는 것을 자기 마음속에 품고, 그것을 사유화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바로 죄를 지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의 결핍이 가져온 열매입니다.
결핍에 의해 나에게 부족한 것들을 다른 대체욕망으로 채워서
나의 자아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중에 가장 큰 대체 욕망적 자아의 확장이 자식입니다.
부모라는 자아가 형성이 되는 데에 있어서, 5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자식입니다.
왜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그렇게 화가 나는지 아세요?
내 팔 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뇌성마비라고 하지요?
나는 밥숟가락을 내 입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나의 뇌에서 시키는 명령을 손이 듣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때 얼마나 화가 나요?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대체 욕망 적 자아의 한 부분인 내 자식이
내 말을 안 들을 때,
마치 내 팔 다리가 내 말을 안 들을 때와 똑같은 분노와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 생명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그렇게
무엇으로든 자신의 속을 채워야 합니다. 그것은 죄인들의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녀 사랑’이라고 위장을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집착인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상대방의 자원으로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내가 좋은 것을 소유한 자에 대해 호감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든 것입니다.
나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 보셨어요?
짝 사랑이라는 것도 그리움과 애틋함과 가능성이라는 욕망을
채워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나에게 전혀 무익하고 무관한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거기에서 건져내셔서
원수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보세요. 그렇게 요셉을 자기 사유화하려 했던 보디발에게 요셉은 충성을 다합니다.
그게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피를 뽑아 배를 채우려 하는 상대방에게
기꺼이 목을 대주는 십자가의 자리로 끌려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나만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안간힘을 쓰고 버텨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고집이 우리를 그리로 끌고 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이해가 안 되는, 불공평해 보이는 일들이 속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이 세상이 지금 이렇게나마 유지가 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이 땅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축복의 내용 중에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지요?
천하 만민은 성도가 하나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그날까지
한시적으로 집행유예의 기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집행유예의 기간 동안에 그들이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에서 부자도 되고,
힘 있는 사람도 되고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성취되는 그 날 형의 집행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때문에 햇빛을 주시는 것이고, 성도 때문에 공기를 주시는 것이며,
성도 때문에 추수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사26: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아니하는도다
그게 바로 보디발의 모습 속에 확연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요셉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는 요셉을 실컷 이용만 하다가 감옥에 쳐 넣어 버립니다.
그 후로 성경에서 보디발이라는 이름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보디발 말고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나서
요셉의 주인 역할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했다고 합니다.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아페, 토아르, 아페’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쓰이고 있는데
그 단어들이 전부 ‘아름답고 현명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다’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참으로 잘 생기고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대체욕망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보디발에게는 충성과 싹싹함과 명철함이라는 대체욕망을 제공함으로 해서
보디발의 종이 되었고,
보디발의 아내에게는 아름다움과 현명함과 젊음이라는 대체욕망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거절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이 하나님의 믿는 자로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그 유혹을 뿌리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보디발의 아내도 상당한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 최고 상위 권력자의 아내입니다.
권력과 미모를 가진 여자가 자기를 매일 유혹했습니다.
나쁜 마음 한 번 먹고 그 여자의 말을 들어주면 팔자가 바뀔 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요셉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그런 대체욕망의 대상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 어떤 일이 먼저 있었습니까?
밧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밧세바의 목욕 장면을 본 다윗의 마음에 다른 것을 소유해서라도
나의 행복과 쾌락을 만족스럽게 채워내겠다는 죄 성이 꿈틀 거린 것입니다.
성경이 요셉의 용모가 아름답고 준수하고 아담했다는 것을
일부러 기록을 해 놓은 것은, 보디발의 아내가 특별히 음탕한 여인이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죄 성이, 자기가 좋은 것을 대체욕망으로 끌어들여
스스로 만족하고 싶어 하고, 행복 하고 싶어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연히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꽃미남 요셉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의 복으로
그 속이 채워진 성도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권세가 있고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대체욕망으로서 취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거절을 하는 사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를 안 짓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대체욕망 그 자리로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우리 행복의 전제라는 것을 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망 그 어떤 화려함과 아름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있는 자들임을,
요셉의 거절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대체욕망 그 자리, 이 세상의 망힘과 이 세상의 망할 아름다움과
이 세상의 망할 화려함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자리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완성의 자리에 있는 자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는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셉이, 그 때 완전한 성화의 자리에 도달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요셉과 요셉의 행동을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요셉에게 거절을 당하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안에 채우려 했던 대체욕망의 자리를
무엇으로든 메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그 요셉의 빈자리를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우려 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대체해서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뜻대로 안 된 그 대상을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됩니다.
저것이 내 것이 안 된 이유는
바로 저것이 악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폭로시켜야 나의 의로움이 증명이 됩니다.
교제를 하던 연인들이 헤어진 후에 서로 상대방에 대해 험담을 하고,
모함을 하고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건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에 대한 공허함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워내려고 하는 아주 악한 발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혼조차도 대체욕망의 충족이라는 차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나의 빈 곳을 상대방의 자원으로 채워서 내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
사람들은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부들이 결혼 후에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욕망의 대상이 되어 달라고 요구를 하니
그 생활이 행복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 되어서
내 수족처럼 움직여 주었으면 하는데
그 상대방도 나에게 그런 것을 요구 하거든요. 그러니까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알고 자기부인의 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가정에서
참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가 좀비처럼 피를 빨아서 자기의 행복을 채우려 하는 자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지 못하면
거기에는 항상 충돌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숙한 성도가 그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결핍 속에 빠져있는 세상은
반드시 다른 대체욕망으로 자아를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만 행복해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자들이고
하늘의 풍요로 자신들의 행복의 근거로 삼아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을 빼앗겨 주는 것입니다.
명예를 빼앗겨 주고, 인기를 빼앗겨 주고, 재물을 빼앗겨 줍니다.
당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물어뜯는 자들을 같이 물어뜯음으로 해서
나의 의로움을 챙기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요셉은 변명하지 않고 감옥으로 향했습니다.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고 석방을 약속 받았지만
그 술 맡은 관원장이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는데 아닥사스다 왕에게 부탁을 하여
유대인 포로들에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도록 만들었음을 기억해 보세요.
그만큼 권력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가서 요셉을 한 순간만이라도 기억을 했다면
언제든지 요셉을 풀어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까맣게 요셉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후로도 이년간을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감옥에서 기다립니다.
▶여기서 잠깐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요셉을 잊었던 그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금 일깨워 주고, 그 요셉의 고통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는
어떤 게 제일 특효이겠습니까?
그가 잊어버리고 산 동안 요셉이 감옥에서 겪은 일을
똑같이 겪게 해주면 될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그렇게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분의 수고를
매 순간 기억하고 계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셉의 감옥살이,
즉 무죄한 자의 십자가의 수난을 자주 경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해? 왜 내가 이런 손해를 봐야해?
왜 내가 남의 일로 이렇게 수고를 하고 고통을 받아야해?’
이런 일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요?
무죄한 예수님이 바로 너 때문에 그렇게 고통 받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의 삶과 예수의 심정을 직접 경험하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예수와 그 분의 수난이 오롯이 새겨지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에, 하나님이 동행하심으로써, 요셉이 예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의 삶에 예수의 십자가의 삶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여,
심지어 대체욕망이라는 것까지 동원하여
우리 자신을 채워야만 겨우 겨우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만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을 때에는 우리의 꿈과 비전과 야망 때문에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꿈은 요셉을 통해 내려오는 어떠한 법칙에 의해
통제되고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본 우리는 압니다.
바로나 술 맡은 관원장, 떡 맡은 관원장, 심지어 요셉의 꿈까지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실현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꿈 앞에서 우리의 세상 적 꿈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자유롭게 끌려가십시오.
▶그렇지만 분별하시면서 끌려 가셔야 합니다.
우리를 끌고 가고 있는 것이 과연 내 꿈인지 하나님의 꿈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꿈, 즉 하나님의 계시가 명쾌하고 명료하게 계시가 되어 있는 성경을
잘 공부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꿈을 박살내며 당신의 목적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꿈은
성경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에 어긋나는 삶은 모두 내 꿈에 의해 끌려가는 삶입니다.
우리 열심히 하나님의 꿈에 의해 끌려가십시다.
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이렇게 힘이 들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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