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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면 구원인가

LNCK 2015. 4. 13. 08:42

믿기만 하면 구원인가?             롬6:22              출처보기

 

 

 

 

▲제가 지난 주중에 저희 교회에 등록하신지 얼마 안되는 한 성도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이분만의 고민이 아니라,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을 실제적으로 제가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오랜 고심 끝에 얼마전부터 주일 예배를 참석하고 있습니다.

   저도 몇년전부터 목사님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저는, 한국과 미국에서 이동이 많았습니다. 

   어떤 교회를 다녔어도 무언가 부족하고 확실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요,

 

   저는 예수님 영접하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정말로 진짜인가, 가짜인가?'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 나를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말씀에 비춰보면 '믿고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다가

   다른 말씀을 보면 아리까리하기도 하고..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분이 말하는 거 보면, 성경을 읽어본 분 같습니다. 아니면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거든요.

 

정말 우리가 신중하게 우리의 구원을 되돌아본다면, 이렇게 고민하는 게 정상입니다.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둘 중에 한 가진데,

진짜 그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거나 / 아예 관심이 없거나...

 

   왜냐면 예수님은 천국을 가르키시면서, 항상 구별하시는 것 같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등등.

 

   그 이유는 "진짜와 가짜가 있어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예수님만이 아시고, 마지막 날에 갈라진다는 점이, 저에게 물음을 던져주었습니다.

 

   더구나 마태복음 7장에는 그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와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는데

   어찌 우리를 모르느냐고 주님께 따지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고 하신 말씀이, 늘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저는, '선지자 노릇 한 적도 없고, 귀신을 쫓은 적도 없고, 능력을 행한 적도 없는데,

   이런 위대한 일을 행했던 사람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나 같은 보통 신자는 과연 어떠한가?

   혹시 내가 착각하고 신앙 생활하는 게 아닌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실제로 나는 구원 받지 못했으면서, 받았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훗날 주님 앞에서 비로소 아니었음을 깨닫는다면

   그 때는 기회가 없는데..'

 

   그래서 저는 상담도 많이 했어요.

   처음엔 잘 모르니까. 상담 받는 것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솔직히 쪽팔려서 교회에 물어보지도 못하고 벙어리 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 생활한 지 30년이 넘어간 집사이고, 교회학교 교사인데,

   아직도 구원에 확신이 없어서, '저 구원 받았나요, 안 받았나요?' 하는 질문을 할 수 없었지요.

 

   저 혼자 스스로 '나는 정말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구나, 어찌하여 계속 의심만 하는지..' 자책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늘 찜찜했는데, 이제야 그 문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정말로 지금까지의 교회는 칭의에 관한 강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에베소 2장에 '기록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에

   누구도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라는 구절만 들이대고

 

   그 다음 단계인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면서

   내 속에 내재된, 마귀의 성품 죄의 속성하고 싸우는 부분은

   그 포커스가 흐려지고 약해져서

 

   많이 성화되고 좁은 길로 잘 간 사람은 천국에 가서 상 받고

   성화되지 못한 사람은, 상은 못 받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

   지옥 안 가는 것으로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는.. 구원 불감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제 평생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제가 이 땅에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만나서 나의 상태에 대해서 직접 여쭤보고 싶었던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저는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며 사는 날나리인지..'

 

   그런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지난주 목사님의 설교 말씀 듣는 동안

   성령님께서 어지러웠던 제 마음을 잘 조명해주시고 정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설교의 진정한 구원 말씀은, 제게 3단계 구원이라고 정리됩니다.

   첫째,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십자가의 의를 힘입어 값없이 의인이라 칭의 받은 다음에는

 

   반드시 두번째 내 속에 있는 마귀의 성품 죄의 습성 세력과 싸움을 평생동안

   아니 주님 앞에 서기까지 해야 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마지막으로 셋째는 주님 오셔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라는 뜻이 무엇인지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끊임없이 나는 구원 받았는지에 대한 질문 할 때마다

   꼭 믿음이 없어 의심하는 것 같아서, 정죄 의식으로 시달렸는데, 이제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 분명히 그러셨거든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좋은 것이라고.

   이제야 뒤돌아보니 제 속에 선한 것이 있어서 그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라서 정말 기쁘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기쁩니다.

   제가 배우고 깨닫는 진리를 제 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아멘.

 

저는 이런 비슷한 내용의 고민을 정기적으로 받습니다.

이런 질문하는 분들은 평신도도 있지만, 신학생들, 목회자들도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뭘 말하냐면, 어딘가 어딘가 지금 교회 안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아더 핑크 목사님의 글을 인용했고, 박 교수님의 글을 인용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설교는요, 칭의에 관해서 얘기하려 하는데 정말 지루하거든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설교에요. 다 졸릴 걸 제가 알아요.

칭의가 내용이 어려워요. 알고 보면 간단한 건데,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는 어려운 말만 골라서 쓰거든요.

 

박 교수님이 <오늘의 구원과 성화>라는 주제로 글을 쓰셨는데. 대단히 중요한 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있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교인들의 삶과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이룬 양적 팽창에 비해 양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매우 저조하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데는 실패한 것 같다.

 

표현상의 차이일 수 있으나,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분은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데 성공했으나'라고 했지만,

저는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많은 이들을 교회로 모으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는데 실패했다.'

성화는 말할 것도 없구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구원과 성화의 심각한 괴리 현상을 극복해야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무율법주의적 혼란..

 

무율법주의란 말은, 나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에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대로 살면서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

그런 방종주의에 치우친 극단을 무율법주의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율법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무율법주의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방종주의가 심각한 문제죠.

 

그냥 죄짓고 살아요. 그냥. 크리스천이나 넌크리스천이나 똑같이 살아요.

그러면서 무슨 배짱으로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은, '구원이 무슨 뜻인지'조차도 모르는 거예요.

 

구원은 '자기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신자가, 자기 죄를, 이전처럼 똑같이 짓고 산다면..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무율법주의적 혼란 속에 있다.

   왜 교회 안에 성화의 공백, 칭의와 성화 사이에 공백이 야기되었는가?

   우리는 그 원인을, 우선적으로 교회 안에 만연해있는 잘못된 가르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축복과 은혜에만 초점을 맞춘 설교가 한국 교회 안에 도덕적 해이를 불러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윤리적 실패는, 은혜만 전했다기보다, 은혜를 잘못 전했기 때문이라 보아야 한다.

 

극단적인 은혜론. 본 훼퍼의 말로 표현하자면, 값진 은혜를 값싼 은혜로 잘못 전했다는 겁니다.

 

   한국 교회의 무율법주의적 혼란을 초래한 값싼 은혜의 복음은 무엇인가?

   가장 보편적인 것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이 표현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며, 성화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여러분, 과거에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고, 성화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고 배운 분들은 손 들어보세요?

아마 대부분 그렇게 (잘못) 배우셨을 겁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자, 이 분이.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고 성화와는 무관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이렇게 잘못 가르치거든요.

 

   이런 가르침에 의하면,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여러분도 이렇게 배웠죠? 이게 잘못된 가르침이래요.

그런데 어릴 적에 저도 그렇게 배웠거든요. 장로교회에서. 그때 저도 잘못 배운 거예요.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실제적 변화가 없어도, 칭의에 근거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데..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과도 거리가 멀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그 둘간의 긴밀한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항상 같이 가는 것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칭의가 진짜 정말 유효한 칭의라면 성화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다.' 이렇게 봤어요.

 

칭의가 진짜라면, 정말 우리가 거듭났다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화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겠습니다.

성화가 없는 삶은 칭의가 가짜입니다.

 

제 말이 아니고, 칼뱅이 한 말이고, 성경적으로도 옳아요.

계속해서 교수님이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개혁주의 교의학은, 구원론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이며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들을 다룬다.

   그만큼 올바른 구원론의 정립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올바른 구원론의 정립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다." 물론 이 말도 맞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올바른 구원론의 정립은 기독교의 사활이 달린 문제다."

 

   특별히 개혁교회는 중세 로마 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을 개혁함으로 출범하였기에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독특성이 구원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경적으로 개혁된 구원론을, 개혁교회임을 증명하는 표징처럼 여겨왔으며

   다른 교회와 이단을 구분하는 척도로 삼아 왔다.

 

   그러므로 개혁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개혁주의 구원관과 거리가 먼 메시지가 전파되는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라 할 수 없다.

 

   오늘날 개혁교회를 표방하면서도, 전혀 개혁되지 않은 구원론을 전하는 교회가 부지기수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무율법주의적 폐단을 불러온 값싼 은혜의 복음,

   즉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그렇게 배웠어요? 안 배웠어요?

그렇게 배우신 분 손 들어보세요.

 

차라리 아예 배운 적이 없는 분이 나아요. 잘못 배운 것보다는..

 

무조건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그렇게 배웠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단적인 가르침이래요.

 

   반면에 도덕적 해이와 방종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룩한 삶에 대한 메시지는

   또 다른 극단인 율법주의로 치우쳐 종교개혁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교회가 참으로 개혁되기 위해서는 구원론의 개혁이 시급하다.

 

이 분이 심각성을 느낀 거예요. 지금 한국 교회는 구원론의 개혁이 시급합니다.

 

   올바른 구원의 진리가 강단에서 선포될 때

   우리 교회는, 진정한 개혁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루터는, '칭의 교리가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킨다'는 가톨릭의 비난에 대응하여,

   칭의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루터의 가르침에서, 칭의는 신학의 으뜸 원리로 추앙된 반면

   성화는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로 강등되었다.

 

   그는 칭의론을, 가톨릭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소극적인 목적으로

   성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온전한 성화 교리를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한 마디로 루터는 칭의를 강조했고, 성화를 이야기하긴 했지만

칭의라는 교리를, 가톨릭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성화를 가져왔을 뿐이지

본인 자신이 성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칭의에 집중된 채, 성화를 소홀히 대하는 경향은

급기야 개신교 안에 "무율법주의"라는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개신교 안에 만연하게 나타나는 이 현상은, 칭의와 성화를 지나치게 분리하여

   성화를, 구원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화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을 오류라고 지적했습니다. 이해하셨어요?

 

   이런 논리에 의하면,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제가 옛날에 거짓 구원론을 말씀드린 적이 있죠? 거짓 구원론 기억나세요?

거짓 구원론의 거짓말 중 하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행함은 상급에 관계된 것이다.'

 

이 말이 그 말이에요.

'구원은 칭의에 관계한 것이지, 성화와는 별개다.' 이것은 오류고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제가 옛날부터 얘기했잖아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저를 행위 구원론자라고...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를

   교묘히 회피할 수 있는 논리로 남용된다.

 

   본 훼퍼의 말로 표현하자면, 값진 은혜가 값싼 은혜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게 왜곡된 복음이 개신교 안에서, 심각한 윤리적 방종과 타락을 조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과도 아주 거리가 멀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분이 옳으신 것 같아요?

제가 듣기에도 옳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랑 똑같이 생각하시니까요.

 

이 분이 칭의를 이렇게 말했어요.

 

   칼빈과 루터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칭의론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한국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칭의 교리를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교리를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비개혁적이고, 이단에 가까운 구원론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제가 다루려고 하는 주제가 <칭의>입니다.

 

여러분께 스스로 물어보세요. '칭의가 뭐지?'

교회를 20년, 30년 다녔는데 아직 칭의가 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칭의를 얻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죠?

 

칭의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뭐에요?

'구원은 이미 끝났다.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다'라는 거죠.

 

'이제 내가 어떻게 사느냐'는 '상을 덜 받냐, 더 받느냐'.

'상 그 까짓거 안 받고 내 마음대로 살지..' 이렇게 되어버렸단 거예요.

 

이런 사람이 진짜 거듭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진정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칭의를 경험한 사람은 절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가짜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뜻일 수 있어요.

나는 아직 구원 못 받았단 뜻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칭의부터 다루려고 합니다.

진정한 구원론에 있어서 칭의를 다루지 않으면 다른 것은 다룰 수 없기 때문이죠.

 

구원의 의미에 입각하여 볼 때, 칭의가 뭔지 살펴보겠습니다.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가 칭의입니다.

-그 다음에, 뿐만 아니라 죄의 결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시는 것이 칭의입니다.

-그 다음에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주신 것이 칭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져서 원수가 되었는데 화목하게 되고, 그 분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칭의입니다

 

▲1, 죄의 형벌로부터 구해진 것.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우리가 구원이라고 말할 때 구원의 의미가 뭡니까?

'죄에서의 구원'이라 그러죠. '저희 죄에서 구원'이라 그랬죠.

 

그래서 제가 지난 주에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

-죄의 세력과의 싸움,

-죄 자체로부터의 구원,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이뤄간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말씀 드렸죠?

 

먼저, 죄에는 형벌이라는 게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한 형벌. 페널티. 대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기에 예외가 있어요 없어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그 결과가 뭐예요?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죄의 형벌의 문제가 대두된 겁니다.

 

죄의 형벌, 사망.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요?

이것을 해결치 못하면, 우리는 영원한 형벌인 사망에 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걸 대속이라 그러죠.

히브리서 9장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감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

 

베드로서 20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감당하셨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이 형벌을 받으셨다. 이것을 다른 말로 대속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 분이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았기에, 우리는 그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건 완료 시제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될 사망의 형벌, 죽음의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셔서

나는 죽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됐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2. 죄의 결박으로부터의 해방

그 다음에, 우리가 죄의 형벌로부터만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자마다 죄의 종이다.

죄가 죄인을 억압하는 붙들어매는 이 결박, 사슬, 이것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는 게 또한 칭의라 그랬어요.

한 번 보겠습니다.

 

로마서 5장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들여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를 지음으로 죄의 종이 되면 무엇에 이르러요?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아멘.

 

로마서 6장 17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나니.

너희가 본래 죄에 결박되어서 죄가 시키는대로 했다는 거죠. 여러분 많이 해보셨잖아요.

죄를 짓고나서 죄가 시키는대로 했잖아요. 그게 죄의 결박, 사슬이라는 거예요.

그 죄가 나를 묶고 놔두지 않았기에 죄가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었다.

그 말은 죄 자체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죄의 결박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의 결박으로부터 풀어져서 우리는 뭐가 됐어요? 의의 종이 되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을 말해요.

내가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죄의 종이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결박을 끊어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제 하나님의 종이 된 거예요.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죠. 죄를 섬겼다가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다.

 

로마서 6장 22절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방금 우리가 봤죠.

죄에게서 해방되어. 죄의 결박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 칭의.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곧바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성화.

칭의와 성화와 영화가 연결되어 있죠. 연결되어 있는 거 보이세요?

칭의는 곧 성화로 연결되는 거 보이세요?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그것의 마지막이 영화인 것 보이세요?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셨어요. 죄의 노예로부터. 이제 내가 자유를 얻었어요.

그 전과 아주 다른 상황이에요.

 

그 전에 제가 자유하지 못했을 때는 죄가 시키는대로 했다니까요. 그런데 이제 자유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죄가 시키는대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섬기지 않을 수도 있어요. 자유롭게 됐잖아요.

그리스도가 나를 자유케 해주셨어요. 결박을 풀어주셨어요. 죄로부터.

 

이제 나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는 거예요.

이게 차이라는 거예요.

 

칭의를 경험한 사람은 이 자유가 주어진 거예요.

칭의는 죄의 형벌인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생명으로 옮겨주신 것을 칭의라 하고

죄에 속박되어 있던 우리를 풀어주셔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칭의라 하고

이제 그 자유로 내가 죄를 지을 수도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는 자유를.. 다른 말로 칭의라 합니다.

 

▲3.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주신 것이 칭의입니다

또 다른 칭의의 개념을 죄와 관련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흑암의 권세에서의 구원이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가 누구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 권세란 말은 통치에요.

흑암의 통치 아래 있었던 우리를 어디로 옮기셨다구요? 하나님 나라로 옮겨주셨다.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다. 흑암의 통치 아래 있던 나를 건져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 나를 두셨다.

다른 말로 칭의는 뭐냐면 주인이 바뀌었다. 통치자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 전에 나는 흑암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어 있다. 그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그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신분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누가 나의 통치자인가.

누가 나의 주인이냐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겁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이해되셨죠?

 

그래서 <칭의와 성화>라는 책을 쓰신 김세윤 박사님은

이 내용을 독일 신학자 케제만의 글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케제만은 '칭의는 아담적 죄인들, 아담적 죄인들이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 죄인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대신 값을 지불하신 속죄 제사를 통해 사탄의 통치 아래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통치,

하나님 나라 아래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이 신학자는 칭의를 뭐라고 했다구요?

'사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이전한 것'을 칭의라 그랬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자신의 나라로 이전시켜 자신의 백성 만드는 구원의 은혜는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요구, 윤리적 의무를 담고 있다.

 

무슨 말이에요? 정말 우리가 칭의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말이 돼요, 안 돼요?

 

당연하죠? 여러분이 미국 시민인가요 아닌가요?

미국 정부가 여러분에게 세금을 물릴 수 있는 권리가 있죠?

여러분은 그 세금을 낼 수 밖에 없는 의무가 있죠? 순종할 수 밖에 없죠? 미국 시민이니까.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이 어느 나라에 속하든지 그 나라의 법에 순종할 의무가 있지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는 거예요.

 

칭의라는 것은 사탄의 나라에서 사탄의 법대로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이전시켜주셔서

이제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사는 게 칭의라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내 삶에 순종이 없다. 내가 칭의 받은 거예요, 못 받은 거예요. 못 받은 거죠.

 

지금까지는 죄의 형벌과 관련해서 칭의를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봤는데

이번에는 지난 주에 제가 신학적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죄의 직접적 결과와 간접적인 걸 설명했어요

 

▲4. 하나님과관계가 깨져서 원수가 되었는데, 화목하게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 - 칭의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즉시, 일어났던 결과가 뭐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이다.

이것이 Primary consequence of sin이라는 겁니다. 죄의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라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그 부수적인 결과로 온 거예요.

저주, 질병, 고통, 사망, 타락한 죄성.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에 이차적인 결과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속죄에 힘입어 우리가 칭의를 얻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럼 그 결과로 즉시 회복되는 건 뭐예요?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이걸 칭의라고 합니다.

 

자, 한번 성경을 볼까요.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단절되었다. 분리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에베소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하죠.

 

'허울과 죄로 죽었던 너희',

목사님 저 이렇게 살아있는데요? 아니 그 말 말구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된 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리되고 깨짐으로 어떻게 되었느냐.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골로새서 1장 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그리고 분리되고 차단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죽었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과 원수 되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과 원수되어 본 적 있으세요?

 

그럼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에베소서 2장 3절.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더니.

 

진노의 대상이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요 안 무서워요? 어떻게 알아요?

당해보지도 않으셨으면서.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몰라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끔찍하게 무서우면, 사람들이 차라리 그냥 산들이 나를 덮어버려라.

도저히 나를 그냥 덮어버려라. 그래서 그 진노에서 나를 좀 막아다오. 할 정도로 진노는 무서운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성경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구요.

저와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 원수다. 그런데 마음 편하겠냐구요 지금 우리가. 그럴 수가 없죠.

 

바로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하셨다는 거예요. 어떻게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다는 겁니다. 그 분이 하나님과 원수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칭의라는 겁니다.

 

로마서 5장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것이 뭐라구요? 칭의.

 

골로새 1장 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이게 칭의. 바로 이어서 뭐가 나와요.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게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이게 성화. 바로 연결되죠?

 

칭의와 성화는 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게 칭의. 화목이 되었습니다.

 

화목이 되었어도 계속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화목이 별로 의미가 없는 거죠. 관계가 회복되었으니 회복된 관계를 누려야 할 거 아닙니까. 이해되시죠?

이것이 바로 칭의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종합하면,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가 칭의입니다.

-그 다음에, 뿐만 아니라 죄의 결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시는 것이 칭의입니다.

-그 다음에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주신 것이 칭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져서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화목하게 되고, 그 분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

칭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칭의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김세윤 박사님은 칭의를 두 종류로 해석하셨어요. 하나는 법정적 칭의. 또 하나는 관계적 칭의.

이 둘 다 유명한 학자들이 말한 거예요.

 

법정적 해석이라는 이 해석은 영국의 크랜필드라는 유명한 학자가 했습니다. 그 학자가 해석한 것이고.

그 다음에 관계적 해석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독일의 케제만이 한 건데.

 

법정적 해석이라는 것은, 제가 죄인이에요. 살인범이에요.

나는 이제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내 대신 예수님이 죽으신 거예요.

내가 죽을 필요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인의 신분을 얻었다. 의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게 법정적 칭의. 소극적인 해석이고,

 

관계적 칭의는 뭐냐,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깨져 진노의 대상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대신 진노를 받으시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심으로 우리를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이게 관계적 칭의 해석입니다. 칭의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김세윤 박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칭의는 무죄 선언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그 분께 마음껏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두 종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는 칭의의 옷, 하나는 성화의 옷.

 

칭의의 옷만으로는 절대로 안된다. 이것을 정말 작심하고 연구했거든요.

그런데 칭의의 옷을 성경이 뭐라고 했냐면, 갈라디아서 3장에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게 칭의의 옷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었어요.

 

나는 죄인이에요. 그런데 내가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은 것.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의인으로 보시는 것. 이게 칭의의 옷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건이다.

 

▲저희가 오늘 칭의를 이렇게 긴 시간 다룬 이유는, 정말 충격적인 것은 칭의가 뭔지 모른다는 것.

여러분 칭의가 뭔지 아셨어요. 진짜 아셨어요? 확실히 아셨어요?

 

이런 내용은 여러분이 한 번 들어서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두고두고 말씀을 참고하면서.

정말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칭의구나. 내가 정말 칭의를 얻었는가.

그래서 내 삶 속에 칭의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진정한 구원론을 시작한 것이고, 칭의가 어렵지만 여러분께 피가 되고 살이 될 겁니다.

다시는 이 칭의 문제로 혼돈하거나 헷갈리거나 거짓에 속지 마시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칭의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나 같은 죄인이 죄 밖에 지은 것이 없는 나를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무죄 판정 해주실 수 있냐는 거예요. 누군가 내 죗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다면 그 분의 은혜를 평생 잊을 수 없어요.

 

그러니 진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평생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산다는 거예요. 또 죄 짓겠어요?

물론 지을 수 있겠죠. 의도적으로 짓지 않을 것입니다. 칭의는 곧 성화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그 순간부터, 내겐 거룩함이 이뤄진 거예요.

그 거룩함은 계속해서 내 삶에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롭다함을 받았는가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오늘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형벌 받으시고 원수가 되셨습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선언되길 원하고 그렇게 살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타자 J.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