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은 망하고 하나는 있고 계17:6-13 김성수 목사님 계시록 70강, 출처
▶우리는 지금 음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로, 음녀는 자주 빛과 붉은 빛의 화려한 옷을 입고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세상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게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 음녀가 들고 있는 금 잔 속에는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
즉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독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우리가 확인했지요.
하나님께서 17장과 18장에서 요한에게 바로 그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분명 그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내가 너에게 음녀의 받을 심판을 보이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그 음녀가 심판을 받기는커녕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는 모습,
오히려 승리자의 모습으로 요한에게 보여 집니다.
▶(계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이렇게 요한에게 보여 진 음녀는, 마치 승리 주를 마시고 있는 성공적인 모습으로 보여 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모습을 크게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게 정말 음녀의 심판이 맞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고 있는 것 같고
세상 세력이 오히려 승리의 축배를 들며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은데
이게 정말 음녀의 심판의 모습인가?’
요한은 ‘따우마 메가’ 크게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6절만 보더라도, 후천년설의 주장은 얼토당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은 점점 정화될 것이고, 나아질 것이고, 결국 지상 낙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곧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올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의 바람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이 땅은 오히려 점점 악인들이 크게 승리하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맞서게 되면 겉으로는 손해보고, 피 흘리고, 지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됩니다.
바로 그 것이 이 땅을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그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절에 성도들을 ‘예수의 증인’ 헬라어로 하면 ‘말튀론 예수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임을 당한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러나 우리가 지난주에 확인한 것처럼
음녀와 그의 세력들이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서 거만하게 들고 있는 승리의 축배는
그 자체가 ‘가증하고 더러운 독이 들어있는 독배’이며
결국 그들은 그 금잔에 들어있는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에 취해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지 못했던 사도 요한은
‘따우마 메가’ 크게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 저들이 저렇게 승리자의 모습으로 보이는가?’
그러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복 받은 분들이에요.
사도 요한도 몰랐던 그 성도의 신앙생활의 비밀을 이렇게 명확하게 보고 계시니
사도 요한이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천사가 음녀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있는 요한에게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그 비밀을 알려 주마’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계17: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그런데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의 묘사를 보면,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전에 한 번 다뤘었지요?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공부할 때
일곱 머리는 무엇이며, 열 뿔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었었습니다.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9절에 보시면, 그 일곱 머리가 일곱 산이라고 하고, 그 일곱 산은 일곱 왕이라고 합니다.
▶(계17:9-10)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제가 전에 설명해 드리길 혹자들이 이 ‘일곱 산’이라는 구절 때문에
일곱 머리를 로마라고 주장한다고 했지요?
로마가 원래 일곱 산 위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로마는 ‘칠산절’이라는 명절을 절기로 지키기도 했다고 했지요.
그러나 그 해석은 너무 협의 적인 해석입니다.
물론 그 일곱 머리를 로마로 해석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가시적으로 구체화된 사단의 대리자들은 역사를 통해 늘 있어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로마’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렇지만 과거주의 해석자들의 주장처럼, 그 일곱 머리는 ‘역사적 로마’만을 지칭하는 것은
조금 가난한 해석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산’이라는 것은 항상 ‘세력, 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41:14-15)
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 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15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렘51: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슥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어 버리실 악의 세력을 가리켜 ‘산’이라고 부르시지요?
그래서 바벨론도 큰 산 바벨론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산이 일곱이라는 말입니다. 그 ‘산’이 일곱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7’은 완전수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일곱 산’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구체화되어 등장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을 총칭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시면 그 '일곱 산은 일곱 왕'이라고 합니다.
제가 전에 설명해 드리기를 ‘왕’은 ‘왕국’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 일곱 머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구체화되어 등장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정치적인 악한 세력들을 총칭하는 것’이 맞는 해석입니다.
'열 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의 꿈속에 나타난 짐승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그 열 뿔이 무엇인지 공부했지요?
(단7:3, 20, 24)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20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 빠졌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라
24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열 뿔도 역시 열 왕, 왕국, 세력,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그게 10개라는 것은 엄청난 힘, 엄청난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단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받은 짐승의 세력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엄청난 세력으로 등장해서, 우리 성도들을 핍박하고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이라는 단어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 그 일곱 왕 중에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 때문에 과거주의 해석을 하는 분들이 한 때 힘을 받았었지요.
그 분들이 주장하기를, 이 일곱 왕은 로마 황제 일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큘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까지가 다섯이고
여섯째가 베스파시안이고 일곱째가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킨 타이터스라고 해석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아니다, 베스 파시안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적이 없으니까 빼야 한다.
대신에 네로의 환생이라 불릴만큼 지독하게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도미티안을 넣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과거주의 적 해석은 이렇게 일관성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역사가들이 공식 적인 로마의 첫 번째 황제로 인정하는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바로 전에
로마를 통일했던 줄리어스 시이저가 비록 BC44년에 부르터스에 의해 암살되기는 했지만
이미 황제의 칭호인 imperator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공식적인 황제는 줄리어스 시이저부터 계수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각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로가 죽은 후에 비록 잠깐이지만 ‘갈바, 오토, 피텔리우스’같은 사람들이
공식 적인 로마의 황제로 몇 개월씩을 다스렸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왜 빼나?’라고 했을 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은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들을 대입해서 풀게 되면
나중에는 억지와 추측과 짐작을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다섯은 망하였고'에서 다섯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다섯 왕국
애굽,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헬라를 지칭하는 것이고
'하나는 있고'의 하나는 로마이며(요한 계시록이 기록된 때가 로마시대이므로)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의 하나는, 로마 뒤에 올 성도들을 핍박하며 미혹할
또 다른 정치세력을 말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강성해 보이지만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해되시죠?
그러나 지금은 로마도 없고, 이 요한 계시록이 기록 된지도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요?
거기에 대한 바른 답을 얻기 위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천사로부터 ‘요한이 기이히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무엇을 크게 기이히 여겼지요?
'왜 음녀가 오히려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에 대한 기이함이었습니다.
천사는 지금 거기에 대해 요한에게,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음녀는 무서운 짐승을 타고 그 짐승을 조종하고 있는데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는 사단의 대리자로,
사단으로부터 엄청난 힘을 받아 이 땅을 핍박하고 미혹하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 세력의 일곱 중에 다섯은 망했고, 하나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이고,
마지막에 최후의 발악을 하다가 결국에는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구절의 바른 해석인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세력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는 사자처럼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여기서 ‘마귀를 없이 하셨다’ ‘카탈게오’는 ‘완전히 쓸모없게 하다, 무장 해제 시키다’라는 뜻입니다.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마귀의 허리를 꺾어 버리신 것입니다.
마귀가 갖고 있는 유일한 무기가 뭐지요? ‘사망’입니다.
죄인들을 사망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마귀의 가장 궁극적이며 커다란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은 ‘죄’아래에서만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사망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혼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신 그 분이
그 품안에 동생들을 줄줄이 품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생들은 전부 사망을 이긴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망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들을 어쩌지 못 합니다.
(고전15:54-57)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렇게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이제 그 허리가 꺾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은 망하였고’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짓지 않나요?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그 악한 습관과 성품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단의 미혹에 빠져 허우적대고
심지어 구원의 확신까지도 흔들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는 있고’입니다.
왜 하나님은 여전히 그 사단의 세력에게 우리를 미혹하도록 놔두고 계실까요?
왜 하나를 남겨 두셨을까요?
▶(계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그 짐승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 권세는 누가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계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쉬운 성경)
하나님께서는 열 왕들이 짐승에게 권력을 넘겨주는데,
한마음이 되게 하여 그 분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이 통치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미 허리가 꺾인 마귀의 세력에게 잠시 동안 힘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뭐였지요?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은 성도들의 거룩을 위해, 성도들의 양육을 위해 사단의 세력이
성도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혹은 절대 ‘사망으로 우리를 끌고 갈 수 없는’ 미혹입니다.
그것이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마귀의 세력은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그들의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그들은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그 공격과 미혹은 우리의 양육에 필요한 미혹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혹은 우리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 미혹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인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 짐승이 전에는 있었다가 이제는 없고,
다시 무저갱에서 올라 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보세요. 10절에서는 ‘하나는 있고’라고 하면서 8절에는 ‘시방 없으나’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고요.
어찌 보면 모순처럼 보이지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그 내용만 잘 숙지하고 계신다면,
그 해석에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신분과 운명을 뒤 집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는 시방 없는 것이고,
우리의 영적 성숙과 거룩으로의 경주를 위해, 우리를 미혹하고 핍박하는 것이
사단에게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는 있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혹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 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세력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과학, 문명, 사상, 철학, 자고 일어나면 변하지요? 놀랍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런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놀랍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의지하거나 소망을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과학과 문명과 철학과 사상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도 가지지요.
▶조금 더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7장에 가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그 ‘하나’를 남겨 놓으셨는지
그 이유가 정확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롬7: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지금 바울은 그 ‘죄’라는 것이 자기 안에 내장처럼 붙어 있는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5절에서 해결을 받습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데 이렇게 해결을 받고도 그의 삶이 변한 게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고 절망한 그 때와
‘그래서 거기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감사의 고백을 한 후가,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 다음을 보세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어떠세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지요? ‘거기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래놓고
또 ‘여전히 나는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그 죄의 세력 앞에 노출이 됩니다.
노출이 될 뿐 아니라, 자칫 절망까지 느낄 정도로 그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실존을 바라보며
복음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자신에 대해 절망하면서 어떤 결론으로 끌고 가는지 보세요.
(롬8:1-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죄를 떨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야 했구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죄 조차도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을 비롯한 여러 분의 초대 교부들이 ‘오 거룩한 죄여’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 정도는 소화하실 수 있는 실력이 되신다고 믿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어도 된다.’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그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지고 양육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겠지요.
(롬6:1-2)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러한 고백과 함께 그 엄청난 선물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쳐가며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향해 정진하는 삶을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세력은 참 불쌍합니다.
지금 우리 때문에 하나님한테 열심히 사용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우주가 우리 성도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듯이,
마귀들도 성도들을 위해 잠시 권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면 좀 더 확실해 지실 거예요.
(계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이미 마귀는 십자가에서 무장해제 되었는데, 하나님은 마귀가 교회를 시험하게 놔 두세요.
무엇 때문이라고요? 우리를 거룩한 자로 양육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바로 우리를 ‘이기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마귀의 세력을 다섯은 망하게 하셨지만 ‘하나는 있게’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귀가 주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영생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 평안 속에 거할 수 있는
용사들로 만드시기 위해 '마귀'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환난과 평안을 동시에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중략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마귀의 핍박과 공격은 어떤 식으로든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 여사에 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여사의 다른 책에 보면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그 분은 폐결핵, 직장암, 관절염 등으로 평생을 누워 지내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병들지 않고 어찌 기도할 수 있으며 병들지 않고 어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병들지 않고 어찌 다른 이의 아픔을 알며 병들지 않고 어찌 긍휼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오! 나는 병들지 않고는 인간일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 분은 자기에게 병이 없었다면
자기는 애시 당초 인간이 되기엔 틀린 그런 사람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지긋 지긋한 병들을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이 많이 힘들어집니다. 사단이 미혹하지요, 하나님이 징계하시지요,
그래서 힘듭니다. 왜 그렇게 놔두신다고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만사형통과 일사천리, 소원성취만으로 우리의 거룩이 영글어 가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자기의 손이 마이더스의 손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뭐든지 만지면 금으로 변하는 마이더스의 손,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손을 마이너스의 손으로 만드실 때가 더 많습니다.
만지면 줄어들고 실패하는 그런 삶이 오히려 허락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망하고 실패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천국의 소망을 확고하게 새길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가로막고 있는 대적들이 너무 커 보여서 혹시 낙심하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육을 위해 남겨 놓으신
'겨우 하나 남은' 힘을 가지고 우리의 훈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고,
영원한 승리의 면류관은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놓지 마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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