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6-21 김성수 목사님 계시록 96강, 출처
이제 우리는 요한 계시록의 결론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지난 2년 간 매주 거의 한 시간 씩 공부를 했으니까, 굉장히 방대한 분량을 공부한 셈입니다.
방송이나 설교 tape을 들으신 분들은 거의 반 이상이 잘려 나간 설교를 들으신 것이니까
그 분들은 차치하고라도 여러분들은 현장에서 Live로
한 구절 한 구절, 한 단어 한 단어를 모두 공부하셨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께서 요한 계시록을 다시 읽으시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단어나 구절이 나오면 그 구절이 들어있는 설교 tape을 찾아서 들으시면
90% 이상 해결이 되실 것입니다.
그만큼 제가 이 요한 계시록 강해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그 동안 공부한 이 계시록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숙지하셨다면
여러분은 오늘 결론 부분을 마저 공부하신 후에 요한의 고백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하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제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경의 모든 구절 중에 가장 감격스럽게 읽는 대목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주님, 오늘이라도 주님이 부르신다면 기쁘게 가겠습니다.’라는 말이 되지요.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재림을 말하기도 하지만
내가 주님께 가는 그 날이, 주님이 내게 오시는 날이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이 고백을 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혹시 ‘주님 조금만 더 있다가 와 주실래요?’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20: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본문 6절을 보시면 우리가 공부한 이 요한 계시록의 내용들이
‘결코 속히 될 일, 데이 게네스따이 엔 타케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도 주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니, 에르고마이 타쿠’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자들이 이러한 구절들을 들어 성경을 공격하지요.
‘속히 된다면서 왜 지금까지 안 이루어지냐?’
‘너희들이 믿는 예수는 속히 온다면서 왜 지금까지 안 오냐?’ 라고 조롱합니다.
베드로 후서 3:3절에 보면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그렇게 우리를 조롱할 것이라고 하지요?
성경은 참 무서우리만치 정확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계시록이 기록된 것이 AD95년경이니까 그로부터 19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을 조롱하며, 하나님께 적의를 품고 있는데 이렇게 건재합니다.
주님은 오실 생각도 안 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여기서 ‘결코 속히 될 일, 데이 게네스따이 엔 타케이’는, 시간적인 의식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적인 의식은, 역사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요 개념이지
하나님의 의식과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시간의 개념이 없는 곳을 우리가 묵시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묵시 속에서 이 계시록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속히’라고 번역이 된 ‘타케이’나 ‘타쿠’는
‘타퀴스’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헬라어 ‘타퀴스’는 ‘갑자기’ ‘선뜻’ ‘반드시’의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속히’는 시간적 의미인 ‘곧’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번복되거나 취소됨 없이 반드시 이루어 질 일’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서 다시 한 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고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주님은 반드시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고야 마시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본문 10절도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계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다니엘서 8: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 일은 여러 날 후에 있을 일이니까 책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서는 정 반대로 ‘때가 가까우니 인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다니엘서와 이 요한 계시록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약속대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 이후의 기간을 우리가 ‘말세’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그 마지막은 반드시 올 수밖에 없으며,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말세’인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매일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온 것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성도’ ‘신자’ ‘믿음을 가진 자’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들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오늘 오신다 해도, 저는 기쁘게 주님을 맞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들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믿음’에 합당한 삶을 오늘 살아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그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왜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은 ‘결코, 반드시, 속히, 홀연히, 갑자기’ 이루어 질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을 준비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7절이 이렇게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계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우리가 복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는 말씀이 아니라
‘복을 받은 자들,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며 살더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9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계22: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천사가 성도를 가리켜서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하지요?
▶11절을 보시면 더욱 분명하게 믿음을 가진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게 되는지가 나옵니다.
(계22: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 선택되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죄인들은
계속해서 불의하고 더럽게 살게 되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자들은 의를 행하고 거룩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의를 행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며
훈련하며 연습하며 성숙한 신자로 지어져 가는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일 할 게 없어요.
▶그래서 본문 12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우리가 일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 말씀은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고 선교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그 분량에 따라 차등 있는 상을 주실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이라는 것은 전에 우리가 자세하게 공부했다시피 ‘영생,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따르면 그 ‘상’을 위해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 일이 뭘까요?
(요6:28-29)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러분께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일’의 결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을 향한 분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산다고 나옵니까?
그 두루마기를 빠는 삶을 산다고 하지요?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자신을 깨끗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7:14절을 공부할 때, 우리 성도는 어린양의 피에 이미 두루마기를 희게 빨아 입은 자들임을 배웠습니다.
성경은 어린양의 피에 두루마기를 빨아 입은 자들은
이 땅에서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빠는 삶, 거룩한 삶을 살게 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또 한 번 못을 박습니다.
(계22:15) 개들(여기서 개들이라는 것은 거짓된 가르침을 하는 자들, 빌립보서)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으로 삼아 이 땅을 살아갑니다.
성도들은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믿음을 공고히 하며, 두루마기를 빠는 일에 매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선물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알기에 세상을 향해
‘당신들도 어서 거기서 나와 이리로 오라’고 외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7절에 보면 성도들의 삶이
‘복의 전달자’로서의 삶이어야 함이 명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계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 즉 교회가 ‘오라’하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자들도 ‘오라’고 외치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자들은 이 땅에서 신자다운 삶, 거룩한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오라’고 외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시면서
성경에 ‘성도는 예수를 믿는 즉시 만사형통, 질병치유, 승승장구하게 된다.’는 내용을
한 구절이라도 보셨습니까?
오히려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 고난은 너희를 양육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러니 잘 참아라. 이겨라.’였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번영신학이나 성공신학,
기복신앙, 신비주의’이런 것들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들은 여전히 힘을 추구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마저도 종으로 부리고 싶어 하는 악한 죄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러한 자들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본문 18~19절을 보십시오.
(계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은 가짜들이 나타나서 진리의 복음에다가 불순물을 섞어서
엉터리 복음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이미 우리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제가 설교 원고를 쓰기 전에, 항상 큰 소리로 이 구절을 읽고 원고를 쓰기 시작합니다.
설교 원고를 쓰면서도 ‘성경에 있는 말씀 외에 보태거나 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말씀을 준비합니다.
어떤 때는 설교 원고를 거의 다 작성했다가도, 다시 찢어버리고 새로 쓰기도 합니다.
그러기를 정말 여러 번 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인간의 살고 죽는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설교의 내용에 저의 사견이나, 제가 하고 싶은 말이나,
저의 욕심이 첨가되어서, 말씀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때가 가끔 있거든요.
여러분, 제 설교의 일차 대상은 바로 저입니다.
저는 설교원고를 다 작성한 후에 저에게 일차로 설교를 합니다.
그랬을 때 그 설교로 말미암아, 저의 영혼이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의 야망이나 저의 욕심이 부추겨질 때,
그 때는 가차 없이 전부 찢어 버립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불순물이 섞이면 안 되지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은 엉터리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께서 전해지는 말씀도 간섭을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 보면
하나님을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계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교훈이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보내신 영이 아닌, 마귀에게 속한 영도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이렇게 마귀가 보낸 자들, 거짓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교사로, 목사로, 선교사로
이 땅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는 복음에다가 불순물을 집어넣어 세상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자녀들까지 미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생활 하셔야 합니다.
▶지난주에 동부에 계시는 어떤 권사님께서 상담 전화를 하셨습니다.
당신이 다니시는 교회의 목사님께서 전혀 복음과는 관계없는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 봉사하고 헌신해야 잘 산다’ 이런 기복 적인 설교만 하신 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쫓아내신 답니다.
참다 참다 도저히 더는 못 듣겠어서 목사님께 항의를 하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래도 기름부음 받은 목사님한테 대들면 저주를 받을 텐데’하고
선뜻 나서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 중에도 마귀의 영을 받아 속이러 온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택하고 목사를 택하는 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여러분의 영혼을 맡기는 큰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문으로 추측으로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습니까?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거 보세요.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선한 일이 어떤 일이라고 했습니까? 기억나세요? '토브,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사해 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선한 일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 하나님의 일, 믿음’은 모두 같은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거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절대 힘을 추구하는 세상의 원리로 살다가 가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소출이 심히 많아지자 곡간을 더 크게 만들고
소출을 거기에 쌓아두고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 앞프론 타우테’라고 부르십니다.
‘앞프론’이라는 단어는 ‘어리석다, 자기중심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부자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습니까?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으로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그저 창고에다가 잘 쌓아두고 행복하게 즐기겠다는데
왜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 자기중심적인 자, 앞프론 타우테’라고 부르실까요?
이 부자의 삶이 우리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이며 공통적으로 바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세상의 어리석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소출이 많아졌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다’라는 것을 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런 비유가 나오지요?
어떤 주인이 잔치를 열고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새로 산, 밭에 도 가야하고, 새로 산, 소도 시험해 봐야하고, 시집도 가야하고,
장가도 가야합니다’
그들은 모두 이 땅의 것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잔치를 베푼 주인의 마음이 어떤 것이며, 그 잔치가 어떤 잔치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 소유의 밭이나 소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시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자기의 소유나 소출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소산이나 소출과 거리가 먼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너무 바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사업이 잘 된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피해가 오면 그거 팔아 버리십시오.
우리 교인 중에 장사가 제일 잘 되는 주일 날, 가게 문을 닫는 사람들이 몇 분계십니다.
주일 날 가게 문을 여니까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어도, 온통 매상 생각밖에 안 나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교회 생활이 소홀해 지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차 없이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따져 볼 때는 엄청난 손해지요. 그렇지만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어떤 손해라도 감수하겠다는 그러한 결단이 성도에게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이 땅에서 자꾸 죄로 타락한 여러분의 육신을 죽여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힘을 키우시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5:35-38)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잘 보시면 성경이 우리 이 역사 속의 육신을 ‘씨’라고 부릅니다.
그 ‘씨’가 죽지 않으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육신의 욕심과 탐욕, 세상을 향한 사랑‘을 땅에 뿌려서 죽이지 않으면
절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채송화 씨를 땅에 뿌렸을 때 그 씨가 땅에 들어가 죽어야
아름다운 채송화 꽃이 피게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이 죄 된 육신의 것들을 죽여가고, 포기하고, 놓아 가는 것입니다.
(고전15:42-44)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썩을 육신, 욕된 육신을 땅에 심어 죽여 버려야 우리는 새 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옛 백성 60만 명이 다 죽고, 새 사람 60만 명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 땅에서 나의 육신이 죽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그 순종을 성경은 ‘거룩’이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그 ‘거룩’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부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성경은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한 문장으로 표현을 하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게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 은 이빨을 금이빨로 바꿔주는 게 왜 필요합니까? 여기에 고지론이 왜 필요합니까?
여기에 ‘청부론’이 왜 필요하지요? 여기에 왜 ‘기적’이 필요합니까? 그들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왜 못 자국과 창 자국이 남아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 그림은 우리 성도들이 나중에 부활하게 되면
이 땅에서 남은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성도가, 반드시 그 십자가의 삶을 통과해야 한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사람들이지
거들먹거리면서 ‘예수 믿으면 이렇게 만사가 형통 합니다’를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주님의 변화 산 사건이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변화 산으로 제자 셋을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주님은 그 곳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모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왜 12명 모두 안 데려 가시고, 세 명만 데려 가셨을까요?
그것은 변화 산의 주님의 영광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변화 산에서 장차 해같이 빛나는 영광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임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너희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광은 좋아하면서, 십자가는 절대 거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변화 산에서 베드로가 변모된 예수님을 보자마자 뭐라고 합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영광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다른 말로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영광 속에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보여 지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엘리야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십자가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받아 누리려 하던 유대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그 엘리야가 벌써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엘리야가 왔다니요? 우리가 그토록 선망하던 엘리야가 정말 왔습니까?‘
주님께서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임의로 대우하였다’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세 제자들이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인 줄 알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불 병거를 타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헤롯에게 붙들려 참수를 당해 죽은 세례요한을 의미한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변화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 세 제자는
세상 적인 믿음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의 영광은 세례요한의 삶, 즉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귀신들린 아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 산에서 내려왔더니,
그 아래에서는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우리 아이를 좀 고쳐 주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에게 부탁했는데 그들이 고치지 못 했습니다’하고 고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뭐라고 탄식을 하시는가 하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지요. ’너희 믿음의 적은 연고니라’
여기서 믿음이 적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여러분이 이 내용을 읽으시면서 ‘믿음이 적으면 귀신을 쫓아 낼 수 없다,
그러니 어서 빨리 믿음을 키워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발휘하는 참 신자가 되자’
라고 결심을 하셨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완전히 거꾸로 보신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변화 산과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을 듣고 내려 온 세 제자는
세례 요한의 삶, 십자가의 삶이 엘리야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능력을 행하고 힘을 보여주는 것이
믿음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곡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정말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산을 옳길 수 있습니까?
산은 그만두고라도 이 연필이나 한번 옮겨 보실래요? 왜 안 되지요?
성경은 분명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겨자씨만큼도 안 되는 믿음입니까?
믿음은 구원에 필요한 것이지, 산을 옮기는 데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존재로 성숙해 가는 데 필요한 것이 믿음이지,
산을 옮기는데 필요한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부인하고, 너희의 힘을 빼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분은 산을 옮기실 수도 있고 바다를 말려 버리실 수도 있는 분이니까,
너희는 너희의 힘을 쌓아서 너희를 증명하거나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순종해라’
그게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그 믿음이 있으세요?
그런데 왜 산이 안 옮겨집니까? 우리의 구원에
산이 옮겨지고 바다가 마르는 일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귀신이나 쫓아내고 기적이나 일으키고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좇아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 17장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을 소유한 분들입니다.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장차 올 하늘나라의 원리로 오늘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는 누차 말씀드린 대로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서
하나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 다른 말로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하실 수 있는 분들입니까?
그러한 믿음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여러분에게 와 계신 주 예수와 함께
미리 그 하늘의 삶을 연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오늘과 너무 차별화 시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여러분 안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여러분이 체감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성경에서 재림은 ‘파루지아’인데 그 말의 뜻은 ‘나타나다’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셨다가 하셨던 것 기억하시지요?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 그냥 나타나시는 것이 재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바로 지금 그 예수가 재림하셨을 때와 똑같이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진정으로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2006년 한 해가 다 저물었습니다.
2006년 새해 예배를 드린 것이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흘렀네요.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화살처럼 달려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인생의 화살이 과녁에 다다르는 날
여러분은 어떤 과녁을 향해 달렸는지가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엉뚱한 과녁을 향해 평생을 달리셨다면
여러분의 그 마지막은 처절한 고통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과녁을 벗어나다, 하마르티아’가 뭐라고 했지요? ’죄‘입니다.
아무쪼록 새 해에는 올바른 과녁을 확인하시고
그 바른 과녁을 향해 올곧게 매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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