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의 전쟁 I 계17:9-17 김성수 목사님 계시록 71강, 출처
▶우리는 계속해서 음녀 바벨론과 짐승의 심판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음녀는, 짐승을 타고, 그 짐승과 운명 공동체가 되어서 그 짐승을 조종하고 있고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세상을 미혹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가, 그 세력의 일곱 중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여전히 남아 세상을 공격하고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요한에게 설명을 해 줍니다.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1) 그 악한 세력은 애굽,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헬라, 로마처럼 멸망했나 싶으면
다시 살아나고, 멸망했나 싶으면 또 다시 살아나서 역사 전체에 존재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미혹하지만, 그들은 모두 멸망했고,
또 지금 존재하며 우리를 핍박하고 미혹하는 그 세력도 역시 멸망할 것이며
앞으로 등장해서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될 그 세력도
역시 멸망의 불 속으로 빠져 버릴 것이라는 의미에서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구절을 해석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짐승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묘사가 된 것이라 했지요?
2) 두 번째 해석으로, 사단의 세력은 이미 십자가에서 그 허리가 꺾였으나
여섯째와 일곱째 왕으로 상징되는 말세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 백성들의 거룩과 성숙과 양육을 위해 잠시 힘을 쓰도록 허락을 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구절을 해석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이 땅에 정치적 경제적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핍박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은
그 본체인 짐승의 의도대로 정확하게 움직여 주는 짐승의 대리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여덟 번째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7:11
▶(계17: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머릿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지금 음녀가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짐승을 타고 있는데
그 일곱 머리는 일곱 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짐승 전체를 여덟째 왕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짐승의 일곱 머리들이 왕이었는데, 그 짐승 전체가 여덟째 왕이라는 것은
사단의 대리자인 일곱 왕은, 정확하게 짐승과 내용과 속성이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일곱 머리, 일곱 왕을 포함한 여덟째 왕인 짐승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가 바로 11절입니다. 계속해서 14절을 보세요.
▶(계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 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여기에 보면 짐승과 일곱 머리, 열 뿔, 즉 열 왕들이 어린양을 대적하여 싸웁니다.
이 구절을 보시면서 생각나는 장면이 없으세요?
열 왕들이 어떤 산에 모여서 어린양을 대적하여 싸우는 장면,
바로 16장의 아마겟돈 전쟁이 연상되시지요?
세상의 왕들이 므깃도 산에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아마겟돈 전쟁을 17장 14절이 한 구절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이 17,18,19:10까지의 내용이 바로 대접 재앙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계16:13-14)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와서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전쟁을 종용합니다.
바로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
짐승에게 붙어있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인 것입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
즉 이 세상에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인 열 왕들은
모두 그 짐승과 용의 입에서 나온 거짓 영에 의해 조종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의 그림인 것입니다.
그들이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 주의 주이시오, 만왕의 왕이시기에’
그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승리를 하신다는 것이 본문 14절의 내용입니다.
원래 이 ‘만 주의 주, 만왕의 왕’이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단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딤전6: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이 구절들에 나타난 하나님을 묘사하는 ‘큐리오스 큐리온, 바실류스 바실레온’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쓰였습니다.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여덟째 왕인 짐승과 세상의 열 왕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갑자기 그들과 대적해서 싸우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만 왕의 왕’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아무리 세상의 군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그 모든 왕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의 군왕들이 기고만장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국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 등 상일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천사가 말세의 기간 동안에 마귀와 그의 세력들이 싸우는 대상을
‘어린 양’이라고 부를까요?
‘그 짐승과 열 왕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운다.’고 하지요?
왜 사자나 독수리가 아니고 어린양입니까?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치르는 영적 전쟁의 양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양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내용’이 뭡니까?
구약 시대에 어린양은 어디에 쓰였었지요? 제사에 쓰였던 것입니다.
제사라는 것은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흠 없는 제물에다가 전가시켜
그 제물을 죽여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의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죄인이었던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이 바로 어린양이었지요.
그 어린양은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죄인들을 대신해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자신을 비우시고 오히려 원수들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분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으로 드려지시기 위해
순결하고 순전한 삶을 사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어린양, 즉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셨고 다시 부활하셨으며
우리를 위한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 모든 내용이 ‘어린양’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바로 거짓된 철학, 사상, 교훈, 교리를 가지고
바로 이 내용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과 열 왕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전쟁을 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이 승리하시는 그 옆에 그 어린양과 함께 꼭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부르심을 입은 사람’ ‘빼 내심을 얻은 사람’ ‘진실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계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 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바로 우리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도 역시 어린양과 함께, 그리고 어린양처럼 세상을 이긴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어린양의 전쟁에 어린양과 한 편으로,
어린양이 담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셔야 하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겪고 있는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밤마다 꿈속에 마귀가 나타나는 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하나요?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영화에서처럼
그런 귀신 들린 사람들과의 싸움을 영적 전쟁이라고 하나요?
아니면 초등학교 도덕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공산당의 따발총 앞에서
‘난 그래도 예수를 믿겠노라’ 하고 할복을 하는 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합니까?
도대체 영적 전쟁이 뭡니까?
오늘 본문 14절이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할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어린양과 함께 싸우는 어린양의 전쟁’을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죠.
1) 어린양은 자신을 비우고 원수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지만
세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웃을 죽이라고 힘의 논리를 가르칩니다.
그렇게 힘의 논리를 가지고 남을 밟아 나의 유익을 챙기는 세상과 맞서서
남의 유익을 위해 내가 죽는 훈련을 하는 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2) 어린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순결한 삶을 사셨지만
세상은 자신의 영광과 행복과 쾌락을 위해 언제든지 죄 속에 몸을 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의 행복과 나의 쾌락을 위해서는 어떤 더러운 죄도 불사하는,
세상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3) 어린양은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셨지만
세상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자신의 뜻에 복종시키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나의 목적과 소원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하는 그런 세상 세력과 맞서서
나의 소원과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며,
설사 내가 원하는 것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진다면
기꺼이 그 삶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야베스의 기도’같은 엉터리 책에 광분해 있을 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읽어드렸던 어느 병사의 기도처럼,
비록 우리의 소원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 겸손, 아량, 사랑, 용서, 온유, 인내 같은 것이
내 삶 속에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4)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셨지만
세상은 그 분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합니다.
교만한 인간들은 어떤 절대자의 도움 없이,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세상이 과학과 문명, 그리고 수양과 수도를 통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을 때
‘나는 불가능한 죄인이며 내가 이 더러운 죄 속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시는 방법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가
무엇 때문에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분은 부활하신 일도 없고 승천하신 일도 없다’에, 세상이 그렇게 광분한 것 아닙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에 그렇게 고소해 하며 광분할까요?
세상은, 지금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어린양과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짐승과 열 왕은 이렇게 이미 이 세상에 삶의 원리로 철학으로 사상으로,
시대정신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어 와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도 이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전체가 바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짐승’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음녀가 타고 있는 짐승을 다른 말로 ‘많은 물’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1절에서 그 음녀가 어디에 앉아 있었지요? ‘많은 물’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그 여자는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지요? 그러니까
‘많은 물과 짐승’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에도 공부를 한 부분이지만 15절을 보시면
그 물은 바로 타락하고 중생하지 못한 세상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17: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제가 전에 설명해 드리기를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은
유대인들이 흔히 쓰던 세상 전체를 가리키던 관용구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음녀가 타고 앉아서 다스리고 있는 많은 물’은
타락하고 중생하지 못한 세상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바로 그 물과 짐승을, 동일한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몇 군데 찾아보시면 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시18:16-17) 주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내밀어, 나를 움켜잡아 주시고, 깊은 물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주께서 원수들에게서, 나보다 더 강한 원수들에게서, 나를 살려 주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살려 주셨다.
시편 기자가 세상의 원수들을 가리켜 “깊은 물”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시124:2-5)
2 주께서 우리편이 아니셨다면,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에,
3 원수들이 우리에게 큰 분노를 터뜨려서, 우리를 산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며,
4 물이 우리를 덮어,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갔을 것이며,
5 넘치는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8:7-8)
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 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구약 성경은 자주 하나님의 백성 이외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 전체를 가리켜 ‘물’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 ‘물’이 바로 ‘짐승과 짐승의 세력’인 것입니다.
▶왜 제가 굳이 이 ‘물과 짐승’을 하나로 설명하는데 이렇게 열을 올리는지 아세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성도들은 어떤 특별한 선교 지나 특정한 때,
특정한 대상을 상대로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일곱 머리, 열 뿔이 달린 짐승’은 어떤 특정한 시대, 특별한 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인생 내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전쟁을 위해 어디 특별한 곳으로 적을 만나러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대적들에게 이미 둘러 싸여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 세상의 사상, 철학, 과학, 문명, 문화, 시대정신 등 모든 것들이
바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만들어 놓고 발전시켜 온 것들 중에
선한 것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비근한 예로 여러분이 요즘 광분하고 계시는 월드컵 경기를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그 월드컵 경기가 세계 화합에 유익을 줄까요?
며칠 전에 한국이 토고라는 나라와 싸워서 2대 1로 역전승을 했습니다.
한국 뿐 아니라 이 LA도 정말 떠들썩했었지요.
어떤 한국의 칼럼니스트가 논평을 하기를
‘이렇게 경기도 안 좋고 정치도 불안한 상황에서 월드컵의 승리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네 세상 사람들에게는 지당한 논리입니다. 남을 밟아놓고
그 상대방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승리감과 만족감을 얻는
‘일곱 머리와 열 뿔 달린 짐승’에게는 당연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비워 남을 살려 내는 ‘어린양의 삶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다른 이를 묵사발 내 놓고 그게 너무 좋아서
남의 차에 올라가서 펄펄 뛰어서 다 망가뜨려 놓고,
허가도 없이 커다란 폭죽을 쏴서 남의 건물에 불이나 내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이겨서 그렇게 흥분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의 ‘토고’라는 이름도 없는 나라,
너무나 가난해서 선수들 월급도 못 주는 그 나라 국민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삼 시 세 때 끼니도 다 찾아 먹을 수 없는 그런 나라 국민들에게 패배감과 실망감을 안겨 주고서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동안 승리감에 도취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맞습니까?
우리가 그걸 어린양의 전쟁이라고 부르나요? 아니요, 그걸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온통 죄로 물들어 있으면서도 그게 ‘죄’인 줄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재미로, 흥미 거리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 자체가 무서운 죄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물’이라고도 하고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전체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겹겹이 우리의 대적들에게 둘러 싸여 있고
그 대적들의 공격은 때로 너무나 매력적이고 달콤하게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분별을 해 낼 수가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세상과 어린양의 삶의 원리를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서,
세상에 관심 두지 말고 세상에서 눈을 돌려 하늘을 소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골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요일2:15-16)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오해는 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에게 오늘부터 직장도 가족도 형제도 이웃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가족이라는 관계와 직장이라는 상황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맞는 삶을 훈련하고 연습하도록 의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섬기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 하셔야 합니다.
이왕이면 열심히 부지런히 일 하셔서 돈도 많이 버세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이루어낸 것들이나 그 것을 이루어 낸 자신을 자랑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자랑으로 삼는다는 것은 바로 그 것에 나의 관심과 목적이
‘그 일들을 통해 빚어지는 나의 거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에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그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것을 자랑하는 자들의 혀를 끊어 버리신다고,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시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런데 세상은 전부가 다 뭐에 홀려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가족을 자랑하고
민족을 자랑하고 국가를 자랑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게 전 인류의 유일한 존재의 목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적용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삽니까?
그들은 모두 나 이외의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삽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 40일을 보내실 때 사단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가셨습니다.
그 시험의 내용이 뭐였습니까? 자기의 힘을 동원해서 자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메시아잖아, 적어도 메시아는 돌을 떡으로 만드는 정도의 실력은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너를 우습게 지 않을 거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조금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천사들이 수종(隨從)드는 모습 정도는 보여 줘야 세상 사람들이 너를 메시아로 알아줄걸?’
전부 뭡니까? ‘세상 적인 힘으로 세상에게 너를 증명해 봐’입니다.
예수님은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으신 분이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지요? 그분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자랑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세상의 오해와 비난과 배반을 감수하시고 홀로 고독과 외로움을 겪어 내시며
그 구원 사역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게 어린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린양의 전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똑같이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세상이 여러분을 보고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똑같이 세상에 여러분을 증명하고 자랑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들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가시면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처럼
여러분이 구해내야 할 사람들에게 오해와 멸시와 천대와 박해와 수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걸 감수하고 중도에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그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그건 절대 안 된다.’고
그 착공식 불도저 앞에 드러누운 두 김 씨가 있었지요?
지도자는, 왕 노릇 하는 자들은 당시에는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고 미움을 받을 지라도
먼 훗날을 내다보고 공익을 위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심정으로 외롭게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런 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계신 분들입니다.
세상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앞에 서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가셔야 하는 지도자의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우리를 오해하고 질투하고 웃음거리 취급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이미 알기에
그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오늘도 꿋꿋이 그 사람들에게 몸으로 입으로,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린양과 함께 이 땅에서 왕 노릇 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한 진정한 지도자의 삶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가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할 세상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고 칭찬을 받으려 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종교행위나 여러분의 성공으로
세상 사람들과 형제자매들에게 칭찬 받을 생각만 하지 마시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을 하셔야 지요.
무슨 일이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는 일.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자로, 이 땅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해받고 멸시받고 수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눈물을 뿌리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오늘 날 예배당에서는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했던
그 시험을 목사들이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고 십일조 잘하면 수십 배로 돌려받는다, 불치병도 낫는다, 사업도 잘 된다,
자식이 좋은 대학 들어간다.’라고 가르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잘 믿으면 저렇게 잘 되는구나’라는 증거를 보여주라고 합니다.
‘간증이 있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좋은 이야기인 것 같지요?
그렇지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그게 바로 마귀가 예수님께 한 시험 아니었습니까?
‘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세상에게 자랑해 봐, 그러면 세상이 너를 인정해 줄 거야’
마귀, 용, 음녀, 짐승은 바로 그 힘의 원리를 가지고 세상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싸워서 이겨내는 것을 ‘영적 전투, 어린양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기독교가 얼마나 우습게 타락해 버렸는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명심하세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렇게 힘의 원리를 가지고
자신과 자신의 편의 자랑을 위해 시간을 방탕하게 써 버리는 자들은
결국 멸망의 불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매력적인 붉은 옷과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온 세상을 미혹하여 몰아가고 있는 용과 음녀와 짐승의 세력을
어떻게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살아낼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흥에는 희생이 선행된다 (0) | 2015.08.06 |
---|---|
약속에 기초한 믿음 (0) | 2015.07.21 |
다섯은 망하고 하나는 있고 / 김성수 (0) | 2015.05.21 |
음녀의 가진 금잔 / 김성수 (0) | 2015.05.21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김성수 (0) | 2015.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