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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에스라 / David Pawson

LNCK 2015. 8. 8. 15:06

 

에스라              영어 녹취록             출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들이 죄를 범할수록, 징벌이 갈수록 더 중하게 내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징벌의 강도가, 지난 번 징벌 때보다 더 높아지는 거죠.

 

먼저는, 주변 나라로부터 이스라엘이 공격당하게 하십니다. 블레셋 같은 나라로부터 공격 받았죠.

그래서 약한 징벌로 재산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징계를 통해서, 어떤 경고도 듣지 않으면, 징벌의 강도가 더 심해집니다.

그 결과 가뭄, 기근 그리고 양식이 부족한 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다음 징벌은 질병이나 건강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일 큰 징벌은, 약속의 땅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다른 나라에 다시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 (노예)에서 구출되었지만, 궁극적으로 다시 과거처럼 노예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어요. '그만하면 됐다. 이제 내 땅을 떠나라

사실 그들은 총 두 번 포로로 잡혀갔어요. *앗수르, 바벨론

 

큰 징벌(포로)이 임하기 전에,

(작은 징벌로) 그들은 이미 내전이 있었는데,

북방의 10지파가 자체적으로 왕을 세웠고,

남방의 2지파가 예루살렘과 다윗의 직접적인 자손을 보존하고 있었죠.

그들 남북왕국 간에 내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남방의 2지파는 '유다'나라로 불렸는데,

두 지파 중에 큰 지파였던 유다지파의 이름을 따른 것이고,

다른 한 작은 지파는 베냐민 지파인데, 유다지파에 합세했죠.

그래서 '유다'나라로 이름 지었는데, '유대인'이란 호칭이 바로 여기서 온 것입니다.

 

 

 

 

 

두 번의 포로 1:50~

 

첫 번째 포로는 BC 721년이고, 북방의 10지파가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고,

후에 앗수르가 기울면서, 바벨론에게 점령되었습니다.

 

두 번째 포로는 남왕국의 2지파가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끌려갔습니다.

 

그들을 포로로 끌고 간 나라는 바벨론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포로', 바벨론 포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포로가 아니라요

 

바벨론이 공격해 왔을 때, 기대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파멸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유다의 모든 사람과 짐승을 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부드럽게 유대인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다 죽이는 대신 유대인들을

세 번에 걸쳐, 세 부류의 다른 대상들을 뽑아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세 번의 포로 송환 2:38~

 

1. 처음은(BC606) 유다 왕실 사람들을 포로로 데려갔고, 또한 모든 관원들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유다 나라를 복종시키고, 조정하기 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상류층 엘리트들을 먼저 포로로 데려갔습니다.

 

다니엘이 바로 이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으며, 그가 십대 때 왕실 사람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갔는데,

아시다시피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이 방법이 그다지 효과가 없었습니다.

유다의 남은 사람들은,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여전히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번의 기간이 총 2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2. 그래서 주전 597, 바벨론은 두 번째로 공격해 와서,

이번에는 모든 기술자(장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기술자, 돈 버는 사람들을 포로로 다 데려가면, 남은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면서,

그렇게 하면 비교적 지배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포로로 잡힌 장인들 중에 에스겔이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가 바벨론에서 포로된 사람들 중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여전히 효과가 없었으며, 남은 백성들은 바벨론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3. 그래서 마지막에 바벨론은 주전 586년에, 남은 사람들 모두를 포로로 잡아 갔고,

성전을 파괴하여 평지로 만들었으며, 모든 것을 다 파괴하였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황폐되었으며, 유다왕국은 거의 텅 비게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3번에 약 20년 걸렸죠.

 

그래서 두 번의 포로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북방의 10지파이고, 또 한번은 남방의 2지파입니다.

 

한번은 앗수르에 포로가 되었고, 또 한번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는데,

사실 두 지역이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두 지역 모두 메소포타미아 평원이었고,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변이었습니다.

 

세 번의 포로송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세 번 모두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황제일 때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70년을 살았는데, 조금 후에 그 원인을 얘기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70년간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서>에서 '70년이 차면'하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9:2, 25:11~12

그래서 70년이 거의 되어가자, 그는 너무 흥분되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이제 우리를 되돌려 보내실 때가 되었습니다.‘

 

 

3번의 귀환 4:46~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 번으로 나뉘어 귀환했는데, 이 점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그들이 세 번 포로로 잡혀갔고, 또한 세 번 포로에서 귀환했습니다.

 

1. 1차 귀환은 BC 537이며, 스룹바벨이 인도해서 귀환했는데, 그는 다윗의 직접적인 후손이었습니다.

그가 온 것은, 다윗의 직계 자손이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마1장 예수님의 족보에 그가 나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직접적인 왕손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총독으로) 처음에 대략 5만명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2. 90년이 지난 후, 두 번째로 귀환했는데,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대략 1,800명 가량인데, 이때는 BC458이었고,

제사장인 에스라가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레위인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는 전에 레위인이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이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옛 신앙의 틀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가능한 레위인들을 많이 데리고 왔고,

그런데 돌아오려고 하는 레위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또 가서 38명의 레위인을 찾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에스라가 관심가진 것은 신앙의 재건이었고,

스룹바벨이 관심가진 것은 사회의 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신앙을 재건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레위인들을 데리고 왔으며,

레위인이 있어야만 이스라엘의 신앙의 틀을 재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 2차 귀환 후 얼마 되지 않아서, BC458년에서 444년 사이에 느헤미야가 (3차로) 귀환했는데,

그는 몇 명 장인만 데리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이 관심가진 것은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었는데,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재건(1), 신앙의 재건(2),

그리고 나라를 재건(3차 귀환)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견고한 성으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예루살렘 성벽은 또한 느헤미야가 돌아오기 전에는, 재건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귀환이 아주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어요.

이건 마치 '2의 출애굽' 같아요. 하지만 '1의 출애굽'하고 다른 것은

모든 것이 조금씩 점차적으로 탈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돌아온 사람의 숫자가 아주 적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전체 유대인 인구와 비교하면, 이 귀환민의 숫자가 아주 적은데,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벨론에서 사는 것이, 예전에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것보다는

사정이 훨씬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는 노예가 아니고, 장사도 할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일단 장사나 사업을 시작하면 내려놓기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할게요.

뉴욕의 어떤 유대인 사업가가 작은 가게 하나 샀어요.

그런데 그 가게 양쪽에 모두 큰 마트가 있었고, 그의 가게는 중간에 끼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가게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다가,

이름 짓기를 "입구"라고 간판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그만큼 사업을 잘 합니다. 그들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머리를 써서 살아가야 했는데 (핍박 때문에), 그들은 아주 꾀가 많습니다.

 

염려스런 것은, 그들은 바벨론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고,

70년 후 고향으로 돌아 갈 때가 되었을 때,

만약 당신도 70년간이나 사업을 일으켜 세웠으면, 그걸 모두 내려놓기가 아주 힘들 것입니다.

 

특히 유다 같은 가난한 작은 동네에 가면, 사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결국 대다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남게 되었습니다.

 

   신약 당시 별을 따라 베들레헴에 온 박사들은, 바로 바벨론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표적인 별을 따라 왔는데요.

   (그 이유는) 발람 선지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리라'고 하였습니다. 24:17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으며,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당시 바벨론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이었고, 하시딤, 즉 이스라엘의 지혜자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다 딱 들어맞지요. 참으로 놀랍게 들어맞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에스라서

 

이제 우리 <에스라><느헤미야> 이 두 책을 봅시다.

*이번 강의에서는 에스라서를 보고, 다음 강의에서 느헤미야를 봅니다.

 

이 책의 이름은, 에스라는 2차 귀환, 느헤미야는 3차 귀환 사건을 따라 지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두 책은, 1, 2, 3차 귀환 사건을 모두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두 권은, 세 번의 귀환 사건을 다 설명합니다.

스룹바벨은 두 책에 모두 언급되었고,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라도 두 책에 모두 언급되었고,

느헤미야는 한 책에만 언급하였는데요, *느헤미야

지금부터 우리 이 책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이 두 권의 책이 아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이 두 권의 구조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구조가 아예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건 바로 두 책의 저자가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럼 누구일까요? *에스라

 

이 두 책의 저자의 필치가 <역대기>저자와도 아주 비슷합니다.

사실 히브리 성경에는 <에스라><느헤미야>가 한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후에는 <1에스라><2에스라>로 불렀으며, 그리고 <역대기>와도 같이 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로는, 에스라 이 '묶음' 전체를 다 기록한 것 같습니다.

에스라는 아주 자세히 역사를 기록했어요.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이 모두를, 그가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역대기의 필치는, <열왕기>와는 아주 다릅니다.

 

하지만 이 두 책을, 둘 다 각각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두 책에서 제2단락과, 4단락이 서로 똑같은데,

바로 '재건''신앙개혁'입니다. *아래 표 참조

 

 

에스라

느헤미야

1~21차귀환   a, b

1~23차귀환

3~6장 재건   a, b, c

3~7장 재건

7~82차귀환

8~10장 언약의 갱신

9~10장 신앙개혁

11~13장 신앙개혁

 

 

(2단락에서) '재건'이란,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것이며,

(4단락에서) '신앙개혁'이란, 백성들을 새롭게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느헤미야) 귀환이, 그 중간에 끼여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에서는

먼저 첫 번째 스룹바벨 (1) 귀환을 얘기하고,

그리고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은 두 번째 귀환인데, 에스라가 (2) 귀환하여,

백성들을 개혁시켰습니다.

 

이곳(9~10), 두 권의 책 중에서 제일 슬픈 곳인데,

백성들이 귀환하자 바로 죄를 범하였어요. 비극이지요.

 

그들은 고국 땅을 잃었고, 이방에서 70년간 떠나 있었어요.

하지만 돌아오자마자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멸시하였어요.

사람은 정말로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자, 위 도표를 봅시다.

<에스라서에서>

1. 스룹바벨의 1차 귀환이 나오고, 1~2

2.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3~6

 

하지만 성전재건 공사가 한 번 끊어졌다가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다시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학개와 스가랴의 역할이었습니다.

 

3. 에스라 중심의 2차 귀환이 나오고, 7~8

4. (귀환 후 즉시 범죄한) 백성들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9~10

 

<느헤미야서에서>

1. 느헤미야 중심의 3차 귀환이 제일 먼저 나오고, 1~2

2. 성벽을 재건하고, 3~7

3. 언약을 새롭게 갱신했습니다. 8~10

4. 또 다시 백성들의 신앙개혁이 있었습니다. 11~13

 

백성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하여 나라를 잃어 버렸는데, 이것을 항상 잘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차트를 보십시오. 이 두 책의 구조가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제가 차트에 ab 또는 abc 같은 소문자를 써 넣었는데요, 잘 보이세요?

그건 각 단락의 소단원의 표시입니다.

 

<에스라>에서

1단락에는 2개의 소단원이

2단락에는 3,

3단원에는 3,

4단원에는 2개의 소단원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1단락에는 2개의 소단원이 있고,

2단락에는 3,

3단락에는 3

4단락에는 2개의 소단원이 있습니다.

 

정말 두 책의 구조가 똑같지요. 이것은 사전에 계획해서 주의 깊게 썼다는 뜻입니다.

두 책은 구조가 잘 구성되었고, 균형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 편집자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에스라입니다.

 

또 아주 비슷한 한 곳의 평행 parallel,

두 책의 9장에 모두

전국적으로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는 기도가 나오는 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최근 2년 동안에 (영국의) 국가기도운동을 유심히 보았다면,

바로 이 두 장이, 그 국가기도운동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9장과 느9

 

이 두 장이 모두, 전 국민이 함께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에스라> 9장과 <느헤미야> 9장 모두는 아주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책이 아주 비슷합니다.

 

이제 <에스라>를 보십시다.

이 책은 네 단락으로 구성되었고,

각 단락은 각각 2, 3, 3, 2개의 소단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제가 이것을 구분하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자세히 검토해 보시면, 이 책 자체가

주제별로 잘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자가 그렇게 구분했지요.

 

두 권의 구조가 똑같고, 아주 보기 좋게 단락들이 잘 구성되었고,

또한 매우 기술적으로 잘 씌어졌습니다.

 

두 책 모두가 두 가지 언어로 기록되어졌고,

구약에 이렇게 2개 언어가 나오는 책은, 여기 2권이 처음입니다.

바로 히브리어와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오늘날의 에스페란토 어처럼,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던 세계적으로 공통된 언어였습니다.

마치 오랜 후 신약시대에 헬라어가, 당시 통용어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의 통용어는 아람어였으며,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통용되던 셈족 계통의 언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된 후, 아람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특히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배워야 될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말할 줄 알고,

그들이 귀환한 후 가져온 많은 기록물(족보)들을 보면, 아람어로 기록된 것들이었습니다.

 

<에스라><느헤미야> 중에 있는 일부 족보도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영어성경으로 번역할 때, 두 가지 언어를 번역해야 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또 다른 책도 두 가지 언어로 기록 되었는데, 바로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서도 포로시기에 기록하여서, 아람어가 섞인 것입니다.

 

이 두 책은 포로 귀환한지 얼마 안 되어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귀환할 때 두 가지 언어를 썼는데,

한 개는 사업할 때 사용하는 아람어이고, 한 개는 모국어인 히브리어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빠른 속도로 살펴보겠습니다.

에스라의 내용이 아주 단도직입적이어서, 제가 모든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고레스를 얘기하는데,

그는 당시의 바사의 왕이었고, 메대와 바사가 연합해서 바벨론을 정복했습니다.

 

그래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지배자는, 그 동쪽 끝에서 다스렸던 고레스이지요.

그는 당시 세계를 다스리던 왕이었지만, 매우 관대했습니다.

그는 제국 내 모든 민족들에게 아주 친절한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주 오랜 전 이사야 시대에,

이 선지자가 고레스라는 이름을 미리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예언하기를 '하나님이 기름부음 받은 종 고레스를 보내어,

너희 포로된 자들을 반드시 돌려보내리라'고 하였습니다. 44:28

 

지금 많은 신학자들은, 이사야가 고레스 이름을 미리 알았다고 믿지 않아요.

그래서 이사야서의 이 부분이, 사건 발생 후에 기록하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이름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을 일으켜, 그들을 귀환시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레스가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온 여러 민족들을 향하여

아주 선진화된 법령 하나를 발표 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고국으로 되돌아가게 하겠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희들의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나를 위해, 너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말을 이스라엘에게만 했을 뿐 아니라, 고고학 자료에 근거하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모든 민족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을 여러 곳에 걸었지요, *도박에 비유해서

여러 사람마다, 자기를 위해, 그들의 신에게 복을 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민족의 신이 정말 참 하나님이든지, 자기는 보호받게 되어 있지요. *여러 군데 걸었으니까 적어도 한 곳은 당첨 되겠요.

 

그래서 그는, 여러 민족들과 함께, 그 가운데 이스라엘에게도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나를 위해, 너희 하나님께 복을 빌라

 

그는 모든 민족에게도 이렇게 말했고, 이스라엘에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지요. 그렇지요?

 

이는 70년이 차니, 하나님이 관대한 왕을 일으켜 세워서

그들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허락하여, 자기들의 고유한 신앙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고레스는 그들에게, 바사의 신전을 건축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성전을 재건하라고 했으며,

그리고 자기를 위해, 복을 빌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레스는, 모든 민족이, 자기들 신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는 돈을 여러 곳에 걸었다'고 했는데,

즉 보험을 여러 군데에 든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직접적인 자손이며,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귀환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레스가 그들더러 다시 자기들의 왕을 세우라고 했지만,

귀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레스가 그렇게 하도록 격려는 받았습니다.

 

그는 스룹바벨과 그의 동행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분부했으며,

바사 땅은 평지이지만, 예루살렘은 산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 드렸는데, 그들은 올라가야 했습니다.

'올라간다'의 히브리어는 '알리야'이며,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다른 나라에 살다가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알리야'를 하고 있으며

제 생애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알리야'를 왔으며,

'알리야'1875년에, 유럽의 유대인들이 중동으로 귀환하면서부터 본격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알리야'가 계속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알리야', 히브리 구약성경의 마지막 한 글자입니다.

왜냐하면 <역대기>는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책이고,

<역대기>의 마지막 문장이 "(그들로) 올라갈게 하여라"(알리야)인데, 바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고레스가 했던 말이지요. 대하36:23

 

그래서 스룹바벨은 이로써 올라와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는 제사장 한 명을 데리고 동행했는데, 그는 예수아, 혹은 예수입니다.

아주 재미있지 않습니까? 조슈아(영어), 예수아(히브리어), 예수(헬라어)는 모두 같은 단어입니다. 그건 지저스입니다.

 

그가 대제사장 한명을 데리고 동행했고, 그들이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제단을 세워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70 포로기간 내내 제사 드릴 수 없었는데,

이는 성전도 없었고, 제단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와서 했던 첫 번째 일은, 바로 제단을 쌓아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은 쉽게 쌓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장막을 치고, 제일 먼저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아시지요?

계속 반복해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매번 장막을 치면, 제일 먼저 ()제단을 쌓았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 처음으로 한 일도, 바로 제단을 쌓는 것이었고,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제일 먼저 했던 일도, 바로 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이 즈음에, 그들이 곤란한 일을 당했는데, 아닥사스다가 고레스를 이어서 바사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내온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절반 유대인의 피, 절반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 족속입니다.

당시 바벨론 포로를 피한 소수의 유대인들이, 유다의 산지에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근처에 남은 이방인들과, 또는 거기로 이주해온 다른 민족과 통혼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사마리아에 혼혈 후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마리아인들은 절반은 유대인이고, 절반은 이방인이라서,

그래서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으니까,

유대인들이 그들을 싫어했겠지요. *질투심 같은 것

 

그때로부터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두 민족 사이의 깊은 분열을 건드리신 것이지요.

이 분열의 유래는, 포로에서 귀환 시기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그 땅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0년간 주인이었지요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아닥사스다 왕에게 편지하여,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을 막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큰 잘못을 범했는데,

이는 아닥사스다가 에스더의 양자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유대인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20:20~

 

후에, 다른 왕 다리오 1세가 바벨론에서 편지 한통을 보냈는데,

그 편지 내용은,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성전 재건하기를 격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재건하는 과정이 누덕누덕 기운 것 같고 질질 끌었던 것은

어떤 때는 사마리아 인들이 와서 그들을 가로 막아, 재건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그들이 성전 재건하다가 힘이 들면, 자신의 집부터 건축하였습니다.

학개 선지자가 "하나님의 전은 여전히 황폐한데,

지금 너희들은 벽과 천정이 쳐진 집에 살 때냐?"라고 말한 것을 아시죠?

학개 선지자는 그들이 다시 재건할 수 있게 촉구하였습니다.

 

그들을 격려하여 재건하도록 사기를 돋우는 것은, 큰 문제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황무한 땅에 사는, 얼마 안 되는 숫자의 사람들이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조금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재건하였을 것 같은, 감상적인 생각은 갖지 마십시오.

사실 그것은 매우 덕지덕지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시작했다가 중단했다가 또 했다가 중단하는 식이었지요.

 

(같은 시기인) 다리우스 1세 때,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기억하시죠?

 

하나님은 바벨론의 통치자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유대인에게 동정심을 가지게 하셨고,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그들더러 유대인의 성전재건에 동정심을 가지게 하였고,

비록 그 지역 사마리아 인들이 재건을 가로막았어도, 계속 재건하게 하였습니다.

 

에스라가 귀환한 것은, 이때로부터 50년이 지나서였고,

즉 스룹바벨이 귀환한지 80년 후에, 에스라가 귀환하였습니다. *1차 및 2차 귀환

 

에스라가 귀환할 때는, 지역 총독의 협조를 구할 수 있는 법령을 받아서 왔습니다.

이는 당시에 성전 재건 문제로, 그 지역에 국지적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점에 아닥사스다 왕이 또 한통의 편지를 보내서, 레위인들이 귀환하는데 격려를 받았어요.

그때 에스라도 애를 써서, 근근이 38명의 자원하는 레위인을 더 데리고 갔습니다.

 

다음으로는 백성들의 신앙개혁 사건인데요, 이것은 슬픈 부분입니다.

우리는 에스라가 먼저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는데요,

그는 백성들 위해 중보기도 하기를, '하나님,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들이 하는 짓을 보십시오. 그들은 바로 즉시 옛날로 되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공중의 회개로 이어졌고,

그는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회중 앞에서 자기들이 행한 일을 공개적으로 자백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슬픈 마음으로 블랙리스트 한 장을 작성했는데요,

계명을 위반하고 세속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의 이름들을 조사해서, 작성한 블랙리스트입니다.

 

그들이 제일 보편적으로 행한 죄는, 다른 민족과 통혼한 것입니다.

당시 그들이 이방인과 결혼했는데, 이스라엘에게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크리스천이 이렇게 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올바른 말을 한 마디 했는데,

'만약 당신이 마귀의 자녀와 결혼하면, 당신이 시아버지/장인과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이건 정말 사려 깊은 말입니다.

 

!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원하고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면, 후에 그가 믿음을 갖게 될거야

 

이런 생각은, 보통 믿는 여자가, 불신 남자와 결혼할 때 가지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의 심적 고통만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하십시오.

믿는 사람과 함께 멍에를 맬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였어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혹시 여자가 부족해서 그랬을까요?

 

하지만 에스라는, 이러한 혼인을 해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혼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서 이 혼인을 해체하였습니다. *내보냄

 

여러분, 신약성경도 이렇게 하지 (내보냄) 말라고 하였는데요,

하지만 에스라는 이 일이 아주 엄중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대로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해서,

이방 아내와 자식들을 내보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문서를 조사하여,

유대인 아닌 사람을 발견하면, 족보를 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가라. 너희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장했을 뿐,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이것이 <에스라>의 대략 내용입니다.

하지만 정말 당신을 사로잡는 것은, 이 사람 에스라입니다. 제가 에스라를 얘기해 볼게요.

 

그의 이름은 도움이라는 뜻이며, 재미있는 것은, 에스라의 뜻은 '도움'이며,

느헤미야는 '위로'라는 뜻입니다.

이 포로에서 귀환한 작은 무리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도움''위로'였으며,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얻었습니다.

 

에스라가 히브리어로 도움 help”이고, 이 히브리 단어에서 파생해 나온 이름이 엘르아살이고,

그 엘르아살에서 나사로가 나왔는데, '도움 help'이라는 뜻입니다.

*엘르아살 : 아론의 셋째 아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 '나자로스'는 히브리어 엘르아살의 헬라어 번역.

 

에스라는 아론과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직접적인 후손이며,

그 후에 비느하스와 사독의 직접적인 후손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통적인 제사장의 후예입니다.

그는 성경을 바벨론에서 가져왔습니다. 모세의 율법, 오경, 성경의 첫 다섯권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아주 멋진 표현을 하였는데, '그는 성경 사람이다'

즉 늘 성경을 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7:11, 개역엔 '학사'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가 성경에 대해 세 가지 일을 했다는데, 제가 말하는 순서를 주의하십시오.

1) 그는 성경을 읽고 연구했으며, 2) 성경대로 살았고, 3) 성경대로 가르쳤습니다.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이는 참으로 아주 큰 도전입니다.

1) 그는 성경을 읽고 연구했고, 2) 성경대로 살았고, 3) 성경대로 가르쳤습니다.

 

1)번과 3)번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2)번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아주 힘듭니다.

그는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설교하는 그대로, 자기 삶을 보여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대로 살았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아주 멋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설교자의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덕적으로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인하여 우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발견하여 울기는 쉽지만,

다른 사람의 죄로 울기란 쉽지 않지요. 경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전체 가르침의 중점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준행해야 하는데,

그저 말씀에 흥미를 가지는 정도나, '멋진 말씀이군!' 하고 끝내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말씀을 준행(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말씀을 준행하십시오. 순종하십시오. 지키십시오.

말씀대로 사십시오!'

우리가 말씀을 준행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그는 강조하였습니다.

 

전통에 의하면, 그는 120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공회의 대표라고 합니다.

이 공회에서 구약성경을 편집했고, 여러 책들을 모아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구약성경'을 편찬했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확하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확실히 다음 400년을 위해 기초를 닦았는데, *신구약 중간기

이는 다음 400년 동안에는 선지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400년 동안에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예전에 하신 말씀만 있었는데,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하나님이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데,

-한 가지는, 그가 과거에 하신 말씀을 통해서 하십니다. 바로 성경이지요.

-다른 한 가지 방식은, 그가 현재 하시는 말씀인데, 바로 예언입니다.

하지만 예언이 없을 때는 성경만 있는 것이지요. *중간기 때 그랬습니다.

 

에스라가 회당 모임 때,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회당에서의 예배 순서가

에스라가 지시한 그대로 내려 왔습니다. 오늘날까지요!

 

그 결과, 회당의 예배 순서와, 오늘날 기독교의 예배 순서는 서로 거꾸로 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렇게 하지 않았고, 초대교회는 회당의 예배 순서를 따랐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제가 회당 예배 순서의 옹호자입니다.

 

제가 길포드에서 목회할 때, 매 주일아침 예배 때 회당 예배 순서대로 하였더니,

그 효과가, 후에 기독교에서 정한 지금의 전통적 예배 순서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그 순서란, 설교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경배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께 뭔가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먼저 듣고서,

그 후에 찬양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당신의 반응(응답)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찬양이 더욱 의미가 있고, 더욱 변화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설교에 따라) 어떤 때는 당신이 춤추고 노래 부르고 싶고,

또 어떤 때는 진지하게 통회의 심정으로, 찬양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안 하면, 찬양부터 하면 인도자가 예배의 분위기를 띠우려고 애를 쓰게 되지요.

저는, 찬양 인도자가 찬양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더 움츠려듭니다.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충만해지기까지, 경배 찬양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교회에 올 때, 보통은 그 즉시로 마음에 하나님이 충만해지지 않습니다.

보통은 한 20분 기다렸다가, 차츰 빠져들지요.

 

만약 먼저 설교를 들으면, 20분이 절약 되는데,

왜냐하면 먼저 설교를 들으면,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이미 준비된 상태여서, 이제 찬양을 드리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설교 후에는 찬양 하나만 부르고 끝내 버리는데, 참으로 비극입니다.

 

만약 당신이 회당에 가면, 그들은 먼저 1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 다음에 찬양으로 반응하는데, 이것은 초대 교회 때의 예배 순서이고,

이것은 앞서 에스라가 설정한 순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일을 먼저 했어요.

 

그는 시장에서, 나무로 만든 강대상 한 개를 놓고,

거기서 그들에게 성경을 읽고, 강해하고, 그리고 그 반응으로 청중들의 찬양이 나왔습니다.

 

설교를 먼저 듣고,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이 훨씬 쉬운 것입니다.

저는 이 순서가 좋다고, 항상 선전하고 다닙니다.

 

만약 당신이 제가 쓴 책을 읽으시면, 제가 거기에서

이러한 예배 순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조언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초대 교회에서 늘 하던 예배 순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회당에서 답습해 내려온 것이고, 에스라가 설정한 순서인데,

먼저 설교부터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전에 길포드 교회에서 먼저 1시간 설교하고, 다음 반시간 동안 찬양을 하였어요.

이렇게 하면 워밍업 시간이 절약되는데, 이는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 말씀이 충만하면,

그분께 뭔가 말(찬송, 기도)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필요 없습니다.)

자 여러분, 밖에 날씨도 좋은데 함께 경배합시다. 아직 우리가 진심으로 찬양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말을 들어보셨죠?

 

그렇게 자꾸 인간적으로 분위기를 살리려고 하는데요.

하지만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이 충만하면, 그분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잊어버리게 되며,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찬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좋습니다. 저의 광고는 여기까지이며, 계속하여 강의 합니다.

 

이 경건한 사람(에스라)이 기초를 닦으니,

다음 400년 동안 그들은 선지자가 없고, 서기관(율법사)만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서기관들은 전문적으로 성경만 연구하고 해석했습니다.

예언적 말씀이 없을 때는 언제나,

(말씀 해석을 놓고) 서기관들은 보수파와 자유파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보수파 신학자와 자유주의 신학자가 있지요.

 

보수파들은 부활과 사후세계를 믿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자유파들은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았는데, 그들을 사두개인이라고 불렀어요.

 

저는 사두개인은 '슬픈 사람'이라고 기억합니다. *부활을 안 믿으니

바리새인은 '멀리 보는 사람'이고요. *부활을 믿으니

*사두개인은 영어로 새듀시 인데, 우스갯소리로 '슬픈 사람'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니까요. Sad-do-u-see

바리새인은 영어로 패러시 인데, Phar I see 나는 멀리 (부활을) 본다.. 우스갯소리로

 

(그래서 서기관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두 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이 두 파들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있어서 쟁론이 끝이 없었고,

당시 성경학자와 신학자들이 전성기를 맞이했지요.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백성들은 그분의 설교 듣기를 아주 즐거워했는데,

이는 그분의 설교가, 서기관들 같지 않게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도 그건 알 수 있어요. 어떤 설교자는, 다른 사람의 책을 베껴서(인용해서) 하고,

또 어떤 설교자는, 자기가 진짜로 뭔가를 알고서 설교하는 것을, 당신이 들어보면 알수 있지요.

 

한번은 제가 성령에 관한 설교를 총 20편 했어요.

당시 저는 아직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었어요.

 

그때 저는 <사도행전>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욱 힘들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제게 성령의 세례를 주셨어요.

 

그 다음 주일에 제가 다시 강대상에 올라가서, 동일한 원고로 설교를 했고,

제 생각에는, 제 자신이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설교가 끝나고 나서, 어떤 젊은이가 제게 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지난 주간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제가 '왜 그러냐?'고 했더니,

 

'당신이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했는데요?'

'이번 주에는, 당신이 뭔가를 알고 설교했어요!' (회중들 큰 웃음)

 

여러분, 그 젊은이가 원래는 목수였어요. 지금은 브리스톨의 설교자입니다.

요즘에 어느 주일 아침 TV방송에서 그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이번 설교에서는, 자신이 무엇이라고 설교하는지

아주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어요.

 

좋습니다. 여러분, 다음 단원에서 <느헤미야>를 강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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