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5

거룩함 없는 구원은 없다

LNCK 2015. 9. 15. 07:48

거룩함 없는 구원은 없다                     히12:14                            출처

   

서론 / 구원과 행함

 

오늘은 다시 저희가 참 어려운 주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마귀가 가장 성공한, 대 히트를 친 거짓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화론과 무신론일 것입니다.

 

그 진화론과 무신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것으로 마귀는, 인류역사에서 정말 많은 불신자들을 지옥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지옥으로 보낸 거짓말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거짓 구원론,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제가 오래 동안 정말 외쳐왔던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다. 행함은 구원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상급에 관계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미혹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여기까진 맞지만

행함은 상급과 관련 있다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말이 왜 거짓인가 하면,

첫째, 성경은 단 한 번도 믿음과 행함을 분리한 적이 없습니다.

둘째,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아주 교묘하게 나눈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아멘!

 

행함은 구원과 무관한 것이다이것은 너무나 그럴 듯한 거짓말이었고,

무수히 많은 교인들이 이 거짓말에 속아서, 아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해서 억울해 할 것입니다.

 

구원과 성화

 

그런데 지금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는 내용은,

똑같은 맥락에서 정말 이것은 신학적으로 아주 치명적인 구원론의 오류인데,

구원은 칭의만 관계된 것이고, 성화는 상급에 관계된 것이다.’라는 거짓말입니다.

 

제가 이 내용을 말씀드리기가 굉장히 어려운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는 오래 동안 이렇게 배워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칭의에만 관계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성화는, 구원과 무관하고, 상급에만 관계된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배우셨고, 저도 과거에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거죠. 이것이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함(성화), 구원받은 증거로, 절대 필요한 요소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오늘 자세히 살피려 합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이것은 신자의 선택이 아닙니다.

마치 거룩함과 음란이 상반되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Without holiness no one will see the Lord

 

여러분께 물어봅니다.

거룩함은, 구원에 있어서 선택사항입니까, 필수사항입니까? (필수사항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어느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도, 제게 어려운 점은

이렇게 설명을 드려도, 너무나 우리 안에 견고한 진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저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으니까요.

 

목사님,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구원은 칭의에만 관계된 것이고

성화/거룩함은 상급에 관계된 것이라고 배워왔는데,

이제와서 그게 잘못되었다고 하면,

지금까지 그 무수히 많이 잘못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항상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제가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세계적인 권위자가 이야기할 때, 아무래도 설득력이 있고, 신빙성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분들의 의견을 인용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고신대 박영돈 교수

 

제목: “주를 보지 못할 교인들”          12:14참조

 

이번 세월호 사태로 인해, 유병언이 속한 구원파의 교리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그들의 구원 교리에 의하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으면,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살아도,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진한 교인들은 홀리기 쉽습니다.

 

어떤 교인은, 기존 교회에서 몇 십 년 신앙생활을 해도

누리지 못했던 구원의 확신을, 이런 구원파 교리를 통해

단번에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방종에 빠지게 하며,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사이비 구원론은, 유병언과 그 일가와 측근에게서 볼 수 있듯이

양심이 화인 맞은 괴물 같은 인간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신교 구원의 교리가, 얼마나 괴이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입니다.

 

장로교에서는, 구원파의 이 구원론을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보는 많은 교회에서

전하는 구원의 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대다수의 교회도

사실은 그런 식으로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세윤 박사

 

김세윤 박사도 얼마 전, 그의 강의와 책에서

대다수의 한국 교회도, 사실상 구원파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복음의 변질입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는

잘못된 구원론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거룩함이 없어도,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이 잘못된 구원론이 사탄에게서 나왔겠지요.

이걸 목회자들이 배우고, 또한 가르쳐 왔습니다.

 

성경은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도, 이런 사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12:14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고전6:9~10, 5;21, 5:5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주를 본다고 했습니다.

죄에서 떠나 순결하고 거룩하지 못한 이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룩함 없이는 구원 못받는다는 뜻이지요.

이건 혁명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뒤집어지든지, 무슨 수가 날 판입니다.

 

거룩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 받는다는 생각은

성경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장 염려한 것이, ‘오직 믿음이란 교리가

이런 식으로 오해되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우리 행위나 거룩함에 근거해서 구원 받는다는 주장을 배격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믿은은, 반드시 거룩함의 열매를 산출한다는 점을

동시에 역설합니다.

 

믿음으로 신분이 의롭게 되는 것과,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띠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면,

동시에 그를 반드시 거룩하게 하십니다.

 

또한 믿음은,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기독교강요 3.1.1.)

끊임없이 회개함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지 않는 이들은,

곧 부패해져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 안에는 구원의 확신과 함께

두려움과 떨림이 공존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두려움은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종과 게으름과 헛된 자만을 막아 줌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더 온전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기독교강요 3.2.22)

 

이게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진리를 알고, 은혜를 입고, 배도하면

다시는 회개할 수 없다는 히브리서 말씀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경고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위험을 두려워하며 경계하게 되지요.

 

이런 두려움이 있어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하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이 없는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에 빠지게 하며

결국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거룩한 두려움 없이 구원의 확신으로만 충만한 사람,

거룩하게 살지 않는데도,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확신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이는

망할 사람입니다.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믿었기에 구원 받았다고 굳게 확신하는 것은

마귀가 준 거짓 확신입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믿었기에 구원 받았다고 굳게 확신하는 것은

마귀가 준 거짓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도, 아예 신학교에서부터 잘못 배웠다는 거죠.

마귀가 주는 거짓 구원론에 미혹 당했던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마귀적으로 왜곡된 구원의 복음을 통해

마귀가 심어준 거짓 구원의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며, 자신의 구원의 여부를 염려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확고히 하려는 경각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함의 열매가 없는데,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요?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했는데도,

거룩함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자기 착각, 기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결론입니다.)

내가 참된 믿음을 가졌는지, 내가 참으로 구원받았는지는

오직 거룩함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안다고요?

거룩함의 열매가 있는가?’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열매는,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거짓 구원의 확신에 푹 빠져서, 신앙생활 하다가 멸망하는 것보다

괴로울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고, 자기 구원을 의심해 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것이 온전한 확신에 이르는 길이지요.

물론 참으로 구원 받은 신자들도, 자신이 이룬 거룩함이 너무 미흡하고 보잘 것 없기에

그것만 의지해서는 자신의 구원을 자신할 수 없지요.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과 부패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죠.

 

그래서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의로움과 긍휼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점점 더 낮아지면서 거룩해지는 것이죠.

 

신자의 삶에는, 칭의와 성화가 성령 안에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산출합니다.

 

여러분, 거룩함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성화는, 우리가 칭의를 얻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칭의와 성화> 라는 책을 쓰신

풀러 신학교 김세윤 박사님의 글입니다.

 

한국의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대다수의 신자들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이미 의인으로 칭함 받음에 자만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것을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하여

구원파적 안일에 빠지기까지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믿음으로 구원 얻었는데,

이것이 예정론, 견인론과 관계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구원을 잃으려 해도, 잃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 그게 무슨 말이냐면, 이것이 김세윤 박사의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구원 받을 자들을 선택하여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시고,

그 예정에 따라 구원하신 자들은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덕 입어 이미 의인이라 칭함 받았으니

 

나는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이고,

그러기에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때까지 나를 지켜주시리라 그러니

이제 어떤 경우에도 구원의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라고 여깁니다.

 

김세윤 박사는, 이게 구원파의 교리라는 겁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복음의 진리라고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많은 정통 목사들도 사실상 이렇게 가르치는데,

그들은 좀 슬그머니 가르친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목사들이 가르치는 칭의론은,

의인으로서의 삶이 없이도 의인으로 자처하기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진지한 성도들은, 칭의된 후에는 꼭 성화가 있어야 한다면서

거룩한 삶에 열심을 냅니다.

 

그들은 성화를 위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죄짓지 않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며, 사랑을 많이 실천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삶을, 이미 칭의된 자들로서 자신들이 장차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게 된다는 생각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성화를 상급신학의 구도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에 만연된 구원론의 구도입니다.

 

구원(칭의)은 은혜로 모든 믿는 자들이 이미 받은 것이다.

그들 중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들은

다시 말해 성화에 열심을 낸 사람들은,

구원에 더하여 상급을 받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박영돈 교수의 전에 소개한 내용을 repeat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인가?

 

   한국교회는 무율법주의적 혼란 속에 있다.

   왜 교회 안에 성화의 공백, 칭의와 성화 사이에 공백이 야기되었는가?

   우리는 그 원인을, 우선적으로 교회 안에 만연해있는 잘못된 가르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무율법주의적 혼란을 초래한 값싼 은혜의 복음은 무엇인가?

   가장 보편적인 것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이 표현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며, 성화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의하면,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실제적인 변화가 없어도,

칭의에 근거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데..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과도 거리가 멀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그 둘 간의 긴밀한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항상 같이 가는 것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잘못된 구원론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경종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삶에 거룩함의 열매가 없으면 구원 못 받은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부인해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거룩함이 없이 어느 누구도 예외 없다. 나를 볼 수 없다.’

거룩함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거룩함이 옵션(선택사항)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그 어려운 거룩함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올바른 구원론에 대해서, 정말 정확하게 아셔야 한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알아야 된다고.. 늘 강조드리는 것입니다.

 

 

칭의의 바탕 위에서 진행되는 성화

 

칭의를 통해 얻어지는 즉각적 성화

그 뒤로 이어지는 점짐적 성화에 대한 박영돈 교수의 글.

 

한국교회가 그 동안 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했기에

교인들의 윤리적 수준을 저하시켰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칭의를 너무 많이 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바르게 전하지 못한 데 있다.

 

칭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과 이해는, 항상 성화를 증진시킨다.

그것은 칭의가 성화의 참된 바탕과 원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화의 진전은, 오직 칭의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성화가 진행됨에 따라, 칭의의 단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화의 전 과정은, 칭의에 의존한다.

신자가 아무리 높은 거룩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라도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바로 설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는 즉각적인 동시에 계속적이다.

이는 성화와 같이 칭의가 점진적으로 완전하여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여러분 칭의는 점진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칭의는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칭의의 바탕 위에서만 성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칭의가 없이는 성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칭의는 우리 구원의 여정 속에 계속해서 우리의 강력한 바탕 역할을 합니다.

그 후에 성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완정한 칭의의 은혜를 받았다.

라일 감독이 지적했듯이, ‘비록 하늘에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지상에 있는 신자보다 더 많이 의롭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칭의는 구원의 문으로 진입하는 은혜만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 과정을 힘차게 떠받치고 있는 영원한 은혜의 반석이다.

 

칼빈은 칭의론이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으로

왜곡될 위험성을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 이중적인 은혜이다. one grae yet two-fold grace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칭의와 성화가 우리 사고에서는 구별되었다는 말은

가톨릭도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가톨릭은 칭의가 무엇에 성화에 달려있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거룩함을 이루고, 열심히 착한 일을 하고, 열심히 잘 살아야

끝에 가서 칭의를 얻는다는 겁니다. (개신교의 입장과 다르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이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수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같이 가지만,

그러나 우리가 생각에서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가톨릭 같은 입장을 가지면 안 되니까요.

 

저와 여러분의 칭의가, 거룩함에 달려있다면,

우리가 칭의를 얻을 거룩함이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성화의 정도에 의해서, 칭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칭의를 얻었으면, 성화는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성화의 과정에 있다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나 성화)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또는 칭의 없는 성화를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바란다.

  *값싼  은혜, 결단주의에 의한 칭의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연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는 것과 같다.”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화의 출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먼저, 믿음의 출발지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럼, 성화는 어디서부터 출발됩니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는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데 있어서, 우리가 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화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역시 없습니다.

성화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큰 그림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진짜 우리가 할 일이 하나도 없나요?

그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즉각적 성화’ (큰 그림) 속에서

우리가 계속 지속적 성화주님이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가 거기에 순종하며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할 일이죠.

 

성화를 주제로 다루는 레위기에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2:32

 

주님이 성화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이 거룩을 이루어가시는데,

내가 할 일은, 그 주도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12:1

 

그래서 그 거룩을 주님이 완성하십니다.

 

살전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위 두 구절은, 거룩함을 주님이 이루시고, 주도적으로 완성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런 주님의 사역에 내어드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드리는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즉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 예배가 연속이 될 때, 우리의 성화는 지속되는 것입니다.

, 즉각적인 성화 이후로, 점진적인 성화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삶의 예배가 있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우리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회중 가운데, 하나님은 장막을 치시고, 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인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같이 살겠습니까.

우리가 거룩해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규례를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해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즉 구원받지 못합니다.)

레위기는, 우리가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구원얻은 사람은, 거룩함의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주도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흰옷입는 정결한 신부로 서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완성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