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5

너희도 나그네 였음이라

LNCK 2015. 12. 15. 19:23

너희도 나그네 였음이라               22:21-27                       15.12.13.출처

                                                                                             *원제목: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라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경제 지표들이 있습니다. 그중 곧잘 언급되는 것이 OECD 통계입니다.

30개국의 나라 안에 우리나라가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국력 신장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1위 내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지표들이 있는데

대부분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우리나라는 최장시간 노동 1위입니다.

이에 반하여 상대적으로 저임금 노동자가 많고 남녀 임금 차별도 1위입니다.

산재 사망률 또한 최고입니다.

 

자살률은 수년째 1위인데 그 중 노인층 자살이 높습니다.

이는 최고도에 달한 노인 빈곤률에서 기인합니다.

 

반면에 사회복지 지출 비율은 최하위입니다.

가계부채 비율이 높고 사교육 지출 비율은 최고입니다.

 

자영업자 비율이 높고 그로 인한 수익률은 매우 적습니다.

출산율은 최하위인데 경제적인 부담이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젊은 층 사이에서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일 정도로 취업난이 심각합니다.

있는 일자리도 비정규직 등 불량 일자리가 많습니다.

그래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라더니,

여기에 더하여 인간관계, 내 집 마련도 포기한다는 5포 세대란 말도 유행합니다.

 

실제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고통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이 경제적 약자인 젊은 층에게 쏟아지고 있는 양상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

 

성경 말씀은 성장 담론과 불평등 담론 중 불평등 문제에 손을 들어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는 가난한 자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돈도 땅도 권력도 도와줄 가족이나 친척도 없는 자들입니다.

가장 힘이 없고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고통으로 부르짖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돈을 빌렸다면 이자를 받지 말 것이고,

외투를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외투는 그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가난한 이들이 밤중에 덮고 잘 이불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은 매우 각별합니다.

그들이 억울함을 당하여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갚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의 소리에 민감하신 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이유는 폭력과 불의로 억울함을 당한 이들의 부르짖음 때문이었습니다.

 

18:20~21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이스라엘에 출애굽 역사가 일어났던 이유는, 그들이 노예로 고통 받으며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2:23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예수님의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가 죽자마자 천사들의 손에 들려 천국으로 인도되고,

힘없는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은 하늘의 보좌를 흔드는 소리입니다.

세상에서 그들은 짓밟힘을 당하고 그들의 탄식의 소리는 차단당하고 외면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르짖음은 하늘 지성소의 문을 열게 만드는 확성기입니다.

검사의 논고처럼 추상같은 소리로 하늘 법정을 울립니다.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바로 정의의 지표입니다.

이 지표가 한계치에 달하면 그 나라가 망합니다. 본문 출22:24절입니다.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선지자들은 바로 이 정의의 지표로 이스라엘을 평가했던 사람들입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보았던 환상 중에 하나님이 다림줄을 들고 서 있는 환상이 있습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7:7

 

다림줄은 집을 지을 때 수직을 잡아주는 도구입니다. 똑바로 세우지 않으면 기울어져 건물이 무너집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건물이 그렇게 기울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정의의 다림줄로 재어보니, 매우 기울어져 곧 넘어지게 생겼습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태도가 바로 이 정의의 다림줄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고발입니다.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2:8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7:4-6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1:21-24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이곳에 살게 하리니7:4-8

 

에스겔 선지자의 고발입니다.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 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7-9

 

구약에서는 우상숭배 문제 다음으로,

가난한 자나 정의와 관련된 말씀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16구절 중 한 구절 꼴로, 가난이나 물질, 정의와 관련된 구절들을 담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활발한 사회참여를 하고 있는 짐 월리스라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성경 속에서 가난한 자나 정의와 관련된 구절만 가위로 오려내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 결과 성경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이 성경을 들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오늘 미국 사회가 믿는 성경은 바로 이런 성경이라고.

 

하나님 말씀의 중요한 부분인 정의를 생략한 채 개인경건에 치중해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성경의 모습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경제적 불평등과 착취에 대해서 끊임없이 언급하고 비판합니다.

그가 막시스트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가난한 자의 문제나 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가 불평등에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빈부격차를 키울 뿐이다.

불평등과 맞서 싸워라.”고 외칩니다.

 

지난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했던 교황의 강론 중 일부입니다.

“...이 나라의 교회가 한국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하느님 나라의 누룩으로 더욱 충만히 부풀어 오르게 도와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정신적 쇄신을 가져오는 풍성한 힘이 되기를 빕니다.

 

그들이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형상을 경시하고,

모든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기를 빕니다...”

 

우리 사회는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1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약속의 땅에서는 그런 소외나 학대가 없는 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민족 공동체입니다. 민족 공동체는 단지 한 혈통이라는 점에만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함께 겪으며 한 가족으로 한 공동체로 성장합니다.

 

근세사에서 우리 민족은 봉건적 억압, 제국주의 수탈과 식민지, 전쟁, 가난이라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고난의 경험이 우리를 한 민족 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안에 다시 억압과 학대와 차별의 역사를 반복하겠다고요?

배고픈 것은 좀 참을 수 있어도 배 아픈 것은 견디기 힘듭니다.

 

우리 사회의 무한 경쟁과 이기주의와 불평등과 정치권의 편 가르기가

이 민족 공동체성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민족 공동체성이 상실된 민족에게 생존이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민족 공동체성의 회복이 우리에게 매우 시급한 과제입니다.

이 민족 공동체성의 바탕 위에서만 경제 성장이나 복지나 남북통일의 비전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자를 받지 말라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 간에는 이자를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노예가 되거나 영구적인 가난에 빠지는 이유는 빚 때문입니다.

 

빚은 과중한 이자 부담 때문에 무섭습니다. 이스라엘은 형제 공동체입니다.

이런 불평등 사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자를 원천적으로 금지했습니다.

 

   당시 고대 메소포타미아 누지 문서에 의하면 그 이자율이 50%에 달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곡식에 대해서는 33.3%, 은은 20-25%의 이자를 내야 했습니다.

   빚을 못 갚으면 노예가 되거나 감옥에 가게 됩니다.

 

이자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네쉐크인데 어원이 나솨크’(물어뜯다)에서 왔을 정도입니다.

랍비 라쉬는 이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뱀이 무는 것과 흡사하다... 처음에는 발에 난 작은 상처를 못느끼지만 일단 부어오르면

머리끝까지 온 몸이 다 붓게 된다. 이자란 그런 것이다.”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이자에 대해서 금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6:35

 

하나님 말씀을 따라 초대교회와 중세 시대의 교회는 고리대금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고리대금업자는 지하 7층에 떨어져 고통을 당합니다.

 

교회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절도라 하였고

십계명의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는 행위라 규정하였습니다.

 

고리 대금업은 자궁 속의 아이를 살해하고, 젊은이의 구애를 가로막고, 침대에 중풍을 가져오고,

젊은 신부와 그녀의 신랑 사이에 드러눕는다.”고 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 돈은 교환을 위해 발명된 것이다.

빌려준 돈을 사용한 데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리대금업은 배척을 받았고 당시 소외당하던 유태인들의 주된 돈벌이 사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동족이 아니면 이자 놀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교회도 이자를 허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이자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금지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을 위한 제한적인 수준의 이자는 인정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은 자신이 가진 재물이나 직업을 활용하는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소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화폐를 통한 부의 축적이 오히려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현대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입니다. 돈 놀이를 하는 금융이 전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소유주들은 대부분 이들 은행들입니다. 은행을 떠나서는 어떤 산업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은행이란 것이 가난한 자를 돕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인색하고 부자에게 더 많은 것을 줍니다.

가난한 자들의 돈을 끌어 모아 자기들 부의 축적 수단으로 삼습니다.

 

지난 몇 년 전에는 이를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미국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라는 시위를 수개월 동안 벌인 적이 있습니다.

 

은행은 이처럼 불평등 양산의 주범이 될 수밖에 없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은 이런 흐름에 반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은행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소액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무담보 무보증으로 대출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여성들이 그 주요 고객이었습니다.

그 혜택을 보았던 780만 빈곤층 중 60%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상환율도 98%에 달했습니다.

은행은 1,200개에 달하는 지점으로 확대되었 대출 총액도 3조원 대를 넘었습니다.

 

이런 공로로 2006년도에 노벨 평화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라민 은행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98% 상환이란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쉽지 않고

이런 상환율에 이르기 위해서는 몰인정한 짓도 많이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법칙에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을 경제에 실현해 보려는 한 시도로

긍정적으로 봐줄 수 있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문제는, 신앙인들 간에도 참 곤란한 문제입니다.

가난해서 빌리는 돈은 빌려 줄 수는 있겠지만 요즘 대부분의 돈거래는 사업상의 이유로 발생합니다.

떼어 먹고 싶어서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돈을 꾸인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면 부득이하게 그 고통을 떠안아야 합니다.

 

친한 사이에 그리 크지 않은 액수라면 이자를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자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이자를 받지 않고 주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돈에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게 쓰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거나 도우라는 데 있지, 사업가를 도우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 경우를 판단하여 지혜롭게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채권과 채무 관계가 있습니다.

 

죄가 빚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 빚에 대한 이자도 받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빚도 탕감해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 기도합니다.

여기서 죄가 바로 빚입니다. 영어는 debt, debtor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다 수 백 억원의 채무에서 구제된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1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신 분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나 사랑은, 바로 우리가 용서받은 채무에 대한 감사로부터 나옵니다.

평생 빚을 갚아야 하는 인생은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빚을 일시에 탕감해주셨습니다.

이 은혜로 살아가고 이 은혜에 힘입어, 이웃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분류 없음 >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슬람 선교 현상과 접근 전략   (0) 2015.12.17
바울의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 설교  (0) 2015.12.16
바울의 아라비아의 시간  (0) 2015.12.14
별을 그리는 마음으로   (0) 2015.12.12
이중사명  (0) 2015.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