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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라비아의 시간

LNCK 2015. 12. 14. 11:13

바울의 아라비아의 시간                        갈1:10~19                15.11.01. 출처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17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얘기를 한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안 갔다고 굳이 밝힌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 얘기를 안 하면 될 터인데 안 간 것을 구태여 밝힐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문장 자체는, 그저 일상의 행로를 담아낸 표현처럼 보여지는데,

이것이 그렇게 일상의 한 사람의 일기 식으로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 

이들은 12사도들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예수님에 의해 파송되고,

예수님의 공생애와 부활을 목격한 분들입니다.

 

이것은 사도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기준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설명하는데,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사실 뒤집어보면 뭘 강조하고 싶은 것인지 추측하면 나도 사도이다는 말입니다.

 

비록 8달 반 만에 난 자와 같은 만삭되지 못한 자에게서 난,

저 끝에 붙어 있는 말째 사도인 것은 맞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사도이다그래서 표현을,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 문장 속에는 자신의 사도직이, 다른 데서 직임을 얻어온 사도가 아니라,

그 예루살렘에 있는 정통 사도들의 맥락에서, 내 직임도이해를 해 달라는 말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지금 예루살렘에는 그 선배 사도들이 있습니다. ‘안 간 것을 왜 굳이 밝혔을까요?

보통은 안 간 것은,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사도된 것은, 그 선배 사도들의 직분을 계승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전통을 이은 것이 아니고,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거듭난 이후에 예루살렘에 간 적이 없다라고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복음과 사도직은, 누구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된 것입니까?

,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야 사도바울의 사도직이 정당성을 얻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내 사도직은 예루살렘 선배 사도들에게서 계승되거나, 전통으로 이어받은 사도직이 아니다.

나는 다메섹 길에서 초자연적인 계시 속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이 직분을 받았고,

부활의 주님께서 직접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고, 그 주님이 나를, 이방 땅을 향해서 직접 파송하셨다.’

 

그 얘기를 담아서 하는 겁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라는 구절에서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7

 

이 부분이 굉장히 난제입니다.

저도 한 때는 아라비아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거듭난 이후에, 아라비아 광야에 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과 유일하게 계시를 받으면서,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깊은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본격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서, 3년간 여기서 수련을 쌓았다. 마치 광야의 모세나 엘리야처럼.’

 

이 논리는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피차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나, 많은 목회자들이 히든 타임이런 표현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자 그런데 이번에 갈라디아서 강해를 준비하면서, 이 부분을 제대로 연구해 본 결과,

바울의 아라비아의 3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얻게 되었습니다.

 

1) 기존의 견해(히든타임 3년 설), 성경 본문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바울은 사흘간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다시 보게 됩니다.

세례도 받고, 음식도 먹고, 강건해 집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지냅니다. :19

 

행9:20절을 자세히 보시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0

바울은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다시 보게 되면서,

즉시로 다메섹 도성 안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모여 있던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거듭나고 나서,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지냈다는

기존 이론과는 충돌이 됩니다.

 

2) 또 하나의 충돌이 있습니다.

 

행9: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3절에, 여러 날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다메섹에서 여러 날이 지났다는데, (아라비아에서 3년 지냈다는 이론과 비교 요) 

여러 날이라는 표현은 번역상 무리가 있어요.

원문에 더 가깝게 번역하면, ‘여러 날보다는 많은 날(이 지났다)’는 번역이 더 맞습니다.

 

그러면 원문으로 많은 날이 지났다고 할 때, 이 표현은 히브리인들의 관용법인데,

최소한 3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구약에도 그런 비슷한 용례가 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따라서 적어도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3년쯤 지냈다는 얘기입니다.

그동안 복음을 전파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것도 즉시로' 3년 쯤 지낸 것입니다.   *눈을 뜬 즉시로 행9:10

 

, 그러면 사도바울이 아라비아에는 가지 않았는가요?

 

1:17b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러면 최소한 다메섹에서 3년을 머물렀다는 얘기입니다.

왜냐면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3년 만에.'

자 그러면 왜 사도바울이 자꾸 아라비아에 3년 있었다는 오해가 가능했을까요?

고후11:32~33절 때문입니다.

 

32.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사도행전의 기록과 똑같은 사건을 다시 설명했는데,

사도행전에는 설명하지 않았던 아레다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아레다 왕은, 당시 나비티아 왕국의, '아레다 왕 4세' 입니다.

   나비티아 왕국은, 바로 이 다메섹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왕국입니다.

   그 왕국을, 유대학자 요세푸스는, ‘아라비아 지역 또는 아라비아 사람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다메섹) 지역이 다 아라비아 지역에 포함됩니다.

 

   더군다나 로마 제국 하에 로마 사람들은, 이 지역을 똑같은 표현으로

   아라비아 지역 또는 아라비아 사람으로 기록했어요.

 

자 그러면, 아라비아가 어디서 어디까지 입니까?

어마어마하게 넓었다는 말입니다. (다메섹+아라비아 반도)

 

이해하기 쉽게 우리나라 지도와 비교해서 생각하면

서울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즉 만주까지, 심양까지 달려갔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공문을 받아서

   저 북쪽 만주 땅에 있는 교회를 잔멸하고,

   거기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기 위해서 열심을 내서 쫓아갔습니다.

   바울은 왜 그렇게 열심이었을까요?

 

   여러분, 바울은 당대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율법학자였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입니다. 거기에서도 대표격인 인물입니다.

   자 그런데, 적어도 그가 가르치고, 그가 알고 있는 성경의 율법 신명기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것도 누추하고 가난한 나사렛 동네에, 촌스러운 청년 하나가 돌아다니더니,

   일단의 무리를 모아서 강연을 하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는데

   엄청난 인파가 그를 추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그를, 조상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로 떠받드는 겁니다.

   어떻게 율법을 알고 있는 학자로서,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무에 달려 죽은 저주 받은 자아닙니까.

 

   절대 나무에 달려 죽은 자가 메시야 일 수 없다는 율법적 열심 때문에,

   그는 저 신의주, 심양 북방 변경 (다메섹) 지역까지 달려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언덕에서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계시 속에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바울에게 직접 해석해 주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단 시간내 짧은 교훈이었지만, 사도바울은 분명 그리스도께서 배움을 입은 사람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얼마나 놀랐을까요? 자기가 그렇게 핍박하고 진멸시키려 했던 그 대상이

   나사렛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르치고 오리라 예언되었던 그 그리스도요,

   그 메시야일줄이야 꿈에도 상상했겠습니까.

 

   그의 인식 세계속에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나사렛 예수와 만남이 이루어지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바울이 두 번째 물었던 질문은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해야 옳습니까?’

너는 내가 이방을 위해서 택한 내 그릇이라

 

그러자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아라비아는 굉장히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데요,

 

여러분, 중국 땅이 얼마나 넓은지 아시죠?

중국 북쪽에는 어마어마한 (고비,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거기도 중국입니다.

가장 가까운 천진, 심양도 다 중국입니다.

 

이와 같이 다메섹 지역은, 아레다 왕의 실명으로 확인된 바로는,

그 당시 이 지역을 전부 아라비아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다메섹 지역인 아라비아에서,

그는 3년 가까운 시간을 복음 전파를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아라비아 반도에 전혀 안 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3년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기껏해야 50일 이내로,

이동 거리를 감안할 때, 거기에 머물렀던 시간은, 추정하면 넉넉히 50일 남짓입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3년을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입장에서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열심히 설명하는데, 결론은 두 가지 아니냐.

아라비아에서 3년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메섹에서 3년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아라비아에서 3년 준비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나,

다메섹에서 회심 직후 막바로 복음을 전한 것이나, 뭐가 그리 큰 차이냐?

둘 다 그게 그거다. 그걸 꼭 세밀하게 따질 필요가 뭐가 있을까?’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걸 꼭 분석하고, 그 차이를 밝힐 필요가 있을까요?

자 그런데,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감춰져 있습니다.

 

결국 아라비아에서 잠시 머물다가 돌아온 사도바울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다메섹 성에서 3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 지역은 지금 자기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와,

광주리를 타고 도망갈 지경까지 수많은 위험이 도사렸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다메섹 언덕에서 회개와 부르심이

동시에 내면에서 경험되어진 독특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각적으로9:20

그 성에서 순종했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 어둠의 땅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땅에,

죽어가는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의 부르심속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좀 준비를 하고 복음 전파 해야지, 사람이 어떻게 180도 바뀔 수 있을까?

그 다음날 즉시 전도가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끔 신학교에서 탈북학생들을 만납니다.

이분들이 특별전형으로 신학교에 들어옵니다. 이들이 이런 얘기를 한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남한에 내려와서 보니까,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보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이 성경이 하나님 말고, 김일성/김정일 부자 이름만 바꿔 놓으면, 완전히 주체사상이 됩니다.

반대로 주체사상도 김일성/김정일만 빼고, 하나님만 대입시키면, 바로 성경이 될 것입니다.

주체사상이 성경에서 흉내를 많이 낸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들이 신앙을 한 번 경험하고, 예수를 영접하니까

성경이 더 빨리 이해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즉시 다메섹 성에서 하나님의 화급한 마음을 대신하여,

그 수많은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패턴을 잘 보십시오. 이상하게 1, 2, 3차 여행을 쭈욱 연구해 보면,

   사도바울이 계속 쫓겨다니고 떠밀려 다닙니다. 뭔가 쫓기듯이 그렇게 도망 다닙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설립되고, 복음이 전파됩니다.

   사실은 그것이 사도바울의 기질이나 사역의 패턴보다도 더 높은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때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자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들춰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에서 아주 인식이 낮습니다. 비호감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제 복음도 미덕을 가져야 되고, 교양을 갖춰야 됩니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제가 동의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미덕과 교양보다 더 높은 가치는,

이 지구촌을 향하여 들끓고 있는 구원 받지 못한,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지역과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화급한 마음의 시선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어느 가치보다도 더 우선하는 성경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행16장에, 사도바울은 북쪽 아시아 쪽으로 복음전파가 잘 되고,

가는 곳마다 숫자도 늘어나니까, 자기 사역을 내려놓지 않고

그 쪽으로 계속 유대인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아시아에서 밀어 부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계속 그 길을 막으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이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

 

그 환상을 보고서야 사도바울은 깜짝 놀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게도냐로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로라.’

그날 밤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 빌립보에 도착하는데,

이게 뱃길로는 닷새 길입니다. *20;6

 

5일이 걸려야 도착하는 거리인데, 그날 밤에 출발한 배가 이틀만에 도착합니다. *16:11~12

 

여러분, 당시에 모터가 있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쾌속선처럼 밀어붙이신 것입니다.

닷새 길을 이틀 만에 도착케 하십니다.

이게 바로 그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입니다.

 

사도행전 이야기가 전부 그런 하나님의 온 세상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다급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오늘 사도바울이 결국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메섹에서 3년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즉시로 각 회당에서9:20

수많은 위협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판 놓고 계산하지 않고,

그 부르심에 순종한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광주리를 타고, 성벽에서 탈출해서 도망갑니다.

그리고 돌아와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즉 그 말은, 그 지역에서 3년 가까운 시간을, 그 복음의 부름 앞에 순종해서

하나님 앞에 복음을 전파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겨울 두 달, 여름 두 달, 1년에 넉달 선교하는 교회이고,

   엄청난 재정을 투자하고, 우리 청년들이 자비량해서 헌신을 다해서 선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1년에 넉달만 아니라, 112, 365, 더 확대해서,

   이 지구 곳곳에서 복음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 죽어가는, 그 어둠의 땅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눈물을 뚝뚝 흘리시고 계신 그 비통의 땅을 향해서,

   이 시대의 교회가 어떤 험악한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 화급한 하나님의 마음에 눈을 떠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떠나야 하고, 우리 모든 대한민국의 교회가

   이제 땅끝까지 가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 복음의 본질 앞에 새롭게 눈을 뜰 때,

   우리는 썩고 부패할 여지가 없어지는 겁니다.

 

   흐르지 않으니까 썩는 것입니다. 고여있고, 순환되지 않으니까, 모여 있으니까 썩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화급한 마음에 순종하여, 땅 끝까지 복음의 횃불을 들고 가야 합니다.

 

   미덕과 교양을 갖춘 채, 그러나 그것을 초월해서 복음의 전령자(딤후1:11)들이 될 수 있는 교회와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