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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소명

LNCK 2016. 2. 14. 09:48

◈그리스도인의 소명        렘1:4~10          16.01.31.설교스크랩, 출처



▲고든 맥도널드가 쓴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책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자기 내면세계가 정돈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언제나 쫓겨다니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자기 내면세계가 잘 정돈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언제나 일에 쫓겨다니는 사람에게는,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늘 일을 하되, 성취감, 성취함으로 만족함을 얻고자 합니다.

-이 사람은, 물질에 집착합니다.

-이 사람은, 지나치게 바쁩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부름(소명)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인데요,

 

소명, 즉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 그 직업적 부르심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죠.

어떤 직업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각자 주신 그 소명(부르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성취감과 만족감과 행복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소명 받은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임한 소명


성경에는 소명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나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

 

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예레미야가 소명의식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그의 아버지가 힐기야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제사장은 대대로 세습을 하던 시대이어서

예레미야는 자연스럽게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제사장의 자리가 아닌

선지자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에스겔 역시 제사장이며, 선지자였습니다.

 

▲이 부르심 앞에 예레미야는 처음에 사양합니다.

  

1: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라고 응답합니다.

이 말이 맞을까요?

 

,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당시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게 될 때 나이가 20세 이전입니다.

아직 장성하지 못하고, 가정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고요,


지금 우리나라에도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야 '어른' 취급을 받습니다.

결혼을 하지 못하면, 아직 '아이'라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당시 18~19세니까, '나는 아이라'는 자기 고백은 맞는 말입니다.

또한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라고 고백했는데,

'나는 아직 사리 판단이 부족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신 것은,

자기 집안을 향하여 부르신 것이 아니라,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그 나라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될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을 때도, 비슷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면서, 호렙산으로 양떼들을 몰고 갈 때

   떨기나무에 불꽃이 붙었는데, 그 나무가 사그라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가까이 가려고 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러면서 모세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백성의 곤고를 알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내가 듣고 더 이상 이제는 기다릴 수 없다.

   내 백성을 너를 통하여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이 부르심 앞에 모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리이까'

   한 마디로, 모세도 하나님의 부름 앞에 '저는 못 합니다.' 이런 고백이었습니다.

 

,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설득시키십니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나는 아이라,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이렇게 고백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라.

무슨 명령을 하던지, 너는 가서 말하라. 왜냐면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위험에서) 구원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에게 예언자로서의 표징을 주십니다.

1: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표징으로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너는 그런 걱정 마라. 네가 해야 할 말을, 내가 네 입에 두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천사가 나아가 그의 입술에 핀 숯을 갖다 댑니다.

   '네 죄가 사하여 졌다비슷한 입술의 체험이죠? *말씀을 대언할 입술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레미야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메신저라는 것을, 예레미야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해야할 일을, 10절에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1: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네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네가 그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그리고 그들을 다시 건설하고 심고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네가 할 일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레미야를 구체적으로 부르시고, 그가 해야할 일들을 일러 주셨습니다.


   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던 소명,

   이것은 예레미야에게만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소명이 있습니다.



◑크리스천 각자도 소명 받은 사람


우리 가운데, 소명 하면 그건 목회자나 아니면 특별한 직업 그야말로

박사, 판사, 검사, 의사, 교수, 회장 이런 고위직에나 해당되는거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슨 소명?

그런 얘기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나 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모든 죄악을 씻어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다가, 세상 끝나는 날 천국에 와서 나와 함께 누리라고

그것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이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기 예레미야가 '나는 아이입니다. 나는 말할 줄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너는 걱정하지 마라, 너는 네가 시키는 곳에 가서, 내가 전하라는 말을 대언하면 돼!'

이렇게 강권적으로 그를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그에게 준비해 놓으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소명 받은 크리스천의 3가지 자의식          하이라이트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3가지를 벌써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짓기 전에 우리를 아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5

 

나는 너의 세포가 형성되기 전에 너를 알았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너를 이렇게 아셨다는 얘기입니다.

 

지적으로 알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언제 태어날 것인지, 그리고 내가 언제 죽을 것인지, 그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이 하와를 알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다.'는 말씀이 있죠?

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이렇게 '알다'는 말은, 체험해서 안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라는 말씀은, '내가 너를 영원전부터 깊이 사랑했어!' 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미리 아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정입니다.

또한 아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은 "미리 아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깊이 사랑하신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예레미야만 아니라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보면,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존감이 낮은 분들이 있습니다.


뭐 십대 때 사춘기에 그 때를 전후해서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나이가 들고, 신앙생활을 그만큼 했으면 좀 거기서 벗어나야 되는데,

계속해서 자존감이 낮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아셨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수록, 나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렇죠?


   저는 작년에 90이 넘으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후에 좀 허전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만 그런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더라고요. 연세가 70이나 되셨는데도,

   자기 부모님이 떠나신 후로 마음이 허전하다고.. 왜 그렇습니까?


   자기를 지지해주던, 자기를 알아주던 그 분이 떠났다는 것,

   여러분, 사람은 있다가 떠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나를 지지해주고,

   그런 것도 힘이 되는데,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다는 것,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 중의 복입니다.


   네 맞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자꾸 이렇게 작아집니다. ,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자신이 있습니다.


▲2. 또 그 하나님은, 우리를 짓기 전에 구별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5b절에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성별했다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일차적이며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내가 쓰임 받도록 구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성별하셨습니다. 원어로 완료형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쓰임 받기에 합당한 그런 자리로 성별/구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짓기 전에 우리를 세워주셨습니다.

5b절에 '너를 여러 나라에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세워주셨다는 말은, 원어에 '직업을 임명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열방의 선지자로

지금 그 자리로 이렇게 임명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름대로 세우신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그 자리를, 목회자나 선교사나 어떤 특수직에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줄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몸의 지체의 각 부분은 모두 소중합니다. 소중하지 않은 것은 한 부분도 없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직업은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고, 하나님이 임명해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 즉 '직업소명설'을 그는 주장했습니다.

   직업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 자리란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내가 정말 바르게 그 자리를 찾았는가, 그 소명대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기도하며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기가 못다한 일을, 아이를 통해서 이루려고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예비해 놓으신 계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음악으로, 또 연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예능으로,

또 어떤 아이는 과학을 좋아하고, 또 사업을 좋아하고 경제에 밝은 아이들은 그 쪽으로,

이렇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 각자에게 갈 길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이 없는데, 그 일을 억지로 하려면, 참 기쁨이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인생에 좌절이 언제 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 놓으신 그 길을 거부할 때, 소명을 거부하고 엉뚱한 길로 갈 때 옵니다.

 

139편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139: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가야할 곳을, 주의 책에 기록해 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으니,

그 부르심을 찾아 확인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사도바울도 갈라디아 사람들이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자기를 어머니 태에서부터 정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동일하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철학가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냥 던져졌다고

인간을 가리켜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성경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목적없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부모가 어쩌다가 사랑해서, 그 열매로 그냥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전부터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별하시고,

우리를 이렇게 쓰시려고, 바로 우리를 구별하셨다고 했습니다.


   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로 연봉만 따집니다. 뚜렷한 직업의식, 소명의식, 목적의식이 없습니다.

   내 봉급이 얼마인지.. 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그것을 찾고 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3.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일을 찾으십시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에베소 교우들을 향하여 보낸 편지 가운데서,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루시기 원하는 일을,

여러분들이 알기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두 가지 고백을 합니다.

   -첫 번째는 '주여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또 한가지는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내 인생,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비록 이렇게 연봉이 많지 않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한 분이 바로 그 길을 찾아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옛날보다 연봉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그 분만의 고백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연봉을 많이 받는다 할지라도, 나를 부르신 그 길이 아니라면, 거기에 만족이 없습니다.

공허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기도하며,

또 말씀 가운데 주의 인도함을 구하는 삶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 소명이란 것은, 가정에서도 그렇고, 또 일터에서도 그렇고, 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을 쓴 로렌스 형제,

그는 55세의 나이에 수도사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봉쇄수도원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수도원의 주방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그 곳을 거쳐서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기 원합니다.

그런데 로렌스 형제는, 그 주방 일을 하면서, ',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심령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그 모든 일을 감당하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구나.'


그래서 그의 경건한 삶의 모습을 일기로 쓴 것이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입니다.


   아니, 로렌스 형제 뿐만 아니라, 어떤 주부는 자기 집 주방 위에다가

   '나는 이곳에서 하루에 세 차례씩 신령한 봉사를 한다' 그 글귀를 써 놓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 주방에서 무슨 신령한 봉사를 하겠습니까?

   '내가 어쩌다가 이 신세를 면하지?' 이럴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부르셨다는 그 확신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것은 가정 주방 뿐만이 아닙니다.


어느 분이 이렇게 거리를 청소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늘 그의 얼굴에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기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기쁘죠?


그때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동네 골목을 쓸고 있어서 행복하다' 이렇게 답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어서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기쁜지요.'


똑같은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생각하는게 다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사역도 소명을 따라 하는 사람과, 그냥 마지 못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직분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사실 누군가가 이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시험에 든다든지,

아니면 불평불만의 자리에 이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부르셨지 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자기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관계없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해 나갑니다.

 

우리 교역자 가운데 한 분이, 이번 주간에 가족들과 함께 경남 마산에 내려갔다가

손양원 목사님의 생가(칠원)와, 주기철 목사님의 생가(진주)를 방문했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생가에 갔을 때, 사전에 설명해 달라는 그런 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다섯 식구가 가서 이렇게 쭈욱 돌아보는데, 안에서 관계자가 나오는지

하나 하나 일일이 설명해 주는데, 참 가슴에 와 닿았다고 얘길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주기철 목사님 생가에 갔더니,

거기는 손양원 목사님 생가보다 훨씬 잘 꾸며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안내하는 자원봉사자가 열심히 했지만,

그의 설명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소명을 따라서 일하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것과

그냥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니까.. 하면서 일하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 각자를 부르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나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나는 아직 어립니다.' 이렇게 자신 없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하여

'너는 내가 명하는 곳에 가서, 내가 말하려는 것을 대언하라'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별하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예비해놓으신 자리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묻고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부르심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오.


비록 앞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1:7~8

 

나는 무엇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자신들을 돌아보십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지, 아니면 이것이 인생이거니 하면서 체념하며 되는대로 살아가는지..

나는 정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기쁨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다.


아니면 나는 마지 못해서, 이거 안 하면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하고 있는지..

자기를 돌아보십시다.

 

오늘 이 시간 기도하면서, 하나님, 바울처럼,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앞에서 물어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 내가 말씀을 가까이 할 때마다,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십시오.

내가 주의 길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이제 내가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을 생각 하며 잠시 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일에 되는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 각자에게 부르신 그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그런데 답답합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알게 하여 주옵소서. 보게 하옵소서. 듣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에 감동으로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로 부르셨다는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있기 원한다는 이 고백의 주인공이 되도록,

주님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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