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 - 믿음의 두 가지 반응 - YouTube
◈믿음의 두 가지 반응 약5:13 16.02.14설교스크랩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인생은 반응입니다. Response!
어떻게 반응하느냐, 반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일어난 사건보다,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이 일어난 사건보다 더 중요합니다.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우리 인생을 바꿉니다.
특별히 두 가지 반응이 있죠. 하나는 긍정적인 반응이고, 하나는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게 아닙니다.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반응이 어떤 것이냐, 그것을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반응을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인생의 태도, 또 우리 삶의 어떤 원리, 이런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 우리의 삶의 반응입니다.
지금 실패해도, 바른 반응을 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면, 반드시 다시 일어나는 거죠.
그러나 지금 성공했다 할지라도, 바른 반응과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인생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인 약5:13절 한구절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아주 짧은 구절이고, 너무 쉬운 내용입니다. 더 자세히 설교할 게 없습니다.
고난 당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할 때는, 찬송하라는 명령입니다.
좋은 날이 올 때, 형통할 때는 찬송하고, 어려울 때는 기도하고,
힘들면 기도하면 되고, 좋은 날이 오면,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자, 야고보는 질문을 먼저 던집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질문을 먼저 던지고,
그 다음에 답을 내립니다. '기도하라' 스스로 진단을 하고, 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명의는 처방을 잘 내립니다.
야고보는, 마치 명의처럼 아주 분명한 처방을 지금 내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공식과도 같은 지침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새가족공부 교안의 질의응답과 같은 아주 쉬운 말씀입니다.
▲자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정리하면서, 믿음으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자, 이 질문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은, '예, 있고 말고요'
주일 낮 예배는 잘 모르지만, 철야기도 때 나오는 분들을 보면,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은, 철야기도에 나오기 힘듭니다.
그 깊은 밤에, 잠 안자고 기도하러 나오기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또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오시는 것을 보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 삶에 늘 따라다니는 단골메뉴입니다.
그런데 고난에 대한 처방은 간단합니다. 그는 기도할 것이요!
자 우리는 너무 뻔한 대답을 듣고 있습니다. 기도하라!, 뻔한 대답 아닌가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랬으면 뭔가 확실한 비법 한 방을 알려줘야지,
단순하게 기도하라! 그러면 어떤 분들은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목회자에게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한참 얘기를 하다가, 나중에 목회자가 하는 말이 뭐냐면 '기도하십시다!'
뭔가 기대를 하고 왔는데, 기도하자고 그러니까, 싱거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 얘기 들으려고 왔나?'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해결해 줄 비법을 우리는 찾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우리에게 다른 비법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는 단순한 원칙을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일어날 때, 우리의 반응이 참 중요합니다. 반응!
고난을 당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합니다.
막 저주가 쏟아지고, 입술에서 원망과 불평이 막 터지기 시작합니다.
분노가 가득 찹니다. 걸리기만 하면, 어떻게 해 버리겠다고 험담을 막 쏟아냅니다.
남 탓을 하거나, 환경 탓을 하거나, 조상 탓을 합니다. 은수저 금수저 얘기도 하고요,
'내가 흙수저를 물고 나와서 이렇구나' 하고 스스로 한탄하기도 합니다.
감정이 굉장히 힘들어지는 거죠. 침통해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기 입을 닫아 버리죠.
분노가 가득 찬 상태 속에서, 침묵하는 거죠.
여러분, 세상에는 한 번의 고난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고난은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당장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당장 이 고난의 문제가 딱 제거되어버리면 좋을 것 같지만,
그 고난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또 다른 고난의 파도가 밀려오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고난 자체가 한 번 해결되는 것보다, 고난에 대한 바른 태도를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고난은 반갑지 않지만, 고난을 잘 다루기만 하면,
사실 고난이 그렇게 나쁜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배웁니다.
믿음 생활을 상당히 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리고 성경에서 수없이 말씀하는 것 중에 하나가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훨씬 더 많습니다. 고난 자체는 밉고 달갑지 않지만,
그 고난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 엄청난 것이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그 고난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고난에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난 그 자체보다, 반응을 잘못 함으로써, 자기 삶이 더 꼬이고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 오늘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야고보가, 고난에는 기도라고 하는 간단하고 분명한 등식을 제시하고 있는 이유는,
고난을 이기는 가장 분명한 길은, 기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 고난의 상황에 빠지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난이란 무게에 끙끙 짓눌려서 신음하고 자포자기 해 버립니다.
▲사가들의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이 기도생활을 했기 때문에, 야고보는 낙타무릎과 같이 변했다는 겁니다.
등이 굽고, 마치 낙타처럼! 시련의 세월을 지나온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이 시련과 고난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자신의 삶에 체득한 경험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면서,
고난을 당해 볼 때, 그 고난의 유일한 길은, 기도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고난... 기도할 것이요'는 너무 간단한 대답 같지만,
야고보의 자기 생애 속에 체득된 경험되어진, 농축된 깊은 진리가 담겨있는 비밀이 있는 답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로서, 고난의 질곡을 지나오면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마음에 담아
우리에게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이 안에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들어 있는 것이죠.
본문 뒷 구절에는, 기도의 사람 엘리야가 나옵니다.
야고보는 사실, 야고보서의 마지막은 기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결론이 기도입니다.
마지막에 엘리야 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엘리야 하면 구약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기도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이 닫혀버리고 3년반 동안 하늘이 말라버린 그 땅을 열기 위해서,
기도로 땅에 비가 오게 했습니다.
엘리야 역시 고난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희대의 악한 왕 아합 아래에서 고난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기도로 돌파해 낸 인물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여러분,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힘을 벗어난 사건과 환경입니다.
왜 고난입니까? 인간의 힘으로 컨트롤 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괜히 해결하려고 하면, 더 큰 재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에 대해, 야고보는 '기도하라'
사실 여러분, 고난은 하나님의 러브콜입니다.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기회입니다.
고난의 때에 대걔 기도를 배웁니다.
대걔 자기가 기도하고 싶어서 기도를 배웠고, 기도의 경지로 나아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할 수 없이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기도하다가,기도를배우게 되는 거죠.
깊이 기도를 배운 사람은, 고난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동의할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은, 기도학교에 수시입학 하게 합니다.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고, 고난을 가장 조용히 해결하는 길이 기도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밀어닥친 풍랑에 쓰러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고난 때문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 기도 없이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쓰러진 것입니다.
그 고난을 자기 맨몸으로 맞아 버렸기 때문에, 무너진 것입니다.
▲자연과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깊은 곳에서 자라는 한 해조류를 조사했는데,
그 해조류의 줄기는 두께 1인치 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해안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나온 파도에도 버텨 낸다고 합니다.
이 연약해 보이는 해양식물이,
그런 엄청난 파도가 밀어닥치는데도 견뎌 내는 비결이 도대체 무엇인지 연구해 보니,
바다 밑바닥에 있는 바위들에 견고하게 붙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윗돌에 견고하게 붙어 있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밀어닥치는 파도에도 살아남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부서뜨릴 것 같은 파도는, 지금도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건강의 문제, 한 가장의 갑작스런 건강의 문제, 한 가정에 밀어닥친 큰 파도죠.
재정적인 파산이 몰려오고, 가족관계의 위기가 찾아오고,
신앙에 따른 심각한 반대와 핍박에 몰리기도 하고, 우리 인생에 다양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파도의 크기, 혹은 세기 보다,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밀려닥치는 고난은 어느 것이라도 만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난은 만만한 고난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 순간 우리의 삶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은 것들은, 늘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디에 붙어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때에 내가 어디에 붙느냐의 싸움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 붙어라는 겁니다. 기도로요.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살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은 신비가 있는 거죠.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비밀입니다.
▲여러분, 고난속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이 고난의 순간에 대화할 파트너가 있어야 됩니다.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 고난에 함께 공감하고 함께 기도하고,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고, 길을 찾아나가는데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파트너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들은, 다 각자 자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내 고통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러분, 내가 너무 힘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위로를 좀 받으러 사람을 찾으러 갔다가
만나고 오면 속에서 불이 날 때가 있습니다. '괜히 만났다..'
여러분, 고난의 순간에 여러분이 경험하셨을 겁니다 사람은 도움이 안 됩니다. 아멘? 아멘!
고난의 순간에, 고통의 순간에, 인생에 풍랑이 일어날 때, 사람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안 됩니다. 여러분, 병에 걸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하고 있을 때, 옆에서 아내이든 남편이든 울고 그래도, 내 고통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겁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이 우주에서 유일한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도,
그 아들을 잃은 다른 엄마가 찾아왔는데도, 또 각자의 상황이 다른 겁니다.
독자의 죽음도 있고, 여러 형제의 죽음도 있고, 나이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고난의 유형은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도, 나를 온전히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내 고통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욥기서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를 도와주고자 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욥은 부자였을 때 많이 베풀었습니다. 늘 사람들을 먹이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고,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니까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몇몇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엘리바스, 소발, 빌닷 뭐 이런 친구들만 남았는데, 그 친구들이 하는 얘기들을 보면,
욥의 속을 확확 후벼 팝니다.
왜 그렇습니까?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욥을 도와줄 수 없는거죠.
훈수를 두는데 어설픈 훈수입니다.
▲고난 속에서 마침내 욥은 진정 국면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욥42장인데,
그런데 그렇게 성난 파도처럼 고난이 욥의 인생을 몰아치는 가운데
어느 순간에 파도가 잔잔해지기 시작하는데, 그 때가 하나님이 대화에 끼어드실 때입니다.
욥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대화를 거신 거죠. 욥과 하나님의 대화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문제가 서서히 풀려나가는 것을, 우리는 욥기서를 통해 보게 됩니다.
중요한 대목이죠. 고난에 대한 답은 세상에 그 누구도 해 줄 수 없어요.
그런데 고난 속에 우리의 유일한 대화 상대가 계시는데, 바로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평소에 기도가 그렇게 뭐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여러분의 인생에 고난을 당하면,
그 기도야 말로 하나님과의 대화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고난을 없애는 무기이기 보다는,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는 힘을 제공해 주죠.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이 고난을 하나님과 함께 통과하는 겁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기도를, 기계적인 등식으로 갖고 있습니다.
'구하면 주신다'는 등식에만 너무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모든 것이 즉시 응답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틀림 없지만, 기도의 응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은, 어떤 때는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기도는 즉각적 응답이기 보다는, 그 고난의 과정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게 응답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응답이 진짜 응답입니다. 왜냐면 우리 인생의 고난은 끊임없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문제만 해결되면 끝나는게 아니잖아요. 또 오니까!
우리 인생은 고난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험란한 곡예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 보다, 그 문제가 있을지라도, 또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고난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가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응답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기도하다 보면 기도가 잘 안 될 때가 있어요. 고난의 순간에, 기도가 잘 안 돼요.
경험해 보셨죠? 몸부림 치다보면 엎치락 뒤치락하고 기도도 안 되고,
어떤 한 순간 염려 반, 푸념 반 몸부림만 치는 거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기도하면서 아직도 염려가 있고, 고민이 남아있고 한숨을 쉬지만,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시간들을 가지다 보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느 순간에 염려가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오고, 담대해지고,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그 문제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축복과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것은, 고난의 순간에 기도할 때,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엎치락 뒤치락 하나님과 엎드려 그냥 끙끙거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믿음을 허락해 주시고, 감당할 능력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그래서 결국 이기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고난을 나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겪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영적으로 깊어지는 은혜를 입습니다.
기도를 붙들고 있다 보면, 고난은 감당할만한 것이 되고,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비밀입니다.
오늘 날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세상이 참 힘든게 사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많으니까 심방보고서들을 보면, 어려움을 당한 교인들이 많아요.
'참 세상이 힘들구나, 참 세상이 힘들구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의 질곡의 순간들을 바라보면,
혹독한 시련을 통과했을 때 비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도 좋은 때를 살고 있거든요.
과거를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고민과 염려와 어려움은, 시련이 아닙니다.
또 요즘 대학생들에게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어보면,
남자대학생들은 군대 가는 것, 그게 인생의 최고 시련이랍니다.
여자대학생들에게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어보면, 남자친구가 군대 가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전후 일제 강점기, 또한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과거에 비하면 고난도 아닌 게 너무 많아요.
우리 애들도 힘든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고난의 강도가 과거보다 더 강해져서 힘든 게 아니고,
믿음의 사람들도 보면 우리 안에 고난을 이겨낼 만한 믿음이 없는 거죠. 기도가 약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죽을 고비들을 맞이했지만, 기도로 맞서서 이겼던 사람들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런 유산을 갖고 있습니다.
시련의 그 폭풍이 몰아닥쳐도, 죽음의 위협이 와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승부를 걸었거든요.
야성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역시 낙타무릎이 될 정도로 기도로 승부를 걸었거든요.
여러분, 기도는 이론이 아닙니다. 기도는 책으로 공부해서 되는게 아닙니다.
기도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무릎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무릎으로 기도를 배우고, 그 기도의 깊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험한 신비가 있는 신자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된다는 부정적인 넉두리를 합니다.
'목사님,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던데요?' 제가 묻습니다.
'얼마나 기도하셨습니까?'
'목사님 몇 시간 기도를 해야 됩니까?'
여러분, 고난의 때가 오면, 시간은 잊어야 됩니다.
눈을 뜨면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너무 크면 눈을 뜰 수가 없어요,
만약 눈을 뜨면, 그 밀려오는 거대한 고난의 파도에 내가 밀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오니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눈을 떠야 됩니까?
눈을 떠도 괜찮을 때, 두려움이 사라질 때, 한 순간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담을 안고,
시간을 잊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승부를 걸려고 하는 믿음의 투지가 없이는
이 험난한 고난의 파도를 우리가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내가 구하는 문제가 해결되든지,
아니면 닥친 고난을 이겨낼 만한 담대함과 평안을 주실 때까지 기도해야 됩니다.
이렇게 여러분 오늘 야고보가 우리에게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기도할 것이요 라고 할 때
이 기도는 단순하게 한 번 기도하고 마는 요식적인 형식적인 종교적인 의례적인 기도를 말하고 있지 않고,
사투를 건, 생명을 건 믿음으로 정면승부를 거는 야성을 가진 투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문제가 아니고, 기도 없이 당하는 고난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최후의 무기이고, 최상의 방책입니다.
고난에 대한 최고의 능력은, 기도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시대를 막론하고 불변하는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계신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기도로 승리하는 이 비밀을 붙들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 지어다.
참 이것도 싱거운, 너무도 간단한, 단순한 답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즐거운 날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이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가장 많이 생각할 때가 언제입니까?
일이 잘 풀릴 때? 만사가 형통할 때? 아니면 고난의 때인가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때는 잘 풀릴 때가 아니고, 어려울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난의 때가 사실 믿음의 전성기입니다.
기독교의 전성기도, 고난의 때, 핍박의 때였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 가장 기독교가 찬란하게 빛났던 때는, 고난과 시련과 박해의 때였습니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화되고, 예수 믿기 너무 편한 시대가 되니까,
그때부터 기독교는 고꾸라졌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오면,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믿음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믿음이 더 자라게 됩니다.
여러분, 실패보다 번영의 순간이, 영적으로 훨씬 더 다루기 힘든 상태인 것은 사실입니다.
신자에게는 어려울 때보다 형통할 때가 더 다루기 힘듭니다.
환난과 시련속에서 이겨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편안함과 좋을 때를 이겨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자인 우리에게 진짜 적은, 고난이 아니고 평안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일제 강점기나 혹은 먹고 살기 어려웠던 과거보다, 더 어려운 것이 영적으로 사실입니다.
힘들 때는 하나님께 메달리고 울고 불고 기도하다가 은혜 받고 겸손해지고 믿음이 자랍니다.
그러나 인간은 배가 부르면, 하나님께 나아가기 보다는 딴 짓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좀 편안해지면, 하나님을 금방 잊어버리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신6: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 지난 날을 잊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그 백성들을 이끌어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이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신명기서의 전체 주제는 기억하라 remember입니다. 잊지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성이 가진 특성이 뭐냐면, 은혜를 잘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인의 특성입니다.
은혜를 잘 잊어버립니다. 배부름이 망각 증세를 심하게 합니다. 문제가 해결 되면 하나님을 안 찾는 거죠.
신앙은 기억력입니다. 은혜를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리마인드 하는 거죠.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지난 날 베풀어주시던 그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오늘 베풀어주신 은혜도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신명기서에서 그림처럼, 너희의 조상들이 그 험난한 세월속에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시고,
불기둥과 기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을 잊지 말고, 잊지 말라고 하셨지만,
여호수아서만 지나서 사사기에 오면, 2세대 만에 다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즐거움의 순간에 해야 할 것은, 찬송입니다.
찬송하라는 말의 의미는, 그냥 찬송을 한 두곡 부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호와를 잊지 말고,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뭐냐면 은혜를 계속 회생시키는 일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입술에 찬양이 끊어졌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력을 복원시켜야 됩니다.
그게 찬양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이 척척 잘 돌아갈 때는 찬양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뭔가 일이 잘 돌아가면, 내가 하나님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된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누구나 시작점에는 다 겸손합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한 날이 계속되면 변질됩니다. 우쭐거림이 일어나면서 자기를 찬송합니다.
자화자찬을 합니다. 자아도취에 빠집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생각보다 빨리 무너졌어요.
여러분 사울은 처음에는 아주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교만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잘나서 왕이 된 줄 아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의 관심이 자기에게로 향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거기에 견제세력인 다윗이 나타나니까 죽이려고 했습니다. 미쳐버린 것입니다.
이게 자아도취에 빠진 사울의 비극입니다.
여러분, 찬양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내가 교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찬양하지 않는다'가 중요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는 순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지 않는 순간,
우리는 교만의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위험스런 것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기치인 날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렇게 살기 위해서,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랑들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우리는 뭐가 잘 되면, 자기를 위해 축배를 들죠.
여러분, 진짜 신앙은 인생이 잘 나갈 때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알아요.
세상적으로 잘 풀리고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는데,
하나님께 겸손하게 엎드릴 줄 안다면, 그것은 좋은 믿음입니다.
형통과 번영의 순간에도 여전히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안다면,
그건 건강한 신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찬송할 지어다.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망각성에 대한 처방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신자의 영적상태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바로메타입니다.
찬양이 식어진다면, 영적으로 적신호가 켜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자신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는 뜻인 거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에게 이루어진 것에 더 마음이 빼앗기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앙의 특징은, 항상 그 입술에 찬송이 살아있습니다.
찬양이 그 입술에서 사라지지 않는 신앙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여러분, 인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오늘 이 야고보가 말씀하는 이 두 가지입니다.
힘들 때, 고난당할 때, 그리고 즐거워할 때, 형통할 때
기쁠 때와 슬플 때, 우리 인생은 이 두 가지입니다.
이 두가지 형태가 우리 삶에 다가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야고보가 우리에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응에 따라 우리 인생의 길은 갈라지게 되는 것이죠.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메시지는 쉽고도 분명합니다.
아주 분명한 처방이지만, 정작 그런 상황속에서 우리는 실수하기가 매우 쉽기 때문에,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이 선명한 기준을 우리 가슴 깊숙한 곳에 심어주기 원합니다.
기도와 찬양은, 우리의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이면서, 우리의 삶의 기본기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문제의 해결이고, 찬양은 행복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라,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 언제나 초점을 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우리 시선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겁니다.
신자에게 길은 하나입니다. 좋을 때도, 힘들 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라고 하는 교훈인 것입니다.
인생은 여기서 결정됩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기도와 찬양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삽니다. 만약에 그동안 이 기도와 찬양을 잃어버린 분들이 있다면,
그것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엎드리세요, 하나님이 그 문제를 다스려주시든지,
내 마음을 다스려주시든지.. 그때까지 기도하시는 겁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사실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유지될 것입니다.
이 처방은 아주 짧지만 야고보의 전 생애 신앙 전체가 농축되어 있는 귀중한 신앙 원리요,
법칙인 것을 우리가 믿고, 어려울 때 기도하고 형통할 때 주님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아서,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승리의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고난의 때에 기도,
형통한 때에 찬양, 이 단순한 원리를 생명처럼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
이 땅 가운데 어떤 문제가 오든지,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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