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의 근원 - 보혈의 능력 출12:13 출처
- 토미 테니의 <능력의 근원>중에서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갈보리를 거치지않고 오순절 다락방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은 없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항상 피의 메시지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불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서이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에 믿음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보혈로 정결해지고 보전된다.
그리스도의 피에대한 논쟁보다 역사상 열띤 논쟁은 없었다.
물론 감출 죄가 있거나 반항적인 사람들에게는 보혈이 항상 거슬리는 주제이겠지만
미국과 유럽 교회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혈을 싫어할 줄은 거의 아무도 몰랐다.
보혈은 회개하는 사람들을 구원한다.
그러나 반항적인 사람들에겐 보혈이 정죄감을 주고 기분나쁘게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보혈은 종교적인 사람들이나 '인간의 고등 표현과 사회적 진화를 통한 신성'의
개념 같은 것을 유포시키는 사람들에게 결코 인기를 얻지 못한다.
1800년대 후반에 들어서 많은 교회들과 '유명 신학교'출신의 존경받는 신학자들이
보혈을 '탈락'시키고 '값싼 은혜의 사회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보혈의 메시지는 문명화 된 많은 교인들의 감성에 거슬렸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은 보혈의 소박한 메시지를 예수님의 가르침중에서
더 긍정적인 측면들에 촛점을 맞춘 입맛에 맞는 메시지로 바꾼것이었다.
십자가는 선의 상징으로서 성전,강대상,교회 마당에 세워졌지만
아무도 주님이 갈보리에서 피흘려 받으신 고통을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선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보혈이 없는 교회에 경악해야 마땅하다.
그런교회는 사탄에게만 완벽한 교회이고 아담의 후손인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수가 없다.
정치적으로 옳게 여겨지든 아니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목회의 자살로 여겨지든 아니든 간에 구원과 능력을 얻으려면
죽음의 제단과 보혈의 희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고 싶어하지 않지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보혈을 흘리신 어린양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논쟁이나 궤변의 여지를 전혀 넘겨놓지를 않으셨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8-39)
우리는 보혈에 관해 얘기하는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교회 리더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구원이라는 것을, 보혈을 언급하지않고 최대한 고통을 피해 말할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거야."
그러나 미안하지만 보혈을 피해갈 길은 없다.
살려면 먼저 제단에서 죽어야 한다
진리나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여러 세대에 걸쳐 싸워서 얻어야 한다.
전투 없이는 승리가 없다.
십자가의 길은 피로 얼룩진 길이다.
그 길이 영광의 길이 되기전에 먼저 피흘린 길이되어야 했음을 기억해라.
당신이 살려면 제단을 찾아가서 죽어야 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가 있다.
피흘림의 기원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타락후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시려고
동물의 피를 흘리신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동물을 잡아 그 피로 아담과 하와를 덮으시고 속죄하셨다.
죄인을 위해 무죄하고 깨끗한 피가 흘려져야 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신학이 구축되었다.
하나님께서 피의 또다른 새로운 비밀을 계시하신 것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출애굽 시키실 때였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재앙을 내리셔서 요셉의 가족을 학대한 바로의 의지를 꺾고
애굽을 벌주실 때 무죄한 피의 또 다른 특성이 드러났다.
그 비밀은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의 기초이며 그리스도 안의 구원의 반석이다.
애굽을 뒤흔든 재앙들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을 영원히 압제하려는
바로의 고집스런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애굽은 최후이자 최악의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출애굽역사와
정의의 실현이 가까와졌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셔서 고센땅의 모든 이스라엘 집들에 명령하셨다.
그것은 흠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우슬초에 적셔서 각 집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간단했다.
집안에 머물고 피아래 머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피를 볼때에..."라고 말씀하셨다.
그밤에 죽음의 사자가 애굽땅을 두루다니며 모든집의 처음 난 것을 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설명하셨다.
다가오는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수 있는것은 어린양의 피의 능력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라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유월절이라는 용어의 기원이다.
그때 피로 덮이지 않는 집마다 첫번째 난것이 죽는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이성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시점에서 인간의 말은 부족함 뿐이었다.
다만 알수있었던 것은 어린양의 피에 하나님의 마음을 끄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가장 숭고한 생각과 감정과 능력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능력,사람들을 위해 사역하는능력,
사탄에 대항하는 능력을 원한다면, 그 모든 것이 어린양의 피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죽음의 사자가 하나님의 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선을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것을 뚫고들어가지 못했다면 지옥의 사자에게
그것은 얼마나 더 건널수 없는 장벽이었겠는가?
보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그것이 바로 피의 능력이다.
피가 주는 세가지 구체적인 유익이 출애굽기 12장에 나온다.
1,피는 그들을 보호했다.
2.피는 그들을 해방시켰다.
3:피는 그들을 과거 애굽역사로부터 깨끗이 씻었다.
죽음의 사자는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린 피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의 집을 들어가지 못했다.
피가 흘려졌을 때 비로소 바로의 의지가 꺾여 하나님께 굴복했다.
피는 회개하는 자를 구원했고 거역하는 자를 멸했다.
피는 하룻밤만에 '포로들을 자유케 했다'
피에 의해,물 가운데로 구름 아래로 어린양을 먹고
하나님의 지시에는 희생제물로 바쳐진 어린양과 무교병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준비하며 먹어야 한다는 명령도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피에 의해 물 가운데로(홍해를 지나),구름아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먹고 애굽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출애굽기 12장의 메시지는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만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려면 예수님이 흘린 피에 의해 세례의 물 가운데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아래로 우리를 위해 상하신 어린양의 몸으로
충만히 채워져 나가야 한다.피에 능력이 있다.
희생제물이 된 어린양은 초자연적인 치료와 건강의 역사도 일으켰다.
그들의 해방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실일을 예표했다.
시편 기자는 350만에 달하는 그 무리 중에 아픈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고 선언한다.
미국에서 그 정도 크기의 한 도시에 요통 두통 관절염 암 사지불구 근육이나
신경계 기능 이상을 가진 환자가 단 한명도 없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성경을 믿는가?
출애굽할 때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은 어린양의 피의 능력으로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피의 문을 통해 걸어 나갔기 때문에
모든 병에서 치료되었고 모든 억눌림에서 해방되었다.
떠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이 되는가?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요? 너무 연로하시고 허리가 굽으셔서 애굽에서 나가기는
커녕 이방에서 저방으로 다니지도 못하시잖아요."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겠는가?
그 때 그들은 '우드득'하는 큰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할아버지가 정정하게 똑바로 걷게되어 출애굽 준비가 완료(?)되었다.
피에 능력이 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갈보리를 거치지않고 오순절 다락방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은 없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항상 피의 메시지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불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서이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에 믿음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피 묻은 문안에서 쇠약한 자들이 춤추다
평생 팔다리가 비틀려 있었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할수가 있는가?
"가라!"하는 명령이 내려지자 갑자기 그들은 몸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펴지고 회복된 팔다리로 능력이 들어왔다. 그들은 갑지기 치유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애굽에서 걸어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피묻은 문을 통해 춤추며 자유를 향해 나아갔다. 피에 능력이 있다.
애굽의 첫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상한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그 무죄한 어린양의 희생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여기시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이름으로 불리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어린양을 죽여 흘린피를 집마다 좌우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것이다.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인원이 적거나 가난해서 양한마리를 잡을수 없는 가족은
이웃집과 양과 양의 피를 나눌수 있었다.
우리가 어린양 예수님을 함께 나눌수 있다는 것이 기쁘지 않은가?
흥미로운 점은 그 반대는 블가능 했다는것이다. 한집에 식구수가 많더라도
어린양을 여러 마리 잡을수 없었다.
식구가 5명이든 15명이든 한가족 당 어린양 한마리의 피로 충분했다.
죽음의 사자의 마지막 재앙을 당하기 전에 애굽이 먼저 받은 재앙들도
애굽과 이스라엘 자손이 눈에 보이지 않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개구리든 메뚜기든 애굽인들이 고통을 당할때 이스라엘은 아무해도 받지 않았다.
그'분리'가 가장 극명히 드러난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아래서 보낸 마지막 밤이었다.
그 밤에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는 애굽을 쳤다.
이스라엘은 피로 보호로 안전했지만 애굽전역은 곡하는 소리와 비명으로 뒤덮였다.
그런 차이는 피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외에 달리 설명될 수 없다.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이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 재앙이 닥치기 직전에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 운명의 마지막 저녁에 해가 저물때 이스라엘인들 가까이 사는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것을 보고
"저 미친 유대인들이 이번에는 또 뭘하는 거지?"라고 비아냥 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대에 걸쳐 내려왔던 영적 물리적 정신적 가난이 그날 밤에 끝이났다.
그 몇시간 후에 감옥문이 열렸고 속박 속에 태어났던 이스라엘의 세대들이 해방되었다.
애굽의 첫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얼마나중요한지 하나님께서 특별한 단어로 설명하셨다.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표적은 훨씬 더 큰것의 작은 일부분 기미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희생적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기 전에
애굽에서 그것을 상징한 어린양의 피가 그런 역사를 이루었다면
갈보리 사건 이후에 이루어진 진짜 능력은 얼마나 크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실을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원수마귀가 예수님의 보혈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우리는 정말로 이해하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보혈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원수마귀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보혈을 믿지 않고 믿음으로 보혈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불필요하게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 보혈에 능력이 있다.
단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믿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에 한해서 그렇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거룩한 환상속의 능력도 피의 제물이 바쳐진 제단에서 나왔다.
이사야 선지자는 제단에서 취한 불타는 숯이 악을 제하고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했다.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이사야는 빈 왕좌를 보고 있었다.
그때 그가 눈을 들자 결코 빈적이 없는 더 높은 보좌가 보였다.
선지자의 환상은 지상을 너머 하늘로 이어졌고 그는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라고 선포했다(사6:1)
그것도 능력의 비밀한 근원중 하나이다.
우리는 땅의 모든 권세 영웅 승리자 보좌보다 '높이들린' 주님을 직접 보아야 한다.
우리의 관심과 애정이 높이 계신 주님께 고정될 때 하늘로부터 임하는 은혜가
우리의 비전을 바꾸고 우리의 말을 변화시킨다.
예수님을 높일 때 천국이 임한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좌에 계신 이를 응시하자 하늘의 천사들이 활동하고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그에게로 날아왔다.
스랍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천사들을 동원하고 싶으면 통치자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을 높일때 천국이 임한다.
천국과 천사들과 하나님의 모든 것들이 당신의 삶속에 역사하기를 바란다면
눈을 들어 높이들린 주님을 보라.주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면 천국이 당신에게 임할 것이다.
이사야에게 날아온 스랍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가져왔다.
악이나 죄와 제단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모든 성경구절들을 참조해 본다면
악을 제하고 죄를 사하는 속죄의 제단은 단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천사가 가져온 핀 숯은 천지창조전에 죽임을 당해 바쳐진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가 영원히 뿌려진 놋제단에서 나온것이 아닐까?
피묻고 불붙은 제단에서 승리가 시작된다.
만일 이것이 정말로 놋제단이라면(실질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희생제물을 바친 피묻은 불붙은 제단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높이 들린 주님을 보는 동시에 희생제단의 피와 불도 보아야 한다.
이사야의 환상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당신이 동의하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지지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속에서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다.(히9:22)
이사야는 죄를 솔직히 자백하고 부르짖었으며
구속되지 않은 자신의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생명을 잃을까 두려웠다.
그의 죄가 제거되고 그의 무가치함이 덮여져야 했다.
그는 보혈이 필요했고 아마도 제단에서 취한 숯은 보혈이 묻은 숯일 것이다.
이 해석이 만족스럽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없는 사실은 사람이 먼저 피를 거치지 아니하고
거룩한 불에 나아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레위기에 따르면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어떤 희생제물을 제단으로
끌고 가기 전에 남아있는 여분의 피를 짜내야 했다.
끔찍하게 들릴수도 있겠지만 흰옷을 입은 제사장들은 제물을 불태우기 전에
먼저 제단의 아래 위 사방으로 피를 묻혀야 했다.
끔찍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것은 오늘날 간절히 부흥을 추구하는
신자와 교회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갈보리를 거치지 않고 오순절 다락방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은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 각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남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우리는 자신을 불태워야 한다. 산 제물을 불붙은 제단에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항상 피의 메시지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불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서이다.
당신은 어딘가의 제단에서 먼저 피를 흘려야 한다.
당신의 육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갈보리로 가라.
거기서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당신 자신으로 여기라.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 문둥병자의 치료를 확인해주는 방법에 기적의 원리가 나타난다.
그것을 생각해 보라. 마침내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면 두마리의 새를가지고 갔다.
제사장은 대야에 물을 붓고 새 한마리를 잡아서 피와 물을 섞는다.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산 새를 홍색실로 나무와 우슬초에 묶는다.
마침내는 산 새는 제사장으로 대표되는 '율법의 손'에 붙잡혀 피와 물에 잠긴다.
즉 '세례'를 받는다.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내가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제사장은 겁에 질린 채 떠는 산 새를 즉시 들로 데려가서 놓아 줬다.
그것은 나무 우슬초 홍색실 그리고 물과 피 때문이다.
산 새는 같은 종류의 다른 새가 죽었기 때문에 자유케 되었다.
새는 율법의 구속에서 자유케 되었다. 물은 자유의 일부분이다.
과거에 우리는 죄와 종교적 고행에 얽매이고 붙잡혀 있었다.
피와 물 우리를 대신하는 대속자가 우리의 사형선고를 무효화 하기 전까지
우리는 소망이 없었다.
한 군병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온것은
우연이 아니다. 율법의 손아귀에 잡혀 두려워 떨던 우리가 이제는 담대히 말할수있다.
"갈보리의 십자가 내 죄를 상징하는 홍색 실, 나를 깨끗하게 하는 우슬 초,
그리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지금도 떨어지는 피와 물의 세례로
나는 자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선언하신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요8:36)
하나님의 집에서 불을 붙이려는 모든 사람은 기억해야 한다.
구약시대 성막의 모든 불은 놋제단 혹은 피묻은 제단의 불로
점화된 것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불'이었다.
다른 불은 불이 아예 없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갈보리의 피묻은 제단말고 다른 곳에서 당신의 불을 붙이지 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의 삶 속에서 보혈의 능력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보혈은 교회의 생명및 활력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혈에 대해 간절해져야 한다.
히브리서기자는 물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
피묻은 길을걸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라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육신의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봉사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피묻은 길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라. 그리스도의 피로 당신의 해묵은 답답함과 지루함을 씻는다면
당신은 살아나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어린양의 피에 잠길때 당신은 마침내
그 작은 새처럼 속박과 죽음에서 벗어나 해방과 참 자유를 경험할 것이다.
이제 피묻은 제단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과 동일시 할 때이다.
그 자리에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것이다.
기도는 피를 통해 응답된다. 기도는 지금도 재앙을 소멸시키고
악한 영들을 묶고 거룩한 자와 속된 자 회개하는 자와 교만한 자를 구분한다.
우리의 불평과 무기력 소극적인 태도와 무관심이 만들어 낸
재앙을 제거해야 한다.
지금은 자신에 대해 죽고 주님 안에 살 때이다.
지금은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물로
옛날식의 기도의 제단에서 세례를 받아야 할 때이다.
우리는 십자가로 나아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제가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어떤 것도 제가 거절합니다.
모든 것을 주예수 그리스도의 피아래 내려 놓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선언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9:19-22)
보혈의 길 십자가의 길은 죽은 길이 아니다. 인간이 율법과 변덕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세운
교회와 달리 참 교회는 지루한 전통이 아니다.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고 보혈이 흘려졌고
주님의 육체의 '휘장'이 찢어졌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져 모든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우리는 들어왔다.
그러나 성막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항상 지성소에서 밖으로 나가는것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 다가 가시겠다는 상징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예수님의 갈보리 피의 희생은 지성소를 열어 모든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일 것이다.
"이 작은 종교적인 자리에서 내가 나가겠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내가 가겠다.
1년에 한 사람만 나에게 예배하고 나와 찬말히 교제하는 것으로
나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겠다. 나는 민족과 나라와 제사장들을 찾으러 가겠다."
아마도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5:9-10)
예수님의 옆구리가 찢어졌다.
거기서 피와 물이 나왔고 당신은 그 상처 속으로 걸어들어가
하나님의 심장에 까지 이르도록 초청받았다.
혈육이기 때문에 은혜로 들어간다.
약 20년 전에 큰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날의 안건들은 매우 핵심적인 것들이었고 논의 내용은 대외비였다.
이사회 의장이 몇가지 요점들을 설명하며 회의가 진행되던 도중에
회의실 문이 갑자기 발컥 열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누구든지 노련한 비서와 행정요원의 심문을 거치고
두개의 문을 지나 계단에 올라 가야만 회의실에 이를 수 있었는데 말이다.
비서가 미리 전회로 알리지도 않았고 행정요원이 양해를 구하러 오지도 않았다.
문이 열리고 모두가 본 것은 네살박이 꼬마였다.
꼬마는 다른 얼굴들은 전혀 모르고 오직 한 얼굴만 알아 보았다.
꼬마가 작은 팔을 들어 올리자 의장이 재빨리 손자를 안아서
꼬마가 원하는 대로 포옹해 주었다.
꼬마는 할아버지가 2층에서 회의중이라는 것을 알고서 모든 장애물을 뚫고 올라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회의는 일시 중단되었고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꼬마는 혈육이기 때문에 은혜로 들어올 수 있었다.
손자인 셰인을 포옹해줄 때 다른 모든 것들은 둘째였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든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든 하늘에 별을 달고 계시든
은하수를 그리고 계시든 보혈에 씻긴 한 자녀가 아빠와 얘기하려고
보좌가 있는 방의 문을 열면 천사들도 자리를 비켜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생각하신다.
그리고 어린양의 성처를 통해 걸어 들어가
하나님의 심장에 이를 수 있는 혈육의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 보다 더 큰 능력의 근원이 무엇이겠는가?
어린양의 피로 무장하라 어린양의 피에 능력이 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은 무용지물이다.
피의 개념은 단지 신학적인 것만이 아니다. 사탄은 신학이나 신학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일 그 신학자가 보혈로 씻김받아 그리스도의 피를 무기로 사용할 줄 아는
신학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피에 생명이 있다. 우리가 믿고 가르치고 소망하는 모든 것이 어린양 그리스도
예수의 피의 능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피흘리셨음을 믿고 그것이 없이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음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않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 굳건한 기반을 둔 신학적 견해를 확립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진 않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이 진리를 알뿐 아니라 경험해야 한다.
이 진리가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에 영향을 미치는
'마음속의 뜨거운 열정'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의 핵심요소 이상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방어무기이자 공격무기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어떻게 보혈의 능력이 활동하고 역사하고 흐르게 할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백성은 애굽에서 피의능력과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훌륭한 실물교육을 받았다.
이어지는 재앙들 속에 애굽 전체가 아무리 혼란에 휩싸이고
애굽인들이 아무리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분리의 선을
아무 재앙도 넘지못했다.
현재 우리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 경제위기 온갖종류의 재앙으로 얼룩진 혼란한 시대에 산다.
그러나 구속된 자와 잃어버린자를 구분하는 핏빛 선이 우리에게 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떤 실물교육 속에서
살고있는지 알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어린양의 피로 덮여 있다!
피의 능력은 죄를 넘어선다
히브리서에서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고 선언한다.
이 구절에서 '죄사함'이라 하지않고 '사함이라고 말씀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물론 죄도 분명히 포함되지만 피의능력은 죄를 처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피는 거의 모든 것들을 정결케 한다.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거의 모든 것에 피를 뿌렸다. 피를 뿌리지 않는 것에는 기름을 발랐다.
그들은 피의 능력이 정결케하고 악한것에서 해방시키고 보호한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피는 만능세제였다.'피는 사함과 사면과 자유의 열쇠였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사함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24:47)
누가는 의사였는데 그 당시에도 '사함'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
몸에 질환이나 질병이 있는 사람의 상태가 상당히 좋아졌을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병의 진행이 정지되었거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의미였다.
피는 육체의 일을 소멸시킨다 어린양의 피는 죄를 공격하고 좇아낸다.
깨끗이 씻는 예수님의 피의 역사 앞에서 죄는 후퇴한다.
피의 능력이 육체의 일을 몰아내고 소멸시킨다.
원수마귀가 피를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다. 죄는 피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옥의 귀신들도 어린양의 피를 말하면 두려워 떤다.
우리는 삶속에서 파의 능력을 임하게 하는 원리들을 배워야 한다.
오늘날 이 시대는 비할 수 없는 어둠속에 있는 한편 교회도
비할 수 없는 운명적 능력의 때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날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보혈의 효능과 힘과 능력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 생명을 위히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속하다,속죄'라는 단어는 '덮음'을 의미한다.
어린양의 피는 단순히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 이상을 한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를 덮고 보호한다. 더 나아가서 보혈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덮고 보호할때 사용하는 도구와 무기이다.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보혈의 능력을 이해시키기 위해 매우 중요한 단어를 사용하셨다.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사이에 구별하리니"(출8:23)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보면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사이에 구속을 두리니"이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를 마귀의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고 보호해 준다.
내가 보혈의 능력을 주장하노라
오순절파 초기의 옛날 신자들은 "내가 보혈의 능력을 주장하노라~
내가 예수의 피권세를 주장하노라~"라고 자주 말했다.
그 강력한 구절을 우리는 다시 사용해야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그 피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한 부부가 큰 교통 사고를 당했다.
남편이 정신이 들어보니 아내가 옆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몰려들 때 남편은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아내에게 손을 얹었다.
하나님의 역사를 잘 모르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남편은
"내가 보혈의 능력을 주장하노라 내가 보혈의 능력을 주장하노라
내가 보혈의 능력을 주장하노라"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오늘날 그는 예수님의 피가 아내의 츨혈을 중지시켰다고 증언한다.
그날 사고현장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랐겠지만
하나님의 천사들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의 말을 이해했다.
치료하고 구원하는 보혈의 능력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건졌다.
그 사람은 60년대 말과 70년대에 교단의 해외선교부장으로 일했다.
그는 자주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는데 외국의 특이한 귀신들이
그를 집까지 따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밤새 그 이상한 귀신들과 싸웠습니다.
한밤중에 그것들이 나를 깨우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두려움의 영적 세력에게 공격을 받고
왜 두려운지 영문도 모른채 울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나는 알았습니다.
내가 영적거장은 아니었지만 그 영적실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방마다 다니며 어느 한 구석도 놓치지않고 예수의 피를 주장했다.
"보혈을 주장하노라~ 보혈을 주장하노라~"
그는 예수의 이름과 보혈의 능력으로 모든 악한영들에게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항상 원수의 세력이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평화가 강같이 임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로 이 책의 공동저자인 나의 아버지 T F 테니이다.
보혈은 보호한다. 보혈은 정결케 한다.보혈은 승리하게 한다.
첫 유월절 사건은 죽음의 사자조차 어린양의 피의 능력을 보면 물러가야 한다는것을 증명한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피
피가 말한다는 것을 아는가?
히브리서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말씀한다.(히 12:24)
우리가 얘기하는 '피'는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피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피가 예수그리스도의 혈관을 통해 흘려졌다.
피의 능력으로 갈보리에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확실해졌다.
불가지론자는 만일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신데 죽으셨다면
하나님이 갈보리에서 죽은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 반론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죽을 수 있는 모든 부분은 갈보리에서 죽었다.
그것은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육체를 말한다.
우리는 예수의 보혈에 믿음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단순히 "내가 피를 주장하노라~"라고
의미없이 반복하거나 말하는것은 부족하다.
"내가 예수의 피를 주장하노라~피가 나를 변호한다~
피가 나를 위해 마귀의 뺨을 칠것이다."라고 선포할 때
무슨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어야 한다!
원수마귀가 당신의 삶의 어떤 영역에 징그러운 손을 뻗어 붙잡으려고 할 때
당신이 듣지 못하는 어떤 목소리가 어둠속에서 사탄에게 말씀한다.
"내 자녀에게서 손을 떼거라!" 그 즉시 마귀의 손은 힘을 잃는다.
그리고 마귀는 말할 것이다. "오~나는 이 목소리를 알아. 이것은 어린양의 피의 소리야.
나는 이 사람에게 손댈 수 없어.단지 밖에서 거품을 물고 울부짖으며
거짓말로 이 사람을 두렵게 할수 있을 뿐이야. 나는 이 사람에게 손댈 수 없어.
그가 피로 덮여있기 때문에 나는 다가갈 수 없어."
15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성전을 가졌다. 성전에는 지성소라는 특별한 구역이 있었다.
제사장 외에 어느 누구든 거기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다.
그것이 주는 한가지 단순 명료한 메시지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심지어 거절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꾸셨다. 인간이 갈보리 십자가를 깊이 체험할 때
십자가는 이 땅의 궁핍함을 충만하게 채운다.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 위로 뻗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의 능력이
이 땅의 필요를 하늘로 전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묻은 한 팔은 구원과 영생의 초청을 받아들인 한 강도를 향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편애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거절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피 묻은 다른 팔을 또 다른 강도를 향해 펴셨다.
예수님은 거절당할 것에 상관하지 않으셨다. 구속자 주님께서 그들 모두를 위해 피흘리셨다.
받아들일 자들과 거절할 자들 모두를 향해서 예수님이 상처난 사랑의 팔을 뻗으신다.
그래서 길이 없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새롭고 산 길이 되셨다.
속죄의 범위에 한계를 두지말라. 하나님의 아들의 피의 능력을 받아들여라.
그 분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다.(요12:32)
존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께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한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계11:8)
이것은 번역의 오류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께서 애굽이나
소돔에서 못박히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이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이런 의미이다.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죽으셨을 때에 그 피의 능력이 애굽에서 죽임을 당한 첫 유월절
어린양까지 흘러가 모든 것을 씻었다.
그리고 고대 애굽의 모든 것에 대힌 주권을 선포하는 십자가를 거기에 세웠다.
그 다음에 그 피는 가장 깊은 죄의 소굴인 소돔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피는 "불의와 방탕의 저주받은 이구렁텅이에 까지 내가 십자가를 세운다.
보혈은 이것까지 처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속죄의 범위에 한계를 두지 말라.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죄를 열거하면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6:9-11)
사도바울이 "너희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간단하다.
"너희가 전에는 그랬었지만 이제 흠없는 어린양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
너희는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으로 구별되었고 보전되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피에 능력이 있다
피에 대한 다음의 간단한 질문들의 답을 성경에서 찾아보고 피에 능력이 있음을 기억하라.
1. 피는 속죄한다.(레17:11)
2. 피는 심판 사망 재앙이 당신을 넘어가게 한다.
(출12장 13장의 약속은 "내가 피를 볼대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이다)
3. 피는 당신의 방황을 끝내고 당신을 항상 하나님에게로 이끈다.(엡2:17)
4. 피는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준다.(히10:19)
5. 예수님의 피가 당신을 구속했다.(벧전1:18-19)
6.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당신의 모든 죄를 씻는다.(요일1:7)
7. 당신은 어린양의 피로 이긴다.(계12:11)
보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피는 당신을 보호한다. 당신을 해방시킨다.
당신을 정결케 한다. 만일 당신이 우울증에 걸려 있다면 피를 주장하라.
만일 당신이 병들었다면 피를 주장하라. 만일 당신이 두렵다면 피를 주장하라.
당신이 어린양의 피로 자유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한다!
- 토미테니의 능력의 근원중에서
- 출처: 회복교회/여호와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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