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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Original Sin / 존 웨슬리

LNCK 2018. 8. 3. 19:33

◈원죄 Original Sin                    창6:5                    스크랩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이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6:5
 
이계준 역 "존 웨슬레의 설교집 2권" 38번 188쪽, 김한솔 타자  
 
 
1. 이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들이 묘사해 왔던 인간성에 대한 아름다운 모습들과는

얼마나 큰 차 이를 발견할 수 있는 말씀입니까!

고대의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 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중 어떤 작가들은 사람의 성품 속에는 모든 덕과 행복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래 서 최소한 다른 존재의 도움이 없이도 전적으로 인간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뿐만 아 니라 인간은 자기 충족적이고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라고 간주하였습니다. 
 
2. 인간성을 결함이 많고 완벽한 것처럼 거창하게 설명했던 묘사들은 자신을 탐구함에 있어서,

단지 희미한 이성의 빛에 의해서 지도를 받은 이방인들 뿐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위탁된 사람들까지도

이런 식의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설 명들은 특히 금세기에 들어와서 성행되고 있으며

세계의 어떤 지역보다도 우리 나라에서 더욱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폭넓은 학식뿐만 아니라 탁월한 이해력을 소유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인간성의 아름다운 측면'을 입증하기 위하여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 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만으로 정당한 것이라면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 또는 문자 그대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지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3. 이와 같은 설명들이 일반 사람들에게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훌륭하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류의 저술가들은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으며 존경과 칭찬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교계 뿐만 아니라 식자층에서도 그들의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무수하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

즉 인간성에 대해 다소나마 손상을 입히는 식으로 말 하는 것은

지금에 와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즉, 다소의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성은 매우 순전하고 현명하며

덕이 있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한편, 우리는 성경의 말씀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만 될 것입니까?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이상과 같은 설명과는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설명들은 인간의 혈육을 기쁘게 할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의 말씀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으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단언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형상 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타락하고 죄악에 가득찬 아담은 '자신과 똑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다른 방법으로는 자기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부정한 것에서 정한 것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본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 이고

'희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 이 세상에서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식'이며,

우리 각자는 '나 의 불의한 중에 태어났으며 내 모친은 나를 죄 중에서 잉태하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볼래 창조되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모든 사 람은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입니 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하늘에서 인간의 자녀들을 살피시니

모두 그릇 행하고 한결같이 부패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의인은 없었고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위에 인용한 말씀 중에서 성령에 의해 선포되어진 것과 정확하게 일치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늘에서 이 땅을 내려다 보셨을 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 함과 그 마음의 생각 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입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나는 첫째, 홍수 이전의 인간의 모습은 어떠했었는가 하는 점을 밝히고

둘째, 인간은 지금도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닌가를 검토해 보고,

셋째, 여기에 몇 가지 결론을 첨가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1]
 
1. 첫째로 나는 성서의 말씀을 들어, 홍수 이전의 인간은 어떠한 상태에 처하여 있었는가

하는 점을 밝히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어진 설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 상태를 보셨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은 속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사에 관영 함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특정된 이 사람이나 또는 저 사람이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악하다는 말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하다는 뜻도 아닙 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악하다는 것이며, 모든 인간들은 보편적으로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성을 소유하고 있는 전 인류를 포함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수효를 헤아려서 악한 사 람들이 몇천 몇백만 명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지상은 원초적인 아름다움과 본래적인 풍 족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지구의 형세는 지금처럼 가라지지도 찢겨지지도 않았었습니다.

봄과 여름은 번갈아 가며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지상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거주인 들의 생계라도

충족하게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700~800년 동안을 함께 동거하면서 자녀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의 수효가 굉장하게 증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단지 '노아만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노아만이 (아마도 그의 가족의 일부가 포함이 되겠 지만) 보편적인 죄악으로부터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죄악으로 인해서 얼마 후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우주적인 파멸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노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죄악의 동참자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을 보셨습니다.'

인간이 영혼, 내적인 인간, 인간 속에 내포된 정신,

인간의 내적이며 외적인 행동의 원리를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생각들을 보신 것입니다.'

이 이상, 광범위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씀을 찾기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는 내면에서 형성 되고, 만들어지고, 구성된 것은 어떤 것이든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원천에서 자연히 솟아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까지 당연하게

그 속에 포함되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들이 각기 흘러나오는 원천에 따라

선하게도 또는 악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3.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내포된 모든 것이 악한 것임을 보셨습니다.

즉, 도덕적인 정직성에 배치 되며, 필연적으로 모든 선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배치되며,

선악의 영원한 표준이신 하나님 의 뜻에 배치되며,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한 그분의 솜씨로 지으신 모든 만물을 보시면서


이 모든 것이 매우 좋다고 말씀하시던 하나님 앞에서 있을 때,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하나님의 순수하고 거룩한 형상에 배치되며, 정의, 자비, 진리에 배치되며,

또한 인간 각자와 창조주와 동료 피조물 에게 부여된 본질적인 관계와 배치되어 있습니다. 
  
4. 그러나, 선과 악은 뒤섞여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빛과 어둠은 뒤섞여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천만에 말입니다. 전적으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의 모든 계획이 오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


분명히, 대부분의 사람들, 아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한 동기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하나님의 영은 사람이 행여나 회개하지나 않을까 생각하시어

'사람과 분투' 하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방주가 준비되던 120년이라는 은혜의 유예기간에는 특히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선한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본성 전체는 전적으로 악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악 자체와 일치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본성과 대립되는 성품이 조금이라도 혼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5.그러나 '이러한 악이 중단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심중에 무엇인가 좋은 점이 발견될 수 있었던 바람직한 중간기가 없었을 것입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시시때때로 인간의 영혼 속에 역사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고려해 본 다면 악이 중단되어 있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가 언제나 같고 매년, 매일, 매순간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코 선을 지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인간의 심중을 아시며, 마음을 감찰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훈 하시기 위해

기록해 두신 전 인류에 대한 설명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홍수를 내리시기 전에, 인간 은 모두 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인간이 지금도 똑같은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가를 논의하려고 합니다. 
 
1. 성서는 사람들에게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오히려 위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은 홍수이후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천여년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모두 진리와 성결에서 떠나가 선 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도 여러 세대간에 걸쳐 이와 같은 상태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특정한 백성에 대해(물론, 이방인들이 이보다 더 나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사도들조차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전반적인 취지가 그렇게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 못한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에 관해서 배우게 됩니다.


즉, 그 마음의 생각 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고

악만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2. 그래서, 인간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들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하여 입증됩니다.

자연적인 인간이 이와 같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눈먼 상태로 태어난 사람은 그가 장님인 한 자신의 결함을 좀처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모든 사람이 시력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난다면 그 결핍을 자각할 수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이해력이 자연적이 맹목상태에 머무는 한, 자신의 영적인 결함,

특히 이해력의 결함에 대해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의 눈을 밝혀 주실 때

그는 지금까지 지내왔던 상태에 대해서 자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특별히 본성적으로 ' 모든 것이 헛된' 상태에 빠져있다는 사실,

즉, 우매하고, 죄되고, 사악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가 이전에는 (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들, 또는 이 세상에 무신론자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성을 사용하게 됨에 다라, 우리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성품,

곧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피조물로부터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

즉, 영원하며 능력 많으신 존재가 실존하고 계심을 추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중국의 황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본래적인 능력으로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떠한 지식으로서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닌 본래적인 이해력으로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시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4. 인간의 자연적인 언어가 무엇일까? 하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던

옛날 어떤 임금에 대한 이야기가 있 습니다.

이 문제를 확실히 밝히기 위하여 그 임금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두 어린애가 출생하자마자 그들을 미리 예비된 장소로 옮길 것을 명령하고,

그곳에서 사람의 어떤 가르침이 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게 하면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감금상 태에서 풀려났을 때, 결국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만일 이 아이들이 모태로부터 어떤 종교적인 가르침도 없이 자라왔다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그 결과는 분명히 마찬가지였으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종교이든지 전혀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평원에 사는 동물들이나,

거친 나귀새끼들과 같은 정도 밖에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전통과 하나님의 영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연종교는 모두가 다 그런 것입니다. 
 
5. 그래서 우리가 지식을 갖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대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 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돌이나, 밟고 있는 땅을 나면서부터 사랑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 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 을 느끼는 자는 없습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감히 누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느낄 것입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전혀 무미건조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거리가 멀고, 관심 밖에 있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자연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6. 본성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이나 이후를 불문하고, 일종의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공포,

소위 '미신'이라 고 지칭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대수롭지도 않은 에피큐리안(Epicurean)들은 그것을 종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사실마저 자연적인 것은 아니며 대개 행동이나 실제의 예들을 통해 습득한 것입니다.

본성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생각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조용히 앉아 계셔서 자신의 일만 하시고

인간은 지상에서 자신의 일만을 하도록 내버려 둔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면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7.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러나 무신론 자체도 우상숭배로부터 우 리를 막아주지는 못합니다.

자연적인 상태에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우상숭배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어가 지니고 있는 통속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우상숭배자들이 아 닐는지도 모릅니다.

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처럼 쇠를 부어만들거나, 조각된 우상에 예배하지 는 않습니다.

나뭇조각이나 손으로 만든 물건에 머리를 숙이지도 않습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 게 기도하지 않는 것처럼, 하늘의 천사와 성도들에게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 게 합니까?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우상을 세우고

그것에 대해 머리를 조아리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

리가 하나님께만 돌려야 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만은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비록 교만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교만 없이 태어난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교만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양도될 수 없는 권한을 빼앗아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우상 숭배적인 행위로 인하여 찬탈하게 됩니다. 
 
8. 그러나 교만만이 우리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허물이 되는 유일한 종류의 우상숭배는 아닙니다.

사탄은 역시 우리의 마음속에 자기 의지라고 하는 그의 형상을 색인해 놓았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추 방되기 전에 '나는 북방으로 가서 내 창조자의 뜻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의지와 기쁨을 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을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두려움이나 수치심조차 느끼지 않으면서 그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그와 같은 말을 하였느냐'고 물어보면

'그런 생각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말은 '그것이 바로 내 뜻 이다' 라는 말과 똑같은 말에 불과 합니다.

결국에는 '사탄과 내가 의견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는 말과 통하게 됩니다.


사탄과 내가 동일한 원리에 의해 행동을 규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한편, 하나 님의 뜻은 생각 밖에 있고, 조금도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하늘에 있어서나 땅 에 있어서

이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들이 추종해야 될 최상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은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로부터 받은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관계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9. 지금까지 우리는 사탄의 형상을 지니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 우 리는 사탄을 떼어놓게 됩니다.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 사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아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실 창조주 대신 피조물 가운데서 행복을 구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만족감을 그분의 손으로 지은 것들 중에서 구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모든 종류의 육감적이 쾌락을 바라는 일 말입니다.


특히 학덕 있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저급한 쾌락에 대해서 지나치게 경멸적인 어조로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사멸하는 동물과 같은 차원에서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꾸밉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가식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능적인 욕구는 그것이 가장 저급한 종류일지라도 다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지배력을 갖습니다.


비록 인간이 자랑할만한 이성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 욕구는 그를 포로로 삼아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그가 훌륭하게 양육 받고 교양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한 마리의 염소에 비해

별로 탁월한 점 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염소 한 마리가 사람에 비해 월등히 나올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현대적인 예언자들 중에 한 사람인 이 시인에게 귀를 기울여 본다면

그가 우리에게 매우 적절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짐승들조차 사랑을 맛보네
단지 이성을 지닌 짐승만이 사랑의 포로라네
그리하여 그 어리석음에 빠져
온 생애동안 애를 태우고 있네.
 
 
실제로 인간에게는(선재적인 은혜의 역사를 제외한다면),

자질과 교육의 차이에서 생기는 인간 사이의 상당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전혀 모 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향해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정욕을 품 고 여인을 보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습니다.'고 하는

제 7계명에 대해 은혜로우신 주님께서 해석하신 말 씀에 감히 저촉되지 않을 자가 누구입니까?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느끼고 있었던 바 욕망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경멸 조로 말하는 사람들이 무식한 편인지 아니면 교만한 편인지 논의하게 될 때

그들이 과연 어느 편인지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순수한 자나 불순한 자나, 관능적인 쾌락에 대한 욕구를 모든 인간의 후예들이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0. 그리고 그것은 '안목의 욕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상상력에 의한 쾌락을 느끼는 욕 망입니다.


이러한 욕구는 위대하거나, 아름답거나, 신기한 대상에서 발생됩니다.

비록 앞에서 말한 위대 하고 아름다운 대상이 신기한 대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진지하게 어떤 사물은 탐미해 본 뒤에는

일단 그 대상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처음과 같이 더 이상의 즐거움 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쁨을 모두 맛본 뒤에는, 그 대상들이 주던 대부분의 쾌락은 끝 나고 맙니다.


대상들이 사람들의 눈에 친숙해지는데 비례하여 그것들은 점차 무미건조하게 되고 퇴색됩 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적인 경험을 할수만 있다면 그러한 욕망은 그대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래적인 갈증은 영혼 속에 늘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욕구들은 만족하면 할수록 더욱 더 욕망을 증대시키며,

우리를 강제적으로 끝없는 대상을 찾아 헤매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절망감과 좌절감을 남겨줍니다.

이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백발이 된 어리석은 자는 수많은 세월동안 끊임없는 슬픔과 싸워왔다네.
소망을 새롭게 하며,
분별없이 버둥거리며
절망이 내일을 향해 손짓을 하네.
내일이 오고, 정오가 되고, 밤이 찾아오면 오늘은 어제와 같이 흘러가고 만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쁨을 찾아 내일을 향해 걸어가고 있네.
오늘 밤엔 죽게 될 터인데. 
  
11. 이와 같은 불치의 병의 세 번째 증상은 본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즉 '이생 의자랑'입니다. 칭찬 받고 싶은 욕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성은 아주 위대한 것이라고 찬양을 하는 자들은, 시각, 청각,

또는 다른 외부감각기관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즉, 품위 있고 진보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러한 욕망에 대해 수치감을 느낍니까? 천만의 말입니다.

그들도 역시 그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갈채 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소위 저명한 기독교인조차 고대의 허식적인 이교도의 말을 아무런 주저 없이 인용합니다.

'Animi dissoluti est et nequam negliger guid de se homines Sentiant'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려하지 않는 자는 사악하고 파렴치한 마음의 표식이 있다.


따라서, 명예나 불명예, 악평이나 호평을 개의치 않고 조용하고 확고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그자들에게 있어서는 사악하거나 파렴치한 징후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며,

사는데 적절치 못한 인간의 표시가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는 없을까요? '너희가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던 분을 알고 있던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믿는 것이 불가능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서로의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는 어떤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까? 이방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조차도

그와 똑같은 상태에 있게 될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서로의 영광만을 구하고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것을 덕스러운 마음의 표시로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명예에 만족하는 것을 악한 마음의 표시로 생각합니다. 
 

[3]
 
1.이미 설명한 사실을 통해, 나는 몇 가지 점에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보아 우리는 교리 적인 체제로서 생각할 수 있는 기독교와,

가장 세련된 이교간에 한 가지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고대의 이교도들은 특정한 인간들의 악 덕에 대해서 매우 과장된 묘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욕심과 잔인성, 사치와 낭비를 대단히 비난하였습 니다.

어떤 사람은 누구든지 이런 것이든지 저런 것이든지 죄악을 소유하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

감히 말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직까지는 어느 누구 하나라도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에,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해 올바르게 깨달았던 사람 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의 선은 결핍되어 있으며, 악한 행위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인간성의 전체적인 기능에 있어서까지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 속에 세력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죄악이라기 보다는

무신론과 우상숭배, 교만과 아집, 또한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일

반적인 죄악의 물결로서 인정될 수 잇는 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기독교와 이교간에 최초로 구별되는 중대한 차이점입니다.

한편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죄악에 감염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죄악 적인 성향을 가지 고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본래적인 선이 죄악을 훨씬 압도한다고 생각합 니다.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은 '죄 중에서 잉태되었으며'

'불의 속에서 태어나게 되었다'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육욕 적인 마음'을 품고 있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한 할 수도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혼 전체가 더럽혀져 있기 때 문에

'그가 살고 있는', '그의 육신 속에'는 그리고 그의 본성적인 상태 속에서는

'선한 것'이 깃들어 있 지 않은 것입니다..

즉 '마음의 생각이 모든 계획들이 약하며', 오직 악하며 '항시 악할 뿐입니다.' 
 
2.그러므로 두 번째,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다른 칭호를 붙이든지 간에 기독교와 이교간의 차이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자는 이교도임이 분명하다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많은 악덕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며,

그래 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될 현명함과 덕스러움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하게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선하게도 될 수 있는 성향을 가지 고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은 창조되었을 때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덕스럽거나 현명하였다' 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 사실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까? 사람에게는 모든 선이 결여되어 있습니까?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된 것입니까? 사람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된 것입니까?


혹은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입니까?'

이 사실들을 그렇다 고 긍정한다면 당신은 그만큼 기독교인이 되고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아직까지도 이방인에 불 과합니다. 
 
3. 세 번째, 우리는 종교의 고유한 본질이 무엇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종교의 고유한 본질이 무엇인 가를 이 사실을 통해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본질은 , 즉 병든 영혼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영혼의 위대한 의사는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또한 모든 기능 전체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약품을 제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 또한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신론을 치료해 주십니다.


즉,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일들을 믿는 신앙을 주심으로써

그 병을 고치십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겸손한 마음을 통하여 교만이라는 치명적인 병이 치료됩니다.

아집이라는 치명적인 병은 하나님의 뜻을 온유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용기로서 달성된

단념으로 인해 치료 받게 됩니다.


병의 줄기가 되는 모든 종류의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최상의 치료제입니 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 이 바로 참된 종교입니다.


사랑은 진정으로, 온유한 겸손 가운데에서 작용하며,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뜻과 말씀을 사랑과 감사에 넘쳐 순종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4. 정녕, 인간이 이처럼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이 있어야 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이런 일들이 있어야 될 필요가 없고, 마음과 영혼의 갱생이 있어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리석음 이 넘치는 거' 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경건이 넘쳐흐르는 것' 에 대해 말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 될지도 모릅니다. 경건이 전혀 없는 외형적인 종교는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른다면 그들은 그것만으로 족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 유명한 토마스 홉스(Hobbes)가 이성에 대해 생각한 것보다

종교를 별로 낫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홉스에 의하면 이성은 '잘 정돈된 일개의 언어'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따른다면 종교란 '잘 정돈된 일련의 말과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 이 자신과만 대화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내면이 악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이미 깨끗했다면 '잔의 외부를 깨끗이 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들의 전제가 옳은 것이라면, 진정, 단지 의적인 혁신만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5.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속을 아시는 분이 자연과 은총, 타락과 회복에 대해서

아주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종교의 위대한 목적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 조상들의 죄로 인해서 완전하게 상실되었던 참된 거룩함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영혼이 새롭게 되는 목적에 답변할 수도 없으며,

또한 이 목적에 도달할 수도 없는 모든 종교는 보잘 것 없는 익살극일 것이며,

마침내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속이는 거짓 교사들을 주의해야 됩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에게 불의한 여러 가지 속임수를 가지고 나타날지라도,

유창하고 부드러운 말과 점잖고 고상한 표현으로 당신에게 진지하게 대한다고 할지라도

성서에 대해 존귀하게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들 에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성도들에게 일단 전해진'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속에 전해진,

단순하지만 전통적인 신앙 속에 거해야만 됩니다. 당신의 병을 아십시오!

그리고 이 병의 치료법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시 나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야 합니다. 날 때부터 당신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온전히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당신은 모두 죽었고 둘째번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살아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죄 중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삶의 원리, 곧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주셨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당신의 모든 병이 치료되고, '모든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온전히 품을 때 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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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오디아|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