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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부동한 하나님의 사랑 / 데이빗 윌커슨

LNCK 2018. 8. 3. 19:58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사랑

The Unrelenting Love of God  / David Wilkerson

 

저는 여러분께 ‘확고부동하다’ 라는 말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뜻은 강도와 노력에 있어서 줄지 않는다는 단호한, 양보없는, 변할수 없고

논쟁으로 설득할 수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확고부동하다는 것은 정해진 길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놀라운 표현입니까?

우리 주님의 사랑은 절대적으로 확고부동하십니다. 그 무엇도 성도나 죄인을 좇는 그의 사랑을

줄어들게 만들 수 없습니다. 시편기자인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시편 139:5,7-8)

 

다윗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심히 높을 때와 낮을 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무나도 축복 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기쁨으로 들려진 느낌입니다. 또 다른 때에 나는 가치 없이 저주 받아 지옥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얼마나 축복 받았느냐는 느낌과 관계없이,

내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상태와 관계없이- 주님, 당신은 거기 계셨습니다.

 

나는 당신의 그 확고부동한 사랑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쫓아낼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내가 스스로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지에 대해 항변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내가 불순종할 때조차

? 당신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당신의 진리에 반해 죄지을 때 ?

당신은 나를 사랑하기를 절대 멈추지 않으십니다.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사정없으십니다.

 

한 때 삶의 바닥에 처한,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나의 영을 하늘과 같은 곳에 앉히셨습니다.

내게 당신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빛을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그 말씀으로 내 발길을 인도하는 등불로 삼으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나도 낮은 곳에 떨어져버렸습니다.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옥에 자리를 폈습니다. 또한 진노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상태의 나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은 너무나 거룩하시며 높으신 분입니다.”

 

다윗은 중대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경건한 장로들로부터

매일 영적 공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선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여러 번의 계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축복과 헌신된 삶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완전히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의 죄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다른 남자의 아내에게 정욕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임신시켰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 남편을 임신한 자신의 아내와

자기를 기대하며 술을 먹여 그 죄를 감추기를 시도하였습니다. 그것이 실패했을 때, 다윗은

그를 살해했습니다. 다윗은 그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가망 없는 전투에 보내도록

묵인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사무엘하11:27)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행위가 대단히 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12:14)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윗이 가혹한 결말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나단은 예언하였습니다.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다윗은 그 아기의 건강을 위하여

하루 종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가 일으킨 끔찍한 일들에 대해 깊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으로 좇으셨습니다.

세상이 이 타락한 남자의 신앙을 비웃는 동안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 한결 같은 사랑의 징조를

주셨습니다. 이제 밧세다는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또 다른 아이를 나았습니다.

다윗은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12:24)

 

솔로몬의 탄생과 생명은 그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다윗을 향한 축복이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으로 줄어들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가장 치욕스러운 때조차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한결같이 돌보아주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증언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바울의 삶에 대해서 읽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파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증오하는데 마치 미친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대적하여 살기등등한 기세로 다녔습니다.

그는 신자들의 집을 수색하여 그들을 감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그들을 잡아낼 대제사장의 권한을 구하였습니다.

 

그가 회심한 후,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 그가 적대감에 가득 차

맹목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학살하던 ? 그 수년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8)

 

요컨대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쫓고 계셨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나를 계속 따라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문자 그대로 높은 말에서 거꾸러뜨리셨던 그 날까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해가 지나면서 그의 낮을 때나 높을 때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지막까지

강렬하게 사랑하실 것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그는 선언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무엇도 나를 그의 사랑으로부터

때어놓을 수 없습니다. 악마도, 마귀도, 권세도, 아무 사람도, 어떤 천사도,

아무것도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몇 년 간 그것이 설교되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말을 믿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 거의 모두는 죄를 짓고 하나님을 실망시킬 때 그 사랑의 진리에 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는 거야” 우리는 모든 문제, 시험, 병, 어려움을 결국

그분의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분을 실망시켰기 때문에

나에 대한 사랑을 멈추신 거야. 나는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어, 그래서 그분은 나에게

화를 내고 계신 거야” 우리는 갑자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확고한 사랑을 인식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이 항상, 우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우리를 좇고 계신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는 이 진리를 붙들지 않고서는 이 삶 그리고 모든 테러와 슬픔들을

맞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며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많은 사역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적들이 그들 자신의 삶에 홍수와 같이 으르렁대며

달려들 때, 그들은 넋을 잃어버립니다. 그들은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포기하셨다고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용납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바울은 우리 모두에게 이 중대한 문제를 한마디로 언급합니다. 그는 고린도의 교회에

두 개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도로 두번째 편지의 끝을 맺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린도후서13:14)

 

여러분도 이 구절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는 종종 교회예배에서 축도할 때 쓰이는 말씀입니다.

보통 목사님들은 기계적으로 이 말씀을 전하며 이것의 위대한 의미를 알아채는 청중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단순한 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하나님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에 가르쳤던 것의 요약입니다.

 

이 절은 3가지의 신령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교통하심.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 세가지 진리를 붙들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가지 주제를 알고 이해한다면

다시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첫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주목합니다.

 

은혜란 무엇입니끼? 우리는 은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알고 있습니다. 은혜가 그 무엇이든지 간에 바울은 그것이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도록”(디도서2:12) 가르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수준에 닿을 수 있습니까? 어디에서 은혜로 가르침 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의 말에 의하면, 은혜는 우리가 경건치 못함과 정욕을 물리치도록

그리고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이 교리의 진리의 기초를 우리의 영혼에 비춰주시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9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언급한 은혜에 대한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가난하심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물질적 부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부요에 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 구절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의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부요, 지혜의 부요, 은혜의 부요, 긍휼에 부요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와 같이 신약은 영적 부요를

기만적인 세상적 부에 대조하여 나타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에 관해 여러분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본보기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값으로 치르시고 다른 자들을 축복하고 세우며 교화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하여서

그가 가난하심으로써 우리가 부요해지도록 그는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을 뽐내거나 스스로 영광 돌리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온통

’나를’,’나의’ ‘나’ 만을 강조하는 ‘나’라는 것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동류 중에서 가장 위대하게 될 수 있었던 모든 기회를 지나치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거나 인정 받으려 스스로를 위하여 기도한 적이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그는 그 신적인 중점을 힘이나 인정을 위하여 주장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희생하며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힘,

능력이나 성취로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체를 세우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영화롭게 하심으로 그것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그는 어느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그의 전능한 업적을 찬양하는 것을 분명 들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겸손히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능가할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내가 한 모든 일보다 더 뛰어난 것들을

이룰 것이다” 후에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했던 귀신을 쫓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바로 그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분은 기쁨으로 춤추셨습니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은혜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봤을때, 교회는 이러한 은혜에서 극히 모자랍니다.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께 축복 받았을 때

진실로 기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다른 목회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해서 받는 것을 보았을 때,

자기 자신의 처지만을 생각하며 말합니다. “나도 몇 년간 기도를 하며 분투하고 있는데,

이제 이 젊은 설교자가 동네에 오는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쏟아 붇고 계셔,

나는 어쩌라구?”

 

여기에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축복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육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여기에 다른 사람의 축복에 즐거워하며 기꺼이 겸손하게 남으려 하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이와같은 은혜를 거의 볼수 없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교회는 자찬, 자만, 이기로 가득하였습니다. 남성과 여성들은 그들의 은사로 자랑하였습니다.

지위와 위치를 두고 겨루며. 심지어 그들은 성찬식상에서 까지 경쟁하였습니다.

부유한 신자들은 그들의 이국적인 음식들을 뽐내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가져올 것이 없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자만한 나머지

그들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로를 고소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바울이 설교했던 것과 정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린도의 교인들에게는

‘나’라는 거대한 도장이 찍힌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오늘 날의 Corinthian(고린도의)이라는 단어는 음탕함과 세속적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신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영에 속한 사람에게 말하듯이

여러분에게 할수 없어서,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린도전서3:1,3) 바울이 말했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아기들은 오직 그들의 필요만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응석부리기 위하여 마구 웁니다.

고린도교인들은 그토록 유치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죄에 대해 관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음에 빠졌고 심지어 근친상간까지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신자들에 대해 생각할 때에. ‘거룩한’이라는 단어가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음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쓰도록 지시하셨던 것입니다.“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빕니다.”

 

이것은 실수였을까요?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타협하자는 눈짓 하시는 걸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교인의 상태에 대해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들의 죄를 결코 간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의 이 들에 대한 은혜로운 호칭은 하나님의 확고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교회에서

바울의 편지가 읽혀지는 것을 들었을 때의 놀랐을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여기 자만한 신자들이 일등석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적인 영감으로 그들을 성도,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태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우리는 잠시 구원 받았다가도

다음엔 버림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10번씩은 바뀌고 10번씩은 넘어집니다.

모든 정직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자신의 상태를 인정해야 합니다. 아주 잘해봐야,

한번의 분투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약속을 믿음으로 의지하며

여전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에 여전한 약함을 가지고 있으며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상태에 따라 판단치 않으십니다. 대신 그는 우리의 지위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연약하고 죄가 많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중심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인해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는

우리의 죄 많은 상태를 보시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 천상의 지위를 보십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은혜로 지키신다고 말하는 것은

신자들이 난잡한 죄를 계속 짓도록 허용하자는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어떤 신자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그의 사랑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너무나도 반복하여 완고하게 그의 마음을 굳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더 이상 그가 세워놓은 벽을 통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은 고린도교인의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지위를 보십니다. 그것이 그분께서 고린도교인들을 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셨을때, 그분은 그들에게는 더이상 변화할만한 방도가

없다는 걸 아셨습니다. 갑자기 그들이 경건하게 될만한 힘이 그들 안에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바울에게 고린도교인들을 거룩하게 된 성도들이라고 부르도록

영감을 주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의 보증된 지위를 알기 윈하셨던 것입니다.

 

연약함과 싸우고 있습니까? 그러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결코 그분의 사랑을

감추지 않으실 것을 아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들을 ‘성도’,’거룩해진 자’,’용납된 자’라고 부르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바울이 기록한 진리를 붙드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롭게 하여 주심과 거룩하게 하여 주심과

구속하여 주심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1:30)

 

다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을 향한 첫번째 편지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오직 주님의 꾸준한 사랑만이

어떤 사람의 마음이라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두 번째 편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힘을 보이시는 방법으로 사랑을 쓰시기로

선택하셨음을 증거합니다.

 

고린도전서 13:4-8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꾸준한 사랑에 대한 강력한 진리를 줍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여러분은 교회 설교나 결혼식에서 이 장을 여러 번 들으신 줄로 압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런 사랑이야.”

본질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누구도 사랑의 이와같은 정의에 따라 살순 없습니다.

아니, 이 장은 전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8절이 이것을 증거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사람의 사랑은 시들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여기 무조건적이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실패와 실망을 인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죄들을

고소한 듯이 바라보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 죄들에 대하여 슬퍼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너무 죄스러우며 사랑 받기 합당치 않다는 모든 항변을 거부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꾸준한 사랑은 절대로 사랑의 상대를 좇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전능한 하나님의 사랑만을 묘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강력한 사랑이 바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고린도교인을 향한

첫 번째 편지에서, 그 사도는 교회를 포기할만한 모든 이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그들을 단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유치함과 넘치는 죄에 대하여 포기하면서.

그는 편지를 이렇게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 대해 손을 땝니다.

여러분은 완전 구제불능입니다. 나는 항상 내 삶을 여러분에게 부어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욱 사랑할수록, 여러분은 더욱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나는 여러분 그냥 두고 떠날 것입니다. 여러분끼리 계속해서 싸워보십시오.

여러분과의 일은 끝장입니다.”

 

바울은 절대 이렇게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그 육신을 멸하도록 어떤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에 대해 읽습니다. 이 말은 너무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의 영이 구원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날카롭게 책망하고 교정하고 경고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유모의 온화한 눈물로 하였습니다.

 

육신적이었던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이 하나님의 승리하신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그들은 그의 말에 녹아졌습니다.

바울은 후에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고린도후서7:11, 9-10)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깨끗케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에 대하여 통분하였고 이제 여러분은 열정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채워졌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깨끗케 하였고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그 고린도교인들은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에 의하여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보듯이, 우리는 이 교회의 거대한 ‘나’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죄의 권세는 깨어졌고, 자아는 경건한 슬픔에 의해

삼켜져 사라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더 이상 은사, 표적 그리고 기적으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초점은 이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큰 기근을 만난 신자들에게

헌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함에 따라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진리로 인한 찔림이 있었습니다. 제가 더 젊었을 때는

교회의 사악한 상태에 대한 메시지를 설교하였습니다. 나는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사람의

통탄할만한 상태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칼과 커다란 쇠망치로 이와 같은 것들을 고치기 위해

말하였습니다. 나는 타협을 겨누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정죄 아래 두었는데 그것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런 식으로 설교했더라면, 확실히 그는 모든 세속적인 것을 깨부수긴

했을 것입니다. 간음자를 타도하며 또 모든 소송을 멈추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해체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책망할 회중이 남아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정면돌파의 설교는 인간적인 열정으로 잘못 인도된 것입니다. 보통 이것은 설교자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 자신만의 개인적 계시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성령의 교통함에 초점을 둡니다.

바울이 사용한 이 그리스어 구절은 “성령의 교제”란 뜻으로 번역됩니다. 처음 고린도교인들은

그러한 교제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교회의 지체는 개인주의로 만연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고린도전서1:12)

 

이러한 개인주의는 사람들의 영적 은사에까지 미쳤습니다. 확실히 고린도교인들은

그들 자신만을 북돋우기 위하여 교회에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으로 나왔고

다른 사람은 예언으로, 또 다른 사람은 지혜의 말씀으로- 그러나 그들은

그 은사들을 자기 자신을 섬기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런 말을 남기고 싶어했습니다. “나는 오늘 예언을 했어” 또는,

“나는 영으로 권세있게 말했어.” 그리고 그것들은 철저한 무질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지시하며, 질서를 위하여 명쾌한 요청을 만들었습니다.

“평안을 유지하기를 배우십시오.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하시오.

당신만이 아닌 지체를 격려하기를 구하시오.”

 

성령의 가장 깊은 역사는 영적 은사 그 이상의 것을 다룹니다. 표적, 이사, 기적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영의 가장 귀한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하나되는 힘으로 하나님 백성 사이의 교제를

세우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성령의 교제에 대하여 말할 때,

여전히 개인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와 성령님”으로만 생각하며

“성령님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함을 누리지”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교제와 연합함을 우리가 이미 이야기하였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두 가지 주제와 묶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두 가지를 깨달으십시오. 그것이 함께 여러분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여러분 삶 속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완전한 단합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하나됨 안에 기꺼이 거하는가에 의하여

이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단합과 하나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질투와 경쟁심을 없애고

더 이상 여러분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형제나 자매가 축복 받을 때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받기 보다는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교제만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그러내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주제는 하나로 요약됩니다.
나는 기꺼이 변화 받기 원하는가?

문제는 “나는 진실로 성령님께서 내가 어디에 변화가 필요한지 알려주시기 원하는가?” 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 뒤에는 목적이 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을 변화시킴으로써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 나는 친절하고 관용적이며 용서하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겨진

선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 그 이상의 것을 공급하십니다. 여러분은 용서 받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분의 죄성에 의해 지배되고

노예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짓기 쉬운 아담의 본성을 타고났습니다.

사실 쉽게 분노하고 질투하며 육욕적이 되며 화내고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본성인 것입니다. 이 본성이 우리 안에서 돈을 사랑하게 만들고,

파괴의 씨앗을 심고, 다른 사람들이 축복 받을 때에 함께 즐기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 된 본성에 대항해 싸우고 계셨다면 여러분은 지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 본성은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육신적이며 언제나 성령을 거스릅니다.

우리의 육신적 본성은 구속의 영역 밖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처형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나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육신이 결코 나를 돕지 못함을 압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옛 본성을 다시 꾸미거나 육신을 개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완전히

새로운 본성의 탄생에 관해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이

이를 위하여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1:4)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그리스도 안의 너의 지위를

확신시키기 원한다. 너는 네 육신적 본성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단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의 성품을 주도록 하여라.

그러나 이것이 일어나기 위하여 단 한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단다:

단지 믿으라.

이 본성의 변화는 오직 믿음 하나로부터 오는 것이다.

너는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임을 믿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떤 신자라도 그가 갈망하는 만큼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말한다면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진실로 나를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서 당신에게 변화될 힘을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모두 믿음의 분량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성품을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주님을 믿을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성령님, 저는 바울이 말하는 만큼의 은혜를 가지고 있지 못함을 압니다.

제가 어디에 변화가 필요한지 보여주십시오.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확고부동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위하여 그분의 성품을 받을 수 있는 그 모든 준비를 해두셨습니다.

나는 당신에 의해 변화될 힘을 받았음을 압니다. 당신의 성품을 주시옵소서,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