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9GzgSANCRJI&feature=youtu.be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858~1902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1858년 2월 6일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년 12월 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아펜젤러는 성서를 번역하였으며(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감리교 인쇄 출판소를 확장하여 각종 선교잡지를 발행하기도 했고,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한편
1895년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보다 앞서 인천내리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내리교회의 시작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펜젤러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제물포 항에 도착했는데
이 때에 약 45일 동안 제물포에 체류했다. 이것이 교회의 뿌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교회의 창립 기념일은 1885년 7월 29일로 지키고 있다.
정동교회에서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지회가 결성되었는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중요한 인물들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아펜젤러(H.G.Appenzeller)는 서울 정동(貞洞)에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최초로 설립한다. 1885년 8월 아펜젤러가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 등 두 학생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배재학당은 정동에 있는 민가 몇 채를 사서 1886년 신축·이전하였으며, 이 해 6월 8일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그는 서울, 평양, 인천, 수원, 공주, 대구, 전주 등지로 여행하며 전도활동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의 아펜젤러의 사역은 그의 사역기간 5년동안 체중이 180파운드에서 131파운드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정열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 주일, '레이놀즈' 미 남장로회 선교사 주재 구역의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순직하였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아펜젤러의 순직 직전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1)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와
2) 함께 동승한 이대 여대생들을 구조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도 실종(사망)했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아펜젤러의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또한 이화학당의 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아펜젤러 기념비가 정동교회에 세워졌고,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동방의 한 작은 나라, 아직 어둠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의 빛으로 밝히기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사르던 선교사 아펜젤러는 결국 이 나라의 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의 죽음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오늘 이 땅에는 1200만이라는 열매가 맺혀졌다. 이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로부터 얻은 빚을 갚을 때이다.
그 빚을 갚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아펜젤러,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편에 앉히시고 그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셨을 것이 분명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그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한국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설교하고 싶다."
서울 서대문 근처의 ‘영은문’으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이후 헐렸고 독립문이 세워졌다.
아펜젤러가 이북 내지선교를 향해 가는 도중 촬영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은 한국의 일상을 기록한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에서
영아소동에 대한 내용을 언급했다.
이북 지방 전도여행을 떠났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조선 정부의 금교령이 내려진 후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가톨릭 선교사와 다르게 개신교 선교사의 이 같은 순응은 조선 정부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펜젤러는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 배재학당에서는 가장 우수한 학생 4명이 자발적으로 친구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한 학생은 4명의 친구를 전도했다. 다른 학생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경험을 겪기도 했다.
나머지 학생은 마을에서 전도하다 여관에 들러 머물고 있었는데
포교를 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수령의 병사들이 들이 닥쳐 이들을 잡아가고자 하였으나
여관 주인이 병사들에게 이들을 고발하지 않고 대신 매를 맞고 돈을 주어 무마시켰다.
이러한 학생들의 신앙 체험은 아펜젤러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조선 정부의 금교령으로 선교가 금지되었던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고,
미약하게만 보였던 한국 학생들이 직접 복음을 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펜젤러는 이들의 행동을 자신의 일기에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교하여 매우 고무적이었다”고 기록했다.
조선 정부의 금교령 결과
1888년 5월 금교령 시행 후, 베델 예배당은 폐쇄됐고 이후 예배당을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사정이 좋지 않은 가운데 예배당 사용을 강행한다는 것은
선교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민심을 누구보다 잘 파악했던 아펜젤러는 개신교 예배당이
금교령의 주된 표적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톨릭 선교사의 명동성당 건축처럼
무리수를 두어 한국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임시 예배 장소로 그의 주택과 외국인 연합교회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여신도들은 이화학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눈에 보이는 베델 예배당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 선교가 아펜젤러에게는 무엇보다 우선 순위였던 것이다.
아펜젤러의 판단은 오늘 우리에게 적잖은 교훈을 주고 있다.
아펜젤러는 교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예배당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예배당 밖의 한국 민심이 곧 선교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점은 오늘 한국교회와 해외 선교사들이 귀담아 들을 부분이다.
영아소동
아펜젤러가 동역자들과 선교의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한국의 민심을 살피고 있을 무렵
개신교 선교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는다. 그것은 1888년 6월에 있었던 영아소동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수구파였던 사람들이 기독교의 정착과 근대화를 염려하여 퍼뜨린 소문이었다.
영아소동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어린 아이를 잡아먹고 눈은 사진기 렌즈로 쓴다는 해괴한 소문이었다.
우스운 소리 같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서양인을 ‘양이(서양오랑캐)’라고 생각하였던 터라
민중에게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민중들은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스크랜턴 대부인의 이화학당, 스크랜턴의 시병원 등
외국 선교사들의 건물로 몰려가 아기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은 시위대의 손에 이끌려 나와야 했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게 변해 해외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자국 공사관에 보호를 요청하였고 조선 정부는 선교사와 외국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소문은 거짓이며 근거 없는 소문을 내는 자는 잡아들일 것”
라는 방까지 붙여 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하지만 소문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조선에 전염병이 돌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됐다.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은 외면하지 않았고 민중에게 다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병을 치료했다.
민중들은 이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진료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었고
영아소동으로 격앙됐던 감정도 누그러졌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예수님의 정신이 실현되어
외국의 선교사와 민중들은 이전보다 더욱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 순회 선교의 시작
중단되었던 내지 순회선교는 재개되었다. 1888년 10월부터 이북 지역을 시작으로
1889년 3월까지 내지 선교를 위해 한반도 전체를 순회하였다.
순회 거리는 대략 2945㎞. 거리만으로도 선교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10월부터 시작된 순회선교는 해주를 비롯한 이북 지역뿐만 아니라 이남 지역까지 거쳤는데
1889년 2월에는 공주,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하였는데 전국 8도 가운데 6도를 방문하였다.
순회 선교의 결과는 27명에게 세례를 주어 결신자를 양성하였고 예비 신자는 29명이었다.
예비 신자 가운데서 2명의 정교인을 받았다.
당시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을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박해를 각오해야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남들보다 부지런히 일을 하더라도 손해를 감수해야 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남들보다 더 바르게 살아야 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44명이나 되었다.
사망이나 이주 등 불가피한 사항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신앙의 선조들이 일구었던 수많은 희생은
오늘 우리가 마땅히 기억해야 될 신앙의 유산이며 계승해야 될 귀한 가치이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주는 교훈을 기억하며
우리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발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주요연표※ - 조병철 목사(감리회본부) 참고
1858. 2. 6. 미 펜실베니아주 서더튼 출생, 루터교 부모
1876. 10. 1. 영적 생일-매년 기념함
1877. 웨스터체스터 주립사범학교 졸업
1882. 프랭클린 마샬대학졸업
1884. 12. 17 E. J.Dodge 양과결혼
1884. 12.말 한국선교사로 임명
1885. 1. Drew 신학교 졸업
1887. 3.14. 배재학당 현판식
1887. 12. 25. 첫한국어 설교
1888. 가을 배제제본소(삼문출판사)
1889. 5. [교회] 발간
1890. 1. 종로서점설치
1890. 6. 25. 대한성교서회 회장 피선
1892. 1. 영문 월간지 [Korean Repository] 발간
1895. Korean Repository 속간(~1898까지)
1895. 9. 9. 정동제일교회 정초식
1897. 2. 6. 독립협회창설,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창간,편집인
1900. 9. 9. 신약전서 출판기념예배
1902. 5. 남한지역 총리사로 임명
1902. 6. 11.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중 선박충돌사고로 하나님의 부름받음(군산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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