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화관 롬2:28
이재철 목사님 글. 2001년 당시 인터넷에서 퍼 옴.
※뉴에이지 영화 공방
미국의 천주교 계통에서는 영화 '라이언 킹'을 교육적이라며 추천한다.
하지만, 한국 일각에선 똑같은 영화를 뉴에이지 영화로 분류해서 보지
말라고 한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가?
※세상 음악은 모두 사탄 음악인가?
세상 음악 중에 고전음악, 가곡 등 비교적 건전하고 정서적인 음악이 있다.
음악이 하나님 찬양하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으면, 모조리 사탄 음악일까?
그렇다면 질이 형편없고 수준이 저급한 문화라도 하나님 언급만 들어가면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기독교 문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역사를 고찰해 보자
역사적으로 교회가 사회와 문화, 소위 세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 왔는지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①성탄절의 유래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그런데 그리스 정교회는 지금까지도 1월 6일을 성탄절로 삼고 있다.
역사상 기독 교회는 12월, 1월 3월 4월 그리고 5월에도 성탄절을 지킨 적이 있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정확한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치던 것을 생각하면 겨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겨울에는 추워서 들에서 밤을 지새울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12월 25일이 거의 모든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성탄절이 되었는가?
본래 12월 25일은 로마인이 섬기던 태양신을 기념하는 축제일이었다.
성탄절이 로마 사회에 큰 명절이 되면서, 태양신 축제일도 없앨 겸 '덮어쓰기'가 되어 버렸다.
이를테면 한국의 석탄일을 성탄절로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가 된다.
②십자가의 유래
오늘날 십자가는 기독교회의 가장 큰 상징물이다.
교회 지붕위에도 십자가, 강대상에도 십자가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에는 기독교적 유물이 전혀 아니었다.
구약에 십자가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십자가라는
형틀이 본래 유대인들의 것이 아니었고, 로마인이 쓰던 형틀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형틀 위에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 형틀을 의미 없다고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의 형틀을 구원의 상징으로 적극 수용했다.
만약 2천년 전 주님께서 프랑스의 기요틴(단두대) 위에서 돌아가셨다면
지금 우리는 예배당 앞에 기요틴을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릴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옛날 한국의 죄수에서 씌웠던 칼을 쓰고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지금 분명히 한국식 칼을 걸어 놓고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이다.
③성경을 기록한 언어도 그렇다.
본래 유대인들이 쓰던 언어는 히브리어였지만
구약성경의 일부는 이방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부분을 구약이 아니라고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어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것 역시 유대인의 언어가 아닌, 이방인의 언어다.
그리스어는 구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와는 전혀 이질적인 언어다.
당시 통용하던 세속언어를 도구로 삼아 거룩한 신약 성경이 기록된 것이다.
로마 제국시대에 성경은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성경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성경은 수없이 많은 언어들로 번역되어 있다.
그 모두가 -이방인의 세속적인 언어였지만- 하나님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때 곧 성경의 언어가 되었다.
④교회 건축 양식
유럽에 가면 웅장한 교회 건축 양식이 있다; 고딕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등
그러나 그 중 어떤 것도 성경 속에 있었던 양식은 없다.
모두 성경 밖의 양식들이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의 양식이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세속적인 건축양식으로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예배당은 거룩한 하나님의 예배당이 된다.
⑤카타콤 교회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카타콤-지하 묘지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렇지만 그 지하 묘지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쓰였을 때,
카타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예배당보다도 더 거룩한 예배당이 되었다.
⑥악기도 마찬가지
우리가 오늘날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피아노나 오르간
그 어느 것도 성경 속의 악기는 아니다. 다 세속적인 악기이다.
그렇지만 그 악기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악기가 된다. 기와집 형식으로 예배당을 지으면 은혜가 덜 되고
가야금으로 연주하면 은혜가 반감된다는 생각이야말로 철저하게 비 성경적이다.
⑦로고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말씀'으로 계시던 바로 그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라는 단어를 그리스어 '로고스'로 기록했다.
로고스 단어의 당시 통용되던 본 뜻은 '만물을 지배하는 이성적인 원리'였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만물이 어떤 이성적인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었다.
사도 요한은 그와 같은 사고 체계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만물을 지배하는 이성적인 원리,
곧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세속적인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용어는 곧 성경적 용어가 되었다.
오늘 로고스라는 단어를 놓고서 '아, 이것은 이성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로고스라고 하면 전능성과 인격성과 영원성을 갖춘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⑧바울의 아덴 선교
"바울이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2)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는 신화의 나라다.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 포세이돈, 아폴론, 디오니소스 수없이 많은 신들을 만들어 냈다.
바울은 거기서 ‘알지 못하던 신’을 위해 만들어진 제단을 발견했다.
그것은 우상을 위한 제단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어리석은 제단을 헐어 버리거나 파괴하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도리어 그 제단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로 삼았다.
“너희들은 '알 수 없는 신'을 알고 있구나.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바울은, 세속적인 제단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교의 접촉점으로 수용했다.
물론 거기서 선교의 열매들을 얻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무엇이든지 중심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도구가 된다.
처음부터 기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구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쓰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겉모습이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중심이 중요하다.
아무리 겉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로 신앙적이거나 기독교적인 문화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겉으로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았다 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문화다.
◑문학에서의 적용
셰익스피어의 소설 속에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비기독교적인 문학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속에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왜 그의 소설만 보면 영혼이 정화되고 마음이 순화되는가?
앙드레 지드는 언제나 하나님을 위하여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 속에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거기에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겉형식을 떠나, 정말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진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영화에서 적용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는 것만으로
참다운 기독교 영화가 될 수 없다. 정말 믿음의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면
스필버그 같은 진짜 감독이 되어야 한다.
어떤 이는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는 모두 뉴에이지 영화라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유대인 어머니 밑에서 철저하게
성경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성경의 뚜렷한 메시지가 있다.
'레이더스'나 '쥬라기 공원'같은 영화를 통해서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보여 준다.
그 유명한 '쉰들러 리스트'에서 주인공 쉰들러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쉰들러가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만지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쉰들러의 그 행위가 인본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진짜 감독이 되어 이와 같은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가 될 수 있다.
▶실력을 갖추라
정말 청년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 사용하시는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공, 재능에 따른 진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은 두 라인의 사람을 쓰신다.
①한 라인은 <행동파> 사람이다.
베드로, 엘리야, 엘리사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②또 다른 라인은 <실력파>다.
모세 오경을 기록한 모세는,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인 애굽 왕궁에서
왕립 교육을 받았다.
다니엘서를 기록한 다니엘 역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총명한 청년으로 뽑혀서,
바벨론 왕궁에서 바벨론 왕립 교육을 받았다.
예언서를 기록한 예레미야/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 역시 모두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신약을 삼분의 일이나 기록한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하나님은 진짜 실력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기독교 문화
하나님께서는 두 라인의 사람을 쓰시므로 그대들은 선택해야 한다.
진짜 행동파가 되든지 아니면 진짜 실력파가 되든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자신이 선택한 바를 위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 세상의 어떤 '세상적인' 것이든 당신이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도구로 쓰고 가꿀 때,
세상은 정말 밝고 멋지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상으로 화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결과로 저절로 나타나는 결과가 기독교 문화이다.
기독교 문화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언제나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그 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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