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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추적자 / 존 스토트

LNCK 2018. 10. 10. 08:02

 

◈천국의 추적자                               49:1                                출처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중에서
존 스토트 지음 / IVP 

49:1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제 존 스토트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저 자신의 결단 때문도 아니며,

바로 '천국의 추적자 (원문엔 사냥개)' 때문입니다.

 

즉 제 마음대로 가고자 도망할 때조차도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신 그분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은혜롭게도 저를 추적하지 않으셨다면,

오늘날의 저는 없을 것입니다.

 

'천국의 추적자 (사냥개)'!

매우 인상적인 이 표현은

프랜시스 톰슨이 그의 시에서 쓴 표현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되지요.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속 미궁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
    한순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음울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 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함으로,

 

    두드린다- 그리고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그것은 끈질기지만 목적이 분명하고, 자애롭지만 무자비한 추적입니다.

이 추적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매 연에서 '이 대단한 연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네게서 가지고 간 모든 것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것을 내 품에서 찾게 하려는 것이라...
일어나라,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내게로 오라!"

프랜시스 톰슨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표현한 것입니다.

제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단한 연인'의 추적 때문인 것입니다.

▲말콤 머거리지는 자신의 경험을 2인칭 대상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경험을 좀더 극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맞습니다. 당신은 거기 계셨습니다. 나도 압니다.

내가 아무리 멀리 그리고 빨리 달려도

여전히 내 어깨 너머로 바짝 따라오는 당신의 모습을 흘끗 볼 수 있었지요.

 

그러면 그 어느 때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멀리 달리면서

"이제는 정말로 도망쳤다"고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요, 당신은 여전히 내 뒤를 따라오고 계셨습니다.

먹이를 쫓아가는 이 '거룩한 추적자(사냥개)'가 마지막 도약을 준비할 때 우리는 떨게 됩니다...

도망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한 추적의 느낌을

C. S. 루이스보다 더 감동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없습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회심하기 얼마 전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재학 시절 그리스도께 실제로 굴복한 순간을

다음과 같이 인상적인 말로 묘사했습니다.

'방에 혼자 있을 때 일만 잠시 놓으면 그토록 피하고 싶어했던 그분이 꾸준히,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가오시는 것을 밤마다 느껴야 했던 내 처지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내가 너무나도 두려워했던 그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았다.

1929년 여름 학기에 나는 드디어 항복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그의 준엄함은 인간의 온화함보다 따뜻하다. 그의 강요는 우리를 해방시킨다.'

사도 바울, 성 어거스틴, 그 외에도 예수님 오신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문을 두드리거나 추적하는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저 존 스토트 자신도 그러한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무엇이 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문을 두드리며 문 밖에 서 있는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신 그리스도 그분이셨습니다.

저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모든 형상 이면에,

그리고 모든 현상을 초월하는 곳에, 궁극적 실재의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둘러싼 듯한 안개를 저는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청년기의 강렬한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제가 바라는 저의 미래상으로 영웅적인 그림을 그려두었습니다.

즉 친절하고, 이타적이고, 공공을 위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분명한 그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심술궂고, 자기 중심적이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그림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 앞에 선 이 낯선 분은 그 소외감과 패배감을 통해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 설교자가 제 딜레마에 빛을 비춰 줄 때까지 말입니다.

 

그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소외되어 있던 저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죽으셨고,

제 패배를 승리로 바꾸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의 주관적인 필요와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공급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밀접하게 일치했습니다.

 

그 후로 그리스도의 두드림은 더 커지고 더 집요해졌습니다.

제가 문을 연 것일까요, 아니면 그분이 문을 여셨을까요?

물론 제가 열었지만, 그분의 끈질긴 두드림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고,

심지어는 불가피하기까지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우리 모두가 생애의 어느 시점엔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찌름을 느끼고 두드림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을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려고 할 때,

그가 우리를 추적하고 경고하시는 방법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망치는 것을 멈추고, '이 위대한 연인'의 감싸안음에 굴복한다면,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 자랑할 여지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깊은 감사와,

그의 사랑의 섬김 안에서 시간과 영원을 보내리라는 단호한 결심만이 있을 뿐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