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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와 요단

LNCK 2018. 10. 10. 11:05

 

 

◈홍해와 요단                 수3:14-17             09.03.08.설교스크랩

 

◑홍해는 은혜(기적)로, 요단강은 믿음으로 건너다

 

이스라엘은 요셉 때 있었던 7년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흉년으로부터 지켜내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어 대비하셨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총리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총리이었던 요셉 때문에 고센 땅에서 아주 편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7년 흉년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보다 애굽 땅이 더 살기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들은 애굽에서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註. 창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하나님은 4대만에 돌아올 것을 작정하셨으나

실제로 4백년 만에 돌아온 것을 보면,

‘애굽이 좋아서 눌러 붙어 살았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단, 애굽에 내려갔다가 2백년 만에 돌아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는 것을 위기로 느꼈던 애굽 사람들에 의하여

저들은 결국 애굽 땅에서 종이 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들을 낳으면 죽여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신앙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세상의 종이 되고

결국은 죽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면.. 결국 그는 사람의 종이 되고 맙니다.

 

죽고 망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게 약 4백년입니다.

창세기 50장과 출애굽기 1장 사이에는 약 4백여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산 세월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보다 애굽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산 세월입니다.

 

4백년 만에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자마자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2:23~25

 

 

그리고 저들을 구원하십니다.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냅니다.

그리고 결국 출애굽을 감행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40년간 광야에서 믿음 훈련

출애굽 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에 가로막히게 됩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마병들이 좇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갈라놓으신 홍해를 눈으로 확인한 후 건넜습니다.

 

일종의 시청각 교육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 믿음을 가지고 싸워 가나안을 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와 같은 하나님을 눈으로 목도하고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쉽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들은 절망했고 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하셨습니다.

 

▲드디어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다

드디어 광야의 훈련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널 때에는 물이 많아 언덕에 넘칠 때였습니다.

 

홍해는 갈라진 후에 건너게 하셨지만 요단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들어간 후에야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은 디디자 그때 요단강 물이 끊어졌습니다.

저들은 그 요단을 건너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물이 갈라짐을 보고 건너기  vs 건너니까 물이 갈라짐

 

▲홍해 기적과 요단 기적은 다르다

보편적으로 볼 때 초신자들에게는 홍해의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들에게 성숙한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믿은지 오래 된 교인들에게는

‘홍해의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생활을 통하여 믿음의 연수가 쌓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요단의 믿음’을 제시하십니다.

언덕에 물이 넘치는 요단강을 하나님을 믿고 들어가라 하십니다.

들어가면 그 때 물이 끊어지는, ‘믿음의 기적’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출애굽 은 쉬워도 가나안 입성은 쉽지 않다

출애굽 한 사람은 많았으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많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떠나 온 사람 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성공적으로 탈출하였으나 정작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요?

대부분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홍해는 건너 출애굽에는 성공하였으나

정작 요단강은 건너지 못해 그냥 가나안을 바라만 보고

광야에서 죽는 것은 아닐까요?

애굽은 아니지만/가나안도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기... 어렵다

물론 애굽에서 출애굽 한 것만도 대단한 것입니다.

최소한 종에서는 해방이 되었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야만 하는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에서는 벗어났습니다.

비록 광야에서 고생은 하였지만 사실 애굽보다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애굽에서 탈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애굽 탈출이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 입성이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애굽탈출에서 끝납니다.

갈라진 홍해는 건넜지만

언덕까지 물이 넘치는 요단강에는, 발을 믿음으로 내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했을 때에는

물이 언덕까지 넘쳤다고 하였습니다.

그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강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제사장들이 믿음을 가지고 요단강에 발을 내딛자마자 즉시 물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물이 무릎에 찬 것도/허리에 찬 것도/목에까지 찬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들어가자마자 물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예수님 말씀하신 것과 같이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

강물이 머리 꼭대기까지 찬 후에야 요단이 갈라지는 수준의 것이라면

그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냥 요단에 발을 내 딛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단의 물은 끊어지고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홍해의 기적을 요구합니다.

갈라지는 것을 보면 들어가겠다는 것이지요.

 

 

◑헌금에 적용

 

위 원리를 적용할 곳이 너무 너무 많지만,

일단 사람들이 피부에 와 닿게 느끼는바 헌금(십일조)에 적용해 봅시다.

 

▲믿음으로 대책 없이 요단강에 들어가는 예

오래 전 영국의 후배 목사 교회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유학생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국 집회 때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였었습니다.

그 설교에 나름 은혜를 받은 그 유학생 부인이 울면서 저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지금 십일조를 하면 애기 밥을 굶겨야 하는데

그래도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제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힘들고 어려운 삶에 대해서

참 많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에 저는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애기 밥을 굶기면서까지 십일조를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성경에 없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잘 대답을 한 후 끝에 토를 달았습니다.

그러나 나라면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런 불경스러운 표현을 했었습니다.

‘가끔은 하나님을 궁지로 몰아야 해요.’

 

▲욕심 때문에 여유 없이 사는 사람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다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 여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늘 쪼들리는 삶을 삽니다.

100억 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200억 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허리띠를 조이며 200억 원의 재산을 향하여 전진합니다.

 

사람들은 다 욕심 때문에 가난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 모두에게

온전한 십일조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요단의 물이 끊어 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언덕까지 물이 넘쳐흐르는 요단강에, 대책 없이 걸어 들어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궁지로 몰아넣기

앞에서 십일조를 하면 애기 밥을 굶겨야 한다는 유학생 부인이

만일 저의 잔인해 보이는,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그 말을 곧이듣고

정말 그렇게 하였다면.. 정말 하나님이 궁지로 몰린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