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마른 자를 고치심 막3:1~6 여러 글 취합
본문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손 마른 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과 할례를 받는 일은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의 지침들입니다.
동시에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신앙심을 저울질하는
경건의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신앙의 허구성을 본문에서 지적하고 계신데요...
▲3: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예수님이 작심하신 것입니다.
가장 큰 치유가 일어나야 할 날은 안식일이요,
그 장소는 회당 임을 보여주시려고 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치유’는 물론
-육신적 치료만 뜻하지 않고
-육신적 치료를 포함하는 영, 혼, 육의 전인적 치료를 뜻하는데
이것이 바로‘구원’이죠.
이 본문을 대할 때면, 이사야 58장이 생각납니다.
거기에 ‘참 금식’에 대해 이렇게 나오죠.
사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3: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지금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회당 가운데 세워놓고 말씀하십니다.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이 질문이 본문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예수님은 질문법을 써서, 즉 질문을 던지시면서
(그들의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더 강조적이고, 더 효과적인 교수법이죠.
그런데 이 질문이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의 일반적 사고체계와 상당히 다릅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고, 대신에 이렇게 합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고, 대신에 이렇게 합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옳으냐?'
예를 들면, 예수님은 상/하 두 단계로 질문하시는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중/하 삼 단계로 질문하거나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옳은 일/그른 일.. 두 단계로 물으시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옳은 일/가치 중립적 일/그른 일.. 이렇게 세 단계로 이해합니다.
지금 이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돌직구를 던지신 것인데요,
그 질문의 뉘앙스는 '안식일을 잘 지킨다는 너희는 옳지 않다' 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여기지만,
너희는 안식일에 선한 일도 하지 않고, 목숨을 구하지도 않으므로
그건 옳지 않다! 안식일을 잘 못 지키는 것이다!'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자기들을 공격하는 말인줄 바로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마지막 6절에 '나가서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다시 한 번 논리를 정리해 봅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다 .. 이러면 우리는 이상합니다. 약4:17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가치 중립이다 .. 이게 우리 일반적 사고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아이들이 굶어 죽어간다고 TV에서 영상이 나옵니다.
그러면 거기에 반응하는 어떤 액션을 우리가 취하지 않았다고, 그걸 죄로 여기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은 '가치 중립'으로 여깁니다.
가난한 애들 먹을 것을 빼앗아 먹는 것.. 그것은 죄로 여기지요.
지금 회당 가운데 손 마른(오그라든) 사람이 서 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장애우로서 그는 상당히 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육체적, 경제적, 또한 거기서 파생되는 정서적 '가난'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악한 일을 하는 것이며
그의 목숨을(생계를) 구하지 않는 것은, 그를 죽음으로 내 모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당시 회당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그 손 마른 사람에게 .. 어떤 액션도, 어떤 선행도 베풀지 않은 것으로
본문의 정황(분위기)상 여겨집니다.
그럼 지금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이 악한 일을 행하고 있었나요?
(자기들 생각으로는, 또한 우리들 생각으로는) 아닙니다. 가치중립니다.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있었나요?
(자기들 생각으로는, 또한 우리들 생각으로는) 아닙니다. 가치중립입니다.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자기들 생각으로는, 또한 우리들 생각으로는
그 유대인들은 아무 선한 일도 안 했지만, 동시에 아무런 악한 일도 안 했습니다.
그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안식일을 외적 형식으로 나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예수님의 언변은
‘너희들은 악을 행하고 있다, 너희들은 목숨을 죽이고 있다’
이런 뉘앙스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다’ 약4:17
이런 멘탈을, 지금 예수님은 갖고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선을 행하지 않으면.. 가치 중립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며
사람을 적극 살리지 않으면.. 가치 중립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 한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준수하는 것보다는
죽어가는 사람 한명 살리는 일을 훨씬 기뻐하십니다.
일례로, 자기 부모님이나 친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 집사님은, 평일에는 직장 일이 바빠서 못 가고,
주일 날에는 교회 봉사가 바빠서.. 통 병원에 가서 부모님을 찾아뵐 시간이 없습니다.
물론 두 군데 다 가야 되지만,
만약 꼭 한 군데 밖에 갈 수 없다면, 많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가지 않습니다.
▲3: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예수님이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노하신' 표현이 성경에 몇 군데 안 나옵니다.
같은 단어 (헬, 오르게)가 사복음서에 4번 더 쓰였는데,
KJV성경은 모두 진노 wrath 로 번역했습니다. *막3:7, 눅3:7, 눅21:23, 요3:26
본문에서만 '노하시다 anger' 로 번역했는데, 아주 안색이 변할 정도로 급하게 화를 내신 것입니다.
그 손마른 사람에게 노하신 게 아니라, 회당에 모인 사람들, 경건한 유대인들에 대해서 노하셨죠.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해 '탄식하십니다' 슬퍼하며 동정적으로 바라보시는 거죠.
예수님의 감정이 지금 묘하십니다. 2가지 감정이 막 교차하십니다.
그들의 완악함에 불같이 화를 내려하시다가도,
그들의 처지(인간의 타락한 속성)를 아시니 불쌍한 마음으로 한 숨 쉬십니다.
그리고 본문의 주제와 약간 빗나간 내용이긴 하지만
본인이 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어도, 만약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치료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장애우가 예수님 말씀에, 한 번 만에 기세 당당하게 쭈욱 손을 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하며 폈을 것입니다.
‘주여 오랫동안 굽어 있던 제 팔이 어찌 단 번에 펴지겠습니까마는
주님이 명하시니 말씀에 순종하여 한 번 펴 보겠습니다!’ *눅5:5참조
▲3: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은 회당에선 환영 못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에 야외에선 환영을 받으십니다. *막3:7~12
막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정리하면
지금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죽이는 종교, 살리는 종교,
-죽이는 법, 살리는 법.. 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죽이는 법, 죽이는 종교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불 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거의 진노 wrath 를 선포할 뻔 하셨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가치 중립이 아니라, 악한 일을 하는 것이며
죽어가는 자의 목숨을 구하지 않으면, 가치 중립이 아니라,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 내 주변을 한번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그 일에 일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그것은 가치 중립이 아니라, 죄인 것입니다.
살릴 줄 알고도 살리지 않으면.. 그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
*눅10장에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제사장, 레위인은
길가에 버려진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살릴 수 있는데도 지나쳤지만,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살렸습니다.
또한 눅15장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헤서
목자는, 포기하지 않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도록 찾았음을 묵상해 봅니다.
'분류 없음 > 20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 필립 얀시 (0) | 2019.08.16 |
---|---|
결혼과 독신 2 (0) | 2019.04.30 |
교회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 월드 챌린지 (0) | 2019.01.09 |
무슨 뜻이냐 묻거든 (0) | 2018.10.15 |
부흥을 방해하는 것들 / 찰스 피니 (0) | 2018.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