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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독신 2

LNCK 2019. 4. 30. 18:03

결혼과 독신 2               고전7:8~17           출처             

 

 결혼과 독신 1

 결혼과 독신 3

 

일단 그 시대 자체는 헬레니즘 문화에 철저히 영향 받고 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는 이원론, 그것이 발전해서 영지주의를 만들어 냈는데

그 원리는 간단합니다.

육은 더러운 것이고, 영은 깨끗한 것이다..

 

그래서 육에 대해 두 가지 극단이 생겼는데

방종주의와 금욕주의입니다.

 

이 금욕주의 부류속에 또 어떤 극단이 생겼느냐면

심지어 교회 안에 결혼한 사람들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마라고 하며,

정 그것을 못 지키겠으면 헤어지라고..

이런 논리로 성도들을 호도하고, 오해시키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넘쳐 났습니다.

 

고린도교회 자체적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격론을 벌이다가 사도바울에게 질의 형식으로

주제별로 서신을 띄운 겁니다.

 

사도바울은 거기에 대한 답신으로서

너희들이 한 말을 들어보니까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문제에 대하여는..’ 하며 쭈욱 답변을 시작하는 겁니다.

 

이 시간에는 고전7:8부터

이혼과 독신 문제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것은

우리교회 청년들 중에 워낙 독신들이 많기 때문에

까딱 잘못 얘기했다가는 독신에 용기를 얻을 것 같아서 제가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순서에 따라서 사도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어떤 원리를 제시하는가를 담담히 들으면서

자기 현재 상황, 또 앞으로의 설계에 중요한 기초와

또 원칙으로 삶은 순종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고전7: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돌아온 싱글(돌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면 그가 공회원이었고, 랍비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문화배경상 기혼자가 아니고는

그 위치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틀림없이 결혼을 했던 사람일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별을 했느냐, 이혼을 했느냐

그게 뭐든지 본문과 크게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사도바울이 나와 같이 지내는 것이 좋다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꾸 뒤의 말만 달랑 외워서 있지 말고,

그래서 쓸데 없는 용기를 얻습니다.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때문에!

 

그런데 8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여기 결혼하지 않은 자과부가 짝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보통 우리의 말 습관에

과부라는 말을 쓸 때 자연스럽게 우리 식으로 말할 때

홀아비를 같이 붙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지 않는 자는 여기서 총각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결혼 경험이 있는데 사도바울처럼 이혼을 했거나

아니면 상처喪妻를 했거나

그래서 결과적으로 혼자된 남자들,

우리는 보통 홀아비라고 하죠.

 

그래서 8절을 다시 쓰면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이런 뜻입니다.

 

이미 결혼 한 번 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그냥 나와 같이 결혼 다시 하지 말고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은

사도바울이 이것을 원리로 제시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까요?

 

다음 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여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나옵니다.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조건은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절제의 성격은, 정욕을 뜻하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욕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런데 이 성욕이란 것은 댐 안의 물같아서

말하자면 이것이 제대로 활용되고

정상적인 배우자나 상대에게 쓰일 때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이 되는데

 

이것이 오용되고 남용될 때

남의 우물을 마시거나 딴 짓을 할 때

이것은 사회적인 큰 분란과 아픔을 엮어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여기서 전제조건을 붙이는데

만일 절제할 수 없어서 정욕이 불타는 것 같은 상황이 될 때는 결혼해라!

 

자 그러면, 이 말을 하게 된 이면의 배경을

여기서 잠깐 멈춰서 생각해 봅니다.

 

사도바울의 인식 속에는

싱글이냐, 아니면 결혼을 하는거냐?

이런 형식의 어떤 중요점을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죠.

결혼을 해도 되고, 자기처럼 혼자 지내도 된다.. 라는 이야기를

지금 이 본문 속에서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 사람들은 이혼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만큼 굉장히 심각한 사회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19장을 찾아보십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질문합니다.

이 질문을 왜 했는가 하면, 이때 당시에

헤롯이 자기 남동생의 아내(제수씨, 헤로디아)를 빼앗습니다.

그를 빼앗기 위해 자기가 데리고 살던 아내를 버립니다.

이것이 고위층에 굉장한 사회적 추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땅에 사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다 알았어요.

이 고위층의 비리와 부도덕한 행태에 대해서

세례요한이 분기탱천해서 일어나서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바로 목베임을 당하죠.

 

유명한 사건이었어요.

자 그럼 여기서 만약에 예수님이

그건 안 돼!’ 그랬다면 권력자인 헤롯왕가에 반기를 드는 게 되죠.

 

여기서 예수님이 분명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지금 예수님은 이혼 찬성입니까, 반대입니까?

반대입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옳거니!’ 싶어서 이렇게 시비를 겁니다.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24장에 이 대목이 나옵니다.

모세는 성문화(문서화)시켜서 이혼을 언급했어요.

아래 구절도 그걸 이렇게 말씀합니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자 우리 신명기 24장으로 가 봅니다.

 

24: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위 구절은 모세가 쓴 것입니다.

모세의 논리라면, 이혼을 허용한 것입니다.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이 신24장에 성문화 된 법의 진의를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기 1절에 보면 수치가 나옵니다.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그러면 이혼증서를 써서 내 버려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때나 유대인은

모든 남녀간 부부의 도리 중에

남자가 여자를 택할 권리가 있고 버릴 권리가 있지

여자에겐 일절 그럴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유대남자들은 여자 버리기를

여자 버리기를 돌 같이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쉽게 버리냐면,

웃기지도 않는 조건으로 버립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수치

음행을 연상하게 됩니다만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남자 마음에 안 드는 일을 얘기합니다.

 

예를 들면 식사를 잘 준비하지 못하는 아내

별별 꼬투리를 잡아서 아내를 쉽게 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도 이런 일이 사회공동체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니까

모세가 법으로 만들어서 함부로 여자를 못 내쫓도록

무슨 공문서 하나를, 증서를 만들려면

그것도 공공기관에 가서 써야 되니까.. 그걸 좀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그때 당시는 그게 필요한 법이라서

모세가 만든 것이죠.

 

그 증서를 당시에 나무이파리에 써서 주었다고 하는데

그게 쉽게 시들어버립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가죽에다 새겼습니다.

그 효력이 오래 가도록.

 

이렇게 이혼증서를 써서 여자에게 써서 내보라는 말은

이혼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을 보호하고, 함부로 남자들이 아내를 내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율법이 이혼을 허락했다라고 엉뚱하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걸 교정시켜 주시죠.

19: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러니 원래 신24장도 원래는

이혼을 허락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뇌리 속에

주안에서 결혼했으면, 이혼이라는 단어를

머리속에서 아예 삭제해 버려야 됩니다.

 

그 단어는 아예 내 인생에 없도록!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고전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여기서 결혼이 중요하냐, 독신이 중요하냐?

그 경중을 따지는 게 아니라

독신이든, 결혼이든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잠깐 여기서 <독신>에 대해 언급합니다.

독신을 보통 은사라고 그럽니다.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인데

(우리 사회에서 쓰는 카리스마 와는 뜻이 다릅니다.)

 

성경에서 은사, 카리스마 라는 말은

위에서 내려온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독신은 은사라고 얘기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가 소극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은

 

누가 독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냐 하면

혼자 있어도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을

독신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기는 혼자 있어도 이성 생각도 안 나고

그렇게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꼭 이성이 그립지도 않고.. 그러면

나는 독신의 은사가 있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런 기준으로 독신의 은사를 말한 적 없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한 번 따지듯이 여러분께 묻습니다.

 

보통 우리가 자족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발언입니까,

인간 중심으로 하는 발언입니까?

(인간 중심으로 평가합니다. 나는 자족한다고요)

 

은사가 내가 자족하거나 못 하는가에 따라서

평가가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은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혼자 살게 하셨는가?

그 기준이 우선이어야지

나는 혼자 있어도 부족한 게 없고 만족해, 자족해!’

그게 독신의 은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저도 사실은 과거 미혼 시절에 독신의 은사가 있는 줄 알았어요.

왜냐면 제가 총신대원에 다닐 때, 1970~80년대는

남자들이 일찍 결혼하는 편이었어요.

남자들은 28세 전후로 다 결혼했어요.

여자들은 세 살 아래 25세 전후로 다 결혼했죠.

 

저희가 신학대학원 다닐 때,

거의 모든 신학생들이 다 결혼했는데

3명이 결혼을 못하고 있다가, 두 명이 결국 결혼했습니다.

그러니 동기들 중에 마지막 저 혼자 결혼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독신의 은사를 받았나?’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33세가 넘어가는 고비 길에 섰는데

(충현)교회에서는 전임 심방전도사로 저를 쓰려고 하는데

제가 아직 총각인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들이 저를 데리고 일주일에 4번씩 선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쉽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저를 두고 한다는 얘기가

-키가 작다

-가진 게 없다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이런 별별 이유를 들어서.. 결국 제가 딱지를 맞았습니다.

 

제가 아마 그 때 선을 백번 넘게 봤을 겁니다.

100번이 넘기자, 제가 횟수 세는 것을 그쳤습니다.

딱지를 백 번 이상 맞았다는 것이죠.

이 소문이 창피하게 교회에 다 돌았습니다.

강도사님이 선을 봤는데, 오늘도 딱지 맞았다 하더라!’는 소문

 

그때 어느 자매 한 명이 저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제가 강도사님을 좀 도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처음에 말귀를 못 알아 들었어요.

그가 대학부 부회장을 했었는데

저는 대학부 담임이었고요.

 

지금도 부회장으로 잘 도와주고 있는데

뭘 또 더 도와주려고 합니까?’

 

그러더니 손을 제게 내밀면서

앞으로 계속 도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부터 제가 후덜덜 떨리면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결국 제가 구제를 받았습니다.

 

저는 정말 정확하게 구제 받은 케이스입니다.

그제야 은사도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제가 체험적으로 깨달았어요.

 

그렇지만 은사도 하나님이 주셨다가 거둬가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병 고치는 은사도 주셨다가

싹 걷어가실 때도 있습니다. 은사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본문에서 진짜 말하고 싶은 내용을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고전7: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첫 번째 이야기는 홀아비 과부들에게 한 얘기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결혼해서 살고 있는 크리스천 부부들에게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상한 점은,

여자에게 먼저 얘기합니까, 남자에게 먼저 얘기합니까?

 

10절에 보니까 여자에게 먼저 얘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놀랍게도 교회 안에는 유대적 백그라운드로

신앙생활을 강조하는데

사회 현상 자체는 헬레니즘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시 크리스천들이 혼란스러웠겠죠.

 

이 이질적인 가치와 문화가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헬라 문화권에서는

여자도 수없이 남자들을 버렸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사회 문화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납득 안 되었지만)

 

그래서 여기서 그 헬라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린도교회에

고민스런 문제점들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보편적 상황 중에 대표적 케이스인

여자가 남자를 버리는 케이스를, 바울이 먼저 설명한 겁니다.

버리지 말라고요!

 

그 다음에 10b절에,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 구절로 결국은 부부에게

<갈라서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일관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괄호 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그럼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죠.

거봐요, 성경에도 이혼을 허용하고 있잖아요!

만일 갈라섰거든’ .. 이 구절이 이혼 허용이라고 본 겁니다.

 

자 이제 이런 내용들을 여러분들이 흐트러뜨리지 말고

성경을 조심해서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까 신24장에서 확인했는데 그 초점은

이혼하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마19장에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썼지만, 그것은 너희 완악함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고 이렇다..’면서

예수님도 이혼에 대해 일절 안 된다고 설명하셨어요.

 

그런데 여기 성경에 보니까

만일 갈라섰으면은 무슨 뜻입니까? :11a

 

이것은 진전되는 역사속에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현상들을

객관적으로 놓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것 따 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안 따먹었나요? 선악과를 따 먹었어요.

 

이혼하면 안 된다그러면 이혼 안 하나요?

이혼 합니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타락한 인류가 토해내는

진전되는 보편적 역사로서의 이혼을 뜻하는 겁니다.

 

피치 못하게 갈라섰으면’.. 이런 뜻이죠.

그때는 재혼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저는 35세에 첫 주례를 했는데, 충현교회에서,

희한하게 첫 주례를 60세 된 분의 재혼식 주례를 했습니다.

부탁을 받았으니 주례를 해 드렸죠.

다행히 두 분 다 상처喪妻를 하신 분이셨어요.

 

아들 같은 제가 첫 주례를 잘 해드렸죠.

그런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본문 성경은 혼자 지내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재혼 안 하나요?

합니다.

 

그럼 성경을 쓴 바울의 진의가 무엇일까요?

항상 성경은 문자적으로만 보시면 안 되고

그 문자가 담고 있는 함의적 내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지금 상황에서 한 번 봅시다.

백프로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시대는 그랬어요.

 

하도 피차 버리는 게 아주 보편화된 사회였으니까

그래서 이 당시는 부부간의 관계나 가족단위가

오늘날처럼 연대감이 견고하지 못했어요.

가정개념이 오늘날처럼 옹골찬, 단단한 개념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역사학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첫년 로마제국의 붕괴가 사실은 가정관계의 허술함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라고 역사학자들이 얘기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후서를 통해서 제일 강조하는 것이

아내 문제, 부부 문제, 가정문제를 그렇게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이혼을 왜 하죠?

오늘이나 그때나 비슷할 겁니다.

거의 이혼을 염두에 두는 이유는, 새 사람에 대한 갈증과 기대 때문입니다.

 

헤어져야 새로운 배우자를 데려올 것 아닙니까.

여기서 헤어지더라도 그냥 지내라는 말은

그런 이유로 이혼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이유로 이혼을 많이 할 겁니다.

 

부부관계란, 서로 하나님과 함께 맺은 사랑의 언약식인데

그 언약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함부로 못 깹니다.

 

그럼 혹자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하고 한 달만 살아보세요!

그런 소리 쉽게 할 수 있나!’

그래도 이혼 가급적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 해 보면, 또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중요한, 흔들 수 없는 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의식 한 복판에라도 이혼이라는 단어를 지우세요.

결혼을 끌어안고 가는 것입니다.

 

이미 헤어졌으면 그대로 지낼 각오를 해야 됩니다.

왜냐면 잘못된 동기로 배우자를 버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7: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여기부터 또 다른 부류가 나옵니다.

1) 상처하고 혼자 된 홀아비, 과부들

2) 그리스도인으로서 묶여져 부부가 되어 있는 사람들

에 이어 12~15절은 배우자 중 어느 한 쪽이 믿고, 한 쪽이 불신인 경우입니다.

      

15절도 결국은 헤어지라는 말입니까?

끝까지 버티라는 말입니까?

 

너희를 화평중에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15

주님은 십자가란 값비싼 대가를 치르시고 화평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 제물 되셔서

그를 구속하셨습니다.

 

3) 부류는 전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를 들면, 부부가 둘 다 예수님을 안 믿었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권유를 받아서 한 쪽이 믿게 되었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상대인 배우자는 불신자가 되는 거죠.

 

그런데 분명히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와는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헤어지라는 얘기입니까?

위 구절은 헤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믿는 그 배우자를 통해서, 나머지 안 믿는 배우자가

전도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부부가 함께 가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헷갈립니다.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이 구절을 얼핏 보면 이혼해도 좋다며 이혼을 허락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단서가 이렇게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5b

 

화평 중이란 말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너를 불렀다.

그러면 너도 그와 같이 부르심을 입은 자 답게

믿지 않는 배우자에 대해서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견디고 버티고 감당해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썩 유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질문 할 수 있죠.

 

‘12절에 보면,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설명 하나가,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분명 괄호 안에다가 뭘 말씀했느냐면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다)

그럼 이하 모두 15절까지 내용은 사도바울의 의견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구절을 놓고 자유주의자들은

거봐라, 성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어떤 것은, 그 중에는 사람들이 편집해 놓은 말씀도 많다.’

그러면서 성경무오설을 부정합니다. 성경의 이런 부분들 때문에요.

 

그 이하는 사도바울의 견해가 맞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무슨 얘기를 하기 위해서

괄호 안의 글을 의도적으로 썼는가 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인생사 모든 구체적인 내용들을

매뉴얼에 따라서 미주알 고주알 일일이 다 설명을 남기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남겨주신 말씀들은

구속의 중요한 원리들만 친히 말씀하시고

본을 보이시고 하늘로 가신 것입니다.

 

그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도바울이 괄호 안에 이 글을 쓴 것은,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말은

이것은 주님이 직접 귀에 말씀해 주신 것은 아니지만이란 뜻입니다.

 

어쨌든 주님이 말씀 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사도 바울의 뜻이잖아요라고 계속 주장할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럼 17절을 봅니다.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사도바울이 모든 교회에 이 내용을 명령한다고 했습니다.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사도바울의 의견입니다. 40절은 봅니다.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그러나 내 뜻에는..’ 사도바울의 뜻입니다.

 

자 그리고 한참 뒤로 넘겨서 고전14:37절을 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자 보십시오. 편지의 끝 부분에 이르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비록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원리를 적용해서

개인적인 뜻으로 글을 써내려 간 부분이 있지만

사도바울의 해석을 통해서, 성령이 감동해서

누구의 명령으로 이 글을 남기게 한 것입니까?

주님의 명령으로이 글을 남긴 것입니다. 14:37

 

그러면 고린도전서 전체가 주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지금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

사도바울이 믿지 않는 배우자가 있다 할지라도

헤어지지 말고, 이혼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는 말은

바울의 개인 견해로 치부해야 될 게 아니라

주의 명령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다시 고전7:16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7: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잘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결론처럼 말을 마무리하는 제일 중요한 말은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입니다.

 

자꾸 우리는 지금 있는 상태와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바꾸려고 합니다.

 

제가 이 구절을 읽다가 한 가지 반성한 것은

! 앞으로는 아무리 우리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아도

만나면 결혼 왜 안 해요? 언제 해요?

이런 말은 안 해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게 본인들에게는 얼마나 스트레스일까요!

특별히 교역자들 중에도 아직 미혼이 있어서,

제가 결혼을 하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독신이 나으냐, 결혼이 나으냐?’

아니면 헤어지는 것이 맞냐?’ 이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를 부르신 그대로, 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선물로) 인해서

오직 그 모든 상황을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그 상황을 선용해라.. 그 말씀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그 상황을 이탈하고 바꿀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럼 어느 것이 낫느냐?’ 에 초점이 있는데, 그게 원 목적은 아닙니다.

그건 자기 마음속에서 뭔가 바꾸고 싶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카리스마, 은사란 위에서 주신 선물입니다.

결혼도, 독신도, 홀로 그대로 지내는 것도

위에서 주시는 은혜이어야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그 쨍하고 해 뜰 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주신 그대로 오늘도 묵묵히 뚜벅뚜벅

주께서 가라 명하신 이 길을

즐겁게 순종하는 우리들의 싱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