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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에서 영광으로

LNCK 2019. 10. 28. 17:07

 

◈영광에서 영광으로        고후3:7~18               21.01.24.설교녹취, 출처

 

 

이 시대의 악함의 특징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뉴스보다 더 가볍게 여기고

세상의 소문보다 진리를 더 가볍게 여기는 모습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람과의 만남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모습이

바로 이 세상이 하나님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그분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히브리어로 '영광' 이라는 단어는 '카보드' 인데, 무겁다 라는 뜻의 카베드 에서 나왔습니다

'무겁다' 라는 단어에서 '엄위하심, 영화로우심, 중요하심' 이라는 뜻으로 변화되어

이제 '영광' 이라는 단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중심이 되는 분이에요

가장 중요하신 분이요, 가장 무게 있으신 분이요, 가장 영화로우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위대하심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창조자 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창조를 하지 않으셔도, 그 존재 자체로 영광스러운 분이시지만

이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그분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거죠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를 나타내고 선포할 뿐입니다

그러나 온 우주만물을 다 합쳐도, 그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기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일부분 보여줄 뿐 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나타내신, 최고의 현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1:3 '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그 독생자의 영광!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그분의 죽으심, 십자가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분의 부활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분은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했을 때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로 지음받았는지는

파스칼의 <팡세>를 통해서 보면

'인간이 스스로 비참함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안다'

 

여러분은 어떤 생물이 비참함을 스스로 느낍니까?

돼지가 돼지 우리에 있다고 스스로 한탄하는 거 보셨나요?

 

그런 인간은 자신의 처지, 형편,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며 절망하며 비참함을 느낍니다

왜일까요? 타락의 증거입니다

 

타락 Fall (떨어졌다) 이라는 것은, 원래 있었던 위치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받았기에 어떤 피조물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잘 나타내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반역으로 타락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들도 본능적으로 그 영광의 무게가

자신 안에 있어야 되는 걸 알기 때문에

자꾸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는 것입니다

 

많은 소유로 채우려 하고, 높은 지위로 채우려 하고,

그리고 명예와 그리고 권력으로 끊임없이 자신 안에 영광의 무게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 '영광'스러움은

하나님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기에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우리 인간의 '영광의 공백'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인간이 그 참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할까요?

그분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춰오기 때문이죠

그리고 잃어버렸던 그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말씀입니다

'그들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을 비추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끊임없이 사단은 가로막습니다

그 영광의 빛을

듣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혼란하게 하고 방해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취는 순간

인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능력이 부여 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거짓과 부정과 속임수로

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이 영혼들에게 비취지 못하도록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영광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신 그 독생자의 영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은 십자가입니다!

 

이는 역설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는 역설!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죽음의 형틀이었던 그 십자가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나타내는 증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던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하는 그 기도 가운데

<영광>이라는 단어를 자주 고백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러 싸우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1

 

그 영화(영광)롭게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아버지 제가 십자가를 질 때가 됐습니다

그때는 바로 제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의 형틀로 여기지만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이 이 세상 속에 흘러가고

아버지의 용서와, 아버지의 평화와, 아버지의 긍휼이 이 땅에 부어주며

 

또한 죽은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회복이 이루어지기에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 받으신다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도하시기를

'그 영광이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요17:24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내 영광, 곧 아버지께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소서'

 

그 영광을 제자들이 보고,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된 이들이 보고,

또 그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된 우리들이, 그 영광을 보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드려지고 있고, 또 지금도 응답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이 기도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에 사로잡혔고, 그 영광을 바라보며

고난 받으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그 빛나는 광채로 바울에게 임하여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멀 정도로 빛나는 영광스러운 광채 속에

바울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았고,

지금 (본문 고린도후서 상황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고백하는 자신이 받는 공격,

자신에게 쏟아 부어 주는 무자격자 라는 공격 속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3장과 4장에 '우리말 성경'으로 <영광>이라는 단어를 세어보면

17번이나 나옵니다

 

거의 구절 구절마다 '영광' 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것은

'영광'이란 구약의 뿌리를 둔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죠

 

그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필경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은 예루살렘 사도 누군가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사람들이었죠

 

바울은 지금 이런 추천서가 없는 사람이므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심지어 거짓된 사람이라고 공격하고 있는 그 입장에서

 

사도바울은 그들과 싸우는 것 보다

그 이면에 있는 깊은..

그들이 빠져 있는 이 문제, 세계관의 문제, 사상의 문제,

그들의 믿음의 뿌리를 지금 드러내면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전부라고 믿는 이 구약의 율법, 옛 언약을

결코 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언약의 통로가 되었던 모세의 직분도 영광스러운 직분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새언약에 계시는 더욱더 영광스러운 것이며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직분 또한 더욱 더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의 변증을 간략히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구약 옛 언약의 통로가 되었던 모세가 받았던 직분은, 문자(letter)의 직분이다

그것은 율법 돌판에 새겨진 문자,

그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죽음 가운데, 정죄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을

드러내는 직분 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직분은, 영의 직분이요, 또한 의와 생명을 가져다주는 직분이다

인간이 죽음 아래 처해 있다는 걸 알려 주는 옛 언약의 계시도 영광스러웠지만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 가운데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인간을

의롭다 하시고, 부활의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그 의와 생명을 전하는 직분,

그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운 것이다..

 

모세도 영광스러웠지만, 그것은 사라질 일시적인 영광이었지만

자신이 받은 그 영광은, 영원한 영광,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광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성경 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고후3:7~8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더욱더" 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됩니다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더욱더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3장 전반부에서,

자신을 '무자격자 또는 거짓의 사람이라'고 모함하는 사람들 앞에

'나의 자격은 사람의 추천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 났다' 라고 말한 이후에

 

'나의 직분은, 나의 부르심은,

모세의 부르심 보다 더욱 더 영광스러운 직분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들이 빠져 있는 그 잘못된 시각을 벗겨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옛언약의 전달자였던 모세의 직분도 영광스런 직분이었다

그것을 증거하는 예로서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한 사건을 예로 듭니다

 

여기서부터 바울이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를 풀어 나가는 겁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시내산에 올라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을 때

증거판 2개로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죠

 

그때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며

'모세를 통해 전해준 그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다' 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신비로운 광채, 영광의 광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모세의 얼굴에 나오는 광채를 보고 두려워 했습니다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백성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수건 veil 을 얼굴에 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혹은 홀로 있을 때는 그 수건을 벗고 있었지만

백성들 앞에 나갈 때마다 그 수건을 계속 썼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역사적 사건을 고린도후서에 이끌어내면서

여기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교훈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이 수건을 쓴 이유는 뭡니까?

백성들이 두려워 하기 때문에 배려해서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얼굴에 나는 광채는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 광채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계속 그 수건을 썼다 .. 라는 것을 지금 바울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냐? 라는 겁니다

 

고후3:13~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수건)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수건)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모세가 수건을 썼던 이유는 백성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배려해서 썼습니다

그런데 계속 수건을, 그 얼굴에 광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수건을 쓴 이유를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없어질 것의 결과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계속 수건을 썼다.. 라고 바울이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나누어집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1) '없어질 것의 결과에 주목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이런 겁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우쭐해 했다는 거지요

모세이 마음이 이건 잘못 나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려다 보니 광채가 사라졌어요

그러면 그냥 그대로 백성들 앞에 나가면 되잖아요

근데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는 뭘까요?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백성들이 자신이 수건을 쓰고 나가면

그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으로 보고, 자신을 두려워하고

쉽게 말해 모세의 권위를 인정했다는 거예요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모세를 두려워하며, 모세가 말한 대로 잘 따랐다는 거예요

 

수건을 벗으면 자신에게 어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사라졌다고 자신을 무시할까 봐

계속 수건을 썼다 .. 이것이 부정적으로 보는 해석인데, 나름 일리가 있어요

 

2) 긍정적으로 볼 때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죠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했다..' 이런 근거에서

 

백성들의 완고함 때문에 부득불 수건을 쓰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모세의 얼굴이 빛이 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개인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이, 모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그 영광을 보고

모세를 통해 전해 준 그 하나님의 계시를 잘 순종하라..

백성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더 이상 나지 않으면

이제는 모세가 전해 준 그 하나님의 계시도 무시하고

그 옛언약, 율법을 무시하게 될까 봐

 

모세가 백성들의 완고함 때문에

워낙 불신하고 배반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기를 좋아하는

그 백성들의 완고함 때문에 부득이하게 수건을 쓰고 나갔다 .. 긍정적으로 보는 겁니다

 

두 가지 해석 모두가 역사적으로 팽팽하기 때문에

곰곰이 어느 쪽이 더 맞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이 두 가지 해석이 상이하지만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의 광채는 일시적이었다는 거예요

 

수건도 그러므로 일시적인 거라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는 벗어야 되는 문제라는 거예요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이 수건을 모티브로 해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유대인, 특별히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대하여

지금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오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놀라운 생명의 시대, 의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처럼 여전히 벗어도 되는 수건을 계속 쓰고 있다는 겁니다

 

고후3:15~16절에서 그것을 지적하죠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갈 때마다 수건은 벗겨집니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그 사건을

자신이 지금 처한 형편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적용 합니까?

 

모세는 얼굴의 광채를 감추기 위해서 썼고

이제 광채가 없으면 벗어도 되는 수건을 계속 씀으로 인해서

바울은 지금 불필요한 행동을 했다고 지적하는데

 

그것을 지금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구약의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그 수건을 덮고 있다' 라고 적용을 하는 겁니다

 

모세의 얼굴에 썼던 수건을 이제 마음에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겁니다

 

이 수건은 그러므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온갖 종류의 잘못된 세계관, 사상, 고집, 관습 등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거예요

 

바울을 괴롭혔던 것은, 구약의 율법에 사로잡혀서

아직도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율법주의,

그것이 바울을 괴롭혔던 수건 이었습니다

바울 당시 신약시대 사람들이 수건이었어요

 

이제 초대교회로 넘어오면 요한1서, 2서, 3서가 쓰여졌던 그 시대를 보면

'영지주의'라는 수건이 유행했는데, '육체를 악하고 영혼은 선하기 때문에'

수많은 온갖 이단 사상들이 나타나서

복음을 영지주의적 으로 해석하는 거죠

 

영지주의란, 영적인 지식을 통한 구원이라는 거예요

육체는 악한 것이며, .. 이건 플라톤적인 사상이죠

 

이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인 것처럼

그렇게 그 시대의 사상으로 복음을 잘못 바라보게 하는 거예요

 

-중세 시대에는 공로주의가 성행했습니다

공로주의란, 인간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고

성인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고

심지어는 면죄부, 돈을 많이 내면 하나님께서 인정 하신다는 이 공로주의,

면죄부의 판매로 드디어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들은 끊임없이 불필요한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사단이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의 빛을 아는 이 수건을 벗게 되면

찬란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이 비춰지니

 

율법주의의, 그리고 공로주의, 그리고 영지주의,

그리고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문자주의,

하나님께서 구약의 그 계시를 주셨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이 다 연결되어 해석되고 성취되었지만

 

여전히 구약 시대에 머무르고 있는 그런 사람들,

구약의 문자적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즉 도덕적인 율법들, 구약의 도덕적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의식법이나 제사법,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에 주신 어떤 규칙들은

이제는 시대와 문화를 통해 재해석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그대로 지키는 문자주의도

오늘 이 시대에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수건입니다

 

-근대 이후로 이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이 수건은 뭡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은 뭡니까?

'진화론'이라는 수건 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은 과학적 토대가 탄탄하기 때문에 진리이고

창조론은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 때문에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정반대입니다

 

진화론에 근거한 책들을 읽어 보세요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말을 못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기원을 밝히고 있어요

 

중략

 

▲사람은 내가 지금 마음에 무슨 수건을 쓰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게 문제예요 
내가 지금 어떤 종류의 수건을 쓰고 있는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주의 영이 임하실 때, 성령이 임하시면 내 마음에 쓰고 있던 수건이 드러납니다 

고후3:17~18절 '주께서는 영이시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일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도덕적인 명령도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함은, 의무를 기쁘게 감당하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해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을 기쁘게 하는 자유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말씀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종교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광의 빛을 비춤으로
수건을 벗는 그런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자유의 생활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놀라운 변화는,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의 생활이요, 소망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우리가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욱 담대하게 말합니다' 고후3:12

이 소망은 어떤 소망입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창조에 나타난 영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영광,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나타날 영광, 

로마서 8장에 보면, 모든 피조물들이 지금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루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혼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온 우주만물이 새하늘과 새땅으로 변화되는 구속입니다
전 우주적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기대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단지 죄인을 의롭다 여기는 정도의 구원이 아닙니다 
날마다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구원 정도가 아닙니다 
영광스럽게 되는 구원입니다 Glorification, 영화롭게 되는 구원입니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되는 구원!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담대했습니다
금년 우리의 표어는 "소망의 복음을 굳게 잡으라"
어떤 소망입니까?
영광에 이르는 소망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소망!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에 대한 소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루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 
우리의 마음에 쓰고 있던 수많은 수건들을 통하여 바라보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수건을 벗겨 주시고 
그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며 날마다 변화되어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움>을 날마다 누리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세상이 주는 어떠한 영광도 단호히 거절 하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약속된 이 영광을 바라보며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