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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로의 하나님

LNCK 2019. 11. 1. 15:40

https://www.youtube.com/watch?v=fW5xyDYG63g 

◈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후1:3~7                         출처

 

론 멜(Ron Mehl)이라고 하는 교수가 쓴 「The Cure for a Troubled Heart」라고 책에 보면

저자 자신의 경험을 진솔, 간결하게 이야기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몇 자녀가 있는데 특별히 그중에 아들 하나가 큰 고민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상심, 실의, 마지막에 절망감에 빠져서 헤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가 괴로워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워하는 이 아들에게 ‘왜 그러냐?’라고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물으면 더 괴로울까봐,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입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고민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런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나 너무도 괴로워서 절망에 지친 이 아들은 어떻게 위로할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들이 자는 방에, 깊이 잠들었을 때 몰래 들어가서 그 옆에 누워있었습니다.

눈을 빤히 뜨고 천장을 쳐다보면서 옆에 있는 이 아들, 저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대책이 없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누웠다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또 아들이 자는 방에 들어가서 옆에 누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리고 또 나왔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아들 방에 들어가 옆에 누워서 밤을 지새웠다고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들어 와서 조용히 옆에 눕는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말이 없어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보다 더 괴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중심, 내 마음을 이해해주시는 분이 있다.’

아들은 거기서 용기를 얻어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일을 새롭게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위로라는 게 뭡니까.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것도 아닙니다.

무슨 물리적 현상, 이것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란 대단히 심오한 것입니다.

 

아시는 데로 내가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사람은 말이 없어도 내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만났다하면 오히려 근심이 생기고 분노가 끓고 낙심하게 되고 도

움은커녕 오히려 해가 됩니다. 그렇게 피해를 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만나자고 해도 거절하게 됩니다.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참된 위로, 참된 친구는 누구입니까. 나에게 위로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어려운 일 당할 때 다 나를 비판하고 다 멀리 가버리지만은

그때에 오히려 내게 다가오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내 친구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는,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뭐 입바른 소리나 하면서 위로하겠다고드는 사람,

길이 있겠지 어쩌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사람 반갑지 않습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인간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역경을 겪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와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못했어요,

너무 비참해서. 일주일 후에 조용히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잘 생각해 봐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데 죄없는 자를 벌하시겠느냐. 잘 생각해봐라.

네게 숨은 죄가 있는 것 같다.’ 여러 가지로 비판을 합니다.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마지막에 욥이 견디다 못해서 ‘제발 입 좀 다물어. 그런 소리는 나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말 고통당할 때 잘난 척하고 사설 늘어놓는 거 좋지 않습니다.

한 수 위에 있는 것처럼 인생이 다 그런데 어쩌고 해가면서 쓸데없는 소리하는데

입 다물 것입니다.

 

▲「How to Make Your Good Friend」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방법 열 가지를 말해 주는 중에 제가 인상 깊게 본거 하나가 뭐냐 하면

친구가 어려움을 당하거든 반드시 찾아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옆에 있으라, 한 것입니다.

 

그게 최고로 좋은 친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뭐가 어쩌고 이론을 펴면서 설명을 하고 설교를 하고……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참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깊은 이해는 바로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가 없이 속을, 속내를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옆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쁠 때 만나면 기쁨이 배가하고, 슬플 때 만나면 슬픔이 반감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좋은 친구입니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위로를 받습니까. 이 현대인은 위로받지를 못합니다.

부부간에도 같이 산다고 하지만은 동상이몽(同床異夢)입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있다고 하지만은, 자녀를 통해서 위로받지 못합니다.

많은 아는 사람들이 있고 친구가 있는 것 같으나 정작 어려운 일 당하고 보면 나는 혼자입니다.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하는 위로자가 없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위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위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위로받으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니, 적대감을 가지고 사람을 대합니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요. 
 

카렌 호니라는 분이 「The Neurotic Personality of Our Time」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에서

현대인은 불안을 저항에서 불안을 스스로 이기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정을 추구하는 겁입니다.

이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달래고 위로받으려고 몸부림치는데 그 방법이 잘못 됐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방법을 취하는데, 일반적으로 권력과 명예와 소유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무력함에 맞서 싸우면서 권력을 얻으려고 합니다.

권력만 얻으면 위로가 될 것같아서인데 아닌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면 불안합니다. 못해먹겠다고도 하지 않습디까. 힘들어요.

권력이 힘든 것입니다. 절대 평안이 없습니다. 권

 

력은 으레 지배욕으로 치닫습니다.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 있으면 해결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닌 것입니다.

 

또한 굴욕감과 맞서 싸우면서 명예를 추구합니다.

공부도 하고 뭐도 하고 뭐도 하고 뭐도 합니다. 명예만 얻으면,

그러면 마음이 평안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 명예에 취해서 미쳐버립니다. 정신없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빈곤과 싸우며, 빈곤을 이겨서 많은 돈을 벌고 넉넉한 소유를 얻으면,

그러면 마음에 평안이 있고 위로가 될 것이라고, 돈이 유일한 친구라고,

돈이 영원한 위로 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돈을 가지고 증권도 했다가 땅도 샀다가 집도 샀다가

몸부림을 쳐보지만은 보아하니 차라리 돈 없는 사람이 편합디다.

그것이 위로가 되지를 못합니다.

 

위로 될 수 없는 권력과 명예와 소유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를 받을 수 없다,

그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아주 교만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존에 빠지고 자기 우상화 되어있습니다.

그런고로 누구의 은혜를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빠져서 자기는 특별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고민도 자기 고민은 특별한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다 같은 것이거든요. 같다고만 생각해도 반은 해결이 되겠는데 아닙니다.

내것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애에 실패한 딸이 홀짝홀짝 울고짜고 하니까

어머니가 “다 그런 거란다. 나도 니 마음을 다 안다.”했는데

이 딸은 “엄마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엄마가 나 같은 경험을 해봤어?”하고 나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기에게도 스토리가 있지만 말은 못합니다.

‘얘야, 나도 그랬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면 안될 것 같으니까요. 사실은, 인생 경험이라는 게 다 같은 것입니다.

그 보편성만 알아도 한결 해결이 쉽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야. 나만이야. 나만 특별해. 나만 특별하게 억울해’ 천만에 말씀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이 극단적 개인주의가 사람을 점점 고독하게 만들고

위로 받을 수 없게 만듭니다.

 

또 하나가 행동주의라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마음을 치료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나 그 노래방이라는데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리 마음에 안듭니다.

점잖은 사람들이 거기만 가면 발광을 하더라고요.

한바탕 발광하고 나면 뭣이 될 줄 알지만 됩디까. 무슨 위로가 되더냐구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거친 행동을 합니다.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 것, 아무 위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참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위로’라는 말이 열 번이나 나옵니다.

파라클레시스, 파라클레세오스…… 열 번이나 위로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첫째가 뭐냐하면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하나님만이 위로하실수 있습니다.

 

사람은 위로하지 못합니다. 뭐 사랑하느니 뭐하느니 해봐야 다 그저 꿈같은 얘기입니다.

진정으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바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요? 그만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 없는 말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지혜 없는 설득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대책 없는 위로가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능력이 계시고, 지혜가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첫째 요점입니다.

 

두 번째는 너무나 신비롭고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그것은 환란 중에서 위로하신다, 한 것입니다. '환란 중에서 위로하신다!' 고후1:4

 

평안한 가운데서 위로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잘살고, 잘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해야 위로가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과 역경과 실패, 고난 중에서 위로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위로를 수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수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적 위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내가 위로가 됩니까? 언제 위로가 됐습니까?

가장 어려워졌을 때,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입니다.

 

별로 잘생기지 않은 아내이지만 이 아내가 최고야인 것입니다. 왜요? 그때는 위로가 되거든요. 건강해지면 또 딴짓 하고 뭘 어쩌고 어쩌고 하지만요 그러니 가끔 병원에도 가야 됩니다.

가서 딱 눕고 보면 그때는 저 시원치 않은 마누라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남편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이 그렇게도 예쁠 수가 없습니다.

고난 중에 위로하신다, 합니다. 고난 중에 위로하고 위로 받고

역사가 거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중요한 문제가 있답니다. 위로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죠.

위로할 수 있는 라이센스를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은 자세히 말씀합니다.

‘환란 중에 위로로써 고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기 위함이다.’ 고후1:4

 

고난 많이 당한 사람만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자격이 있습니다.

이 말씀 들으면 꼭 생각나는 내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내 후배, 제자인 목사 한 사람이 중앙의료원에서 좌우간 병고생 많이 했습니다.

10년동안을 수술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결국은 죽었습니다.

저녁에 죽어서 시체넣는 냉장고에 넣으려고 했더니 냉장고가 꽉 차서 들어갈 데가 없으므로

냉장고 앞에 놔두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냉장고 시체가 하나 나가면 거기다 집어 넣으려고요.

 

그렇게 두고 돌아왔다가 아침에 냉장고에 넣으려고 가보니

세상에, 사람이 살아나 있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냉장고에 들어갔더라면 죽을 뻔했지요.

아무튼 이렇게 살아난 사람이라 열심히 공부해서 목사가 되고 원목이 됐습니다.

 

병원에 있는 환자들 돌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환자들이 아프다고 괴로워하면 이 분은 딱 한마디 합니다.

“저는요. 시체냉장고 앞에까지 갔다왔습니다.”

그저, 그 한마디에 환자들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뭐 수술을 몇번 받고, 몇 달 고생하고 하면, “나는 10년이요. 10년”이라합니다.

보십시오. 아프다는 사람 앞에 놓고

“난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습니다.”한다면 그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나는 병원에 한 번도 안와봤어요.” 이러는 사람은 도대체가 위로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난 중에 받는 위로로써,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는 것에는 이러한 선교적 의미가 있습니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고생 좀 해야되겠습니다.

그리고야 남을 위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어찌하겠습니까?

 

‘환난 중에 받는 위로로써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게 하려 함이다.’

 

 

◑받은 위로를 전하는 위로자가 됩시다

 

제가 언젠가 한번 영락교회 장로님,

정장로님이라고 하는 분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입원해 계시더라구요.

그분을 어떻게 아느냐 함은 제가 32세에 영락교회부흥회 인도하러 갔을 때

(그때는 부흥회를 월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월요일 새벽까지 했습니다. 참 길게 했습니다)

그분이 전도부장이었습니다.

 

그래 저를 위해서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참 가까이해서 제가 친해진 것입니다.

병원에 갔더니 마침 그 정장로님 와 계신다 하기에 들어가봤습니다.

그분이 몇 달 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저는 장례식에도 가봤고 결혼식에도 많이 가봤습니다.

그러나, 병원을 방문한 일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 방문한 일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 이렇게 몇 달 있으면서 우리친구들 저녁에 찾아오면 너무너무 반가운 것입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붙잡아 앉히곤 한답니다.

하도 반갑고 위로가 되어 속으로 회개도 하고 맹세했지요.”

 

그리고 나하고 악수하면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병원문을 나가게 되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환자를 방문 하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고난당할 때 내게 위로자가 있습니다.

내가 위로 받았으면 이제는 남을 위로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정한 생의 의미와 삶의 보람과 신앙적 세계를 통하여

위로받을 수 있는 때는 잘살 때가 아니고 어려울 때입니다.

건강할 때가 아니고 병들었을 때입니다. 환난 당할 때 큰 위로를 받습니다.

다른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위로를 그때 받습니다.

 

그저 고맙고 또 내가 환난 중에 받은 위로로써 남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위로라고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오직 고난 중에 가능하다- 이런 놀라운,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다같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실레이야 슈링크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금 내려오면 ‘매테르 하우스’라고 하는 신교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 수도원 원장으로 계시는 분인데 그의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를 보고 싶어서 제가 한번 일부러 집으로 찾아갔던 일도 있습니다.

 

이 분이 쓴 ‘사랑의 승리’라는 글 속에 중국 문화혁명 때,

핍박 심할 때 기독교인들이 고생한 이야기를 정보를 통해 듣고

그 책에서 이렇게 간증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지하교회에서 활동하다가 끌려가서 매를 맞았습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 풀려났습니다.

돌아와서 교인들 앞에 서서 간증한 간증문이 이 분의 손에 들어와 그걸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 장로님은 그때 예수의 이름으로 감옥에 끌려가 240대의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게 살라고 때리는 게 아니라 죽으라고 때리는 것이니 엄청나게 아프더랍니다.

그렇게 아픈 매를 계속 맞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쉬었다가 또맞고 쉬었다가 또 맞고,

내리 240대를 맞는데, 매 맞으면서 스데반을 생각 했다고 합니다.

 

집사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고

그 눈앞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는 바로 그 장면, 그것을 생각했더니

자기에게도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데, 멀리 계신 게 아니라

가까이 오셔서 자기를 그 품에 안으시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안으시고 상처를 어루만져주시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리고 나니까 이제는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합니다. 아무리 때려도 안 아프더랍니다.

그뿐 아니라, 맞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고 합니다.

감사하고, 행복하고, 바로 이것이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위로받은 사람만이 남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말 없이도 위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참위로는 믿음에 있고 소망과 사랑에 있고, 이렇게 위로받을 때 오늘 말씀대로입니다.

‘모든 고난을 견디느니라.’ 모든 고난을 잘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 위로로써 충만한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산지사방 어디를 보아도 위로받을 길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위로하게도 하시고, 위로받으며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위로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오늘도 환난을 통하여 위로하시는

그 놀라운 신비로운 뜻을 깨닫고 환난 중에 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고,

또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으로 살고, 위로하면서 위로받고,

위로로 충만한 그런 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