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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도 받고 구원도 받은 사람 눅18:35~43 19.11.18.묵상글 스크랩
본문은 여리고 성의 맹인 바디매오가 고침 받는 장면입니다.
본문 누가복음에는 안 나오지만, 병행구절 마가복음에는 그의 이름이 '바디매오'로 나옵니다. 막10:46
본문은 누가복음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이란,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가 일어났을 때
병을 고쳐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거나 예수님께 감사드렸다는 얘기에 앞서
꼭 예수님의 치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언급하는 점입니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3 glorifying God
앞서 눅17장에서 나병환자 10사람이 치유를 받고 이방인 한 사람만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사람은 열 사람인데 하나님을 찬양하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 뿐이냐고 하신 적이 있었죠.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17:18 give glory to God
본문 여리고 성의 맹인이 치유를 받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같은 내용를 전하는 다른 두 복음,
그러니까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가 빠져있고
그저 예수님을 따랐다는 얘기만 있습니다.
*마
20:34, 막10:52 *사복음서 대조표
이 사실을 놓고 볼 때 누가복음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치유받은 것만으로는 아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치유도 받고 그로 인해 하나님도 만나야지
구원받은 거라는 얘기지요.
<치유받는 것>과 <구원받은 것>은 실로 큰 차이입니다.
치유는 육신의 어떤 한 부분이 정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은, 존재의 한 부분이 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 모두가 정상이 되는 것이고,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치유만 받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치유만 받고 제 갈길을 가지만
질병의 치유와 함께 구원을 받고 영육으로 전존재가 올바르게 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glorifying God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을 다른 사람도 따라하게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을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은 이렇습니다.
(바디메오가 )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군중)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18:43
군중은 본래 이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예수님께 자비를 구할 때
맹인의 불행쯤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입다물라며 나무라던 사람들이고 주님의 자비 베풂을 가로막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9
그리고 맹인(마가복음에는 바디매오로 나옴)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라고 불렀지만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1
이들은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저 '나사렛 사람'이라고만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7
이런 그들 군중들이 이제 무시하던 맹인도 무시하지 않게 된 것이고,
예수님도 그저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43
그러니까 맹인이 치유받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곁에서 지켜보던 군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같이 찬양하게 한 것이고,
예수님도 이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임이 드러난 것이며,
그래서 사람들이 시선을 예수님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려 찬양하게 한 겁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자기 혼자 하나님을 찬양하던 것을
또는 우리 성도들끼리만 하나님을 찬양하던 것을,
세상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서로 도전과 자극이 되고 권면도 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자 숫자 급감에도 불구하고 떼제 공동체 등은 부흥하고
아베 피에르 같은 분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과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공동체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한때 호황기를 누렸던 서구교회의 몰락이 끔찍할 정도입니다.
신자수의 격감으로 교회들은 무용지물이 되어 텅 빈 교회 건물의 매매가 활발합니다.
매각된 교회는 휘트니스 센터나 스케이트보드 연습장, 상가나 술집 등의 용도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515곳의 성당이 문을 닫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스위스에는 건물이 남아 있어도 담당 성직자가 없는 곳이 전체 건물의 40%라고 합니다.
네덜란드도 상황은 마찬가지로 10년 안에 절반 이상 문을 닫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한 대수도원에는 한때 380명의 수도자가 몸담고 있었지만
지금은 39명으로 줄어들었으며,
현재 이 수도원에서 가장 젊은 수도자의 나이는 70세이랍니다.
이 수도원의 사용되지 않는 공간은 호텔로 바꾸기 위해 리모델링하고 있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현 실태를 바라보면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교파를 막론하고 중고생들이나 청년들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교회 공동체와는 너무나 비교·대조되어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발길 닿는 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큰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를 계속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머물고 계실 무렵,
너무나 많은 군중들이 몰려와 인명피해가 우려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 위에서 안전하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와 너무나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를 바라봅니다.
점점 활력과 회복탄력성을 잃어가는 우리 교회를 바라봅니다.
더 이상 수직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한 묘안이 무엇인가 고민해봅니다.
그렇지만 프랑스 교회의 충격적인 몰락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떼제 공동체 언덕은
전 세계로부터 몰려온 수많은 청년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떼제 말고도 루르드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교회가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종교라면 고개를 가로 짓는 프랑스인들이지만
엠마우스 공동체 창설자이자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의 아버지요 벗으로 살았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을 가장 존경하는 첫 번째 인물로 손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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