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네 분의 하나님 2003.11.30.설교스크랩
한완상, 전 부총리
이 설교문을 읽으면서, 제 신앙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 4째 단계가 압권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지루하더라도 꼭 끝까지 읽어보세요! <편집자
◑1. 첫 단계 - 독선과 배타의 하나님
모태신앙인으로서 내가 처음 만난 하나님의 인상은 아주 배타적 절대자였다.
'우리'와 '저들'간을 분명히 구분 짓고, 그 구분을 거룩한 것으로 받든다.
성별(聖別)의 이름 밑에 차별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된다.
'우리'는 거룩한 무리이고 '저들'은 잡되고, 불순하고, 불결한 존재
곧 죄인으로 정죄된다. 저들은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다.
우리가 저들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 '저들'에 대한 미세한 규정이 계속 생산된다.
그래서 종교적 금지행위, 금기행위가 율법주의식으로 자세하게 나열된다.
나는 어릴 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경멸했던 것 같다.
다른 종교를 두려워했고 멀리했다.
그러면서 때때로 나 자신도 불순한 존재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번민했다. 죄의식에 시달렸다.
기도할 때마다 내 스스로 죄인임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학대이기도 하다.
자학증세가 심해질수록 예수의 속죄행위가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어릴 때 부흥회에 참석하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는데, 그때 흘린 감동의 눈물은
예수의 보혈이 주는 속죄의 효험에 대한 감사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예수의 피, 그의 고난과 죽음은 전적으로 내 개인의 불완전함에 대한 불안과
죄를 해소시켜주는 효과는 있었지만,
그 예수의 피 속에 올곧은 인간뿐 아니라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구조를
세우기 위해 흘린 피는 없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예수를 통해 알게된 하나님은, 내게, 비록 죄사함을 주었지만
몰역사(沒歷史)의 신이요, 몰사회적(沒社會的) 독존자였다.
그리고 내 신앙 그룹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배타적, 독선적이었다.
◑2. 둘째 단계 - 정의의 하나님
출애굽을 모세에게 명령한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이시다.
정의와 자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시는 절대자다.
그러기에 그 분은 저 높은 보좌에 앉아 역사와 사회에 무관심한
초월신으로 남아있기를 거부한다.
억울하게 억압받고, 서럽게 차별 받고,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신이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은 역사참여의 신이었다.
내가 미국에 유학 갔던 196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하나님도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나라는 지극히 적은 자들과 꼴찌들이 주인이 되는 나라다.
흑인노예의 아들과 딸이 백인주인의 자녀들과 함께 한상에 둘러앉아 정답게
식사하는 마당이기도 하다.
이런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는 신이라고 믿었다.
흑인 인권운동에 있어서나, 한국 민주화운동에 있어 we shall overcome의
노랫말은 승리를 확신하는 운동주체들의 최후의 희망적 고백이기도 하다.
정의는 꼭 승리하고 만다는 신념은,
곧 ‘불의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악’이라는 신념이기도 하다.
악을 단호히 배격한다는 뜻에서 정의의 신 또한 배타적이기도 하다.
비록 <탈 역사적> 입장에서 악을 심판하여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제1단계의 신과는 다르다고 하나,
<역사 속에서> 불의의 세력을 결연하게 배척한다는 뜻에서
제2단계의 신도 승리주의 신이요, 배타적 신임을 부인 할 수 없다.
내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기간과 부당하게 해직되어 재야생활을 했던
기간 내내 나의 하나님은 역사참여의 하나님이었다.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혀 있을 때나,
그 후 3년 간 미국 망명생활을 하는 기간에도 나의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에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민중의 고난을 안타깝게 체험하고
가까이 지켜보면서 조금씩이나마 하나님의 <무능력>과 그의 <무반응>에 대해
예민해지기도 했다. 때로는 불평으로, 때로는 분노로 원망하기도 했다.
◑3. 셋째 단계 - 침묵하시는 하나님, 동고신(同苦神)의 모습
불의의 창궐, 불의의 연속적 승리가 계속 펼쳐지는 듯 하는 역사 현장 속에서
계속 침묵만 하시는 신에 대한 나의 원망은
옛날 바빌론 포로 때의 유대인들의 원망과
나치의 학살 제물로 죽어갔던 20세기 유대인들의 불평으로 이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거친 들판에서 이 같은 침묵의 신이야말로
신의 참 모습일 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무력화시키는 신이야말로
무력화된 인간에게 참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여기서 세 번째 단계의 하나님의 모습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스스로를 비우시는 동고신(同苦神)의 모습이다.
1980년 봄과 초여름 나는 당시 중앙정보부 남산지하실에서 지옥 심문을 받았다.
절망과 고통의 심연에 내동댕이침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말씀이 나에게 진실로 다가왔다.
"성경은 꿀맛같이 단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어머님이 평소 하시던 말씀의 뜻이 절망과 공포의 처절한 상황에서
성서를 읽으면서 비로소 가슴에 와 닿았다.
정말 뜨거운 감동의 순간이었다. 텍스트의 주인공이 울면, 나도 함께 울었다.
이것이 바로 성서를 몸으로 읽는 경험이었다.
그러니까 성서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넘어
나의 상황 속에 내려오시어 나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친히 느끼시는 분이었다.
이때 아! 동고신이 나의 신이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나의 하나님도 절망의 밑바닥에서 나처럼 심문을 받고 계시구나 하는 진한 느낌.
그것은 은총이었다.
동고신의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의 사랑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샘솟듯 했다.
이때 내 옆방에서 육체적 고통을 심하게 당하고 있는 목사님 한 분이 계셨다.
그분에게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성서,
나에게 끊임없이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생명의 원천을 주고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 성서를 막상 주려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어떡하나 하고 불안 속에 망설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성서를 찢기로 했다.
4복음은 목사님께 드리고 바울서신은 평신도인 내가 지니기로 했다.
성서를 찢는 불경(不敬)을 감히 저지르기로 했다.
그런데 성서를 찢는 순간의 그 기쁨, 그것은
곧 희망과 용기 그리고 생명을 나누는 기쁨이었다.
내 것을 비워 남을 채워주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이 반쪽 성서를 받은 목사님 방에서 찬송소리가 마침내 들려왔고,
그분의 흙빛 얼굴색이 날로 밝아지는 것을 매일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부활의 모습,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나는 기뻐했었다.
이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한 것이다.
무서워했던 군사재판정에서 피고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애국가를 불렀을 때 내 바로 곁에 함께 계신 하나님.
그분은 힘없는 당신백성 바로 곁에서 그들과 함께 계시어
힘없는 그들의 모습을 지닌 채 그들을 격려하고 계셨다.
아마도 저 아우슈비츠 유대인수용소에서 하나님은 매일매일 그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동고신은 저 높은 영광의 보좌에 위엄 있게 앉아 계실 틈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항상 저 낮은 곳, 어두침침한 곳, 고통의 낮은 현장으로 내려가고 계실 것이다.
이런 신은 자기중심적 유아독존적 존재, 자기완전화(完全化)의 절대자가 아니라,
자기해체(自己解體)의 신이요, 자기를 비워 남을 존재하게 하시는 신이다.
날마다 지구 여기저기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고통
받으시고, 부당하게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죽어가는 신이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너무나 억울하고 처절하게 돌아가신 것도
바로 동고신이시기 때문이리라.
개인의 원죄를 속량하시려는 교리적 이유에서라기보다,
하나님 당신이 지극히 작은이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직접 체험하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하시는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동고신도 따지고 보면 지극히 적은 자들이나 꼴찌의 아픔만을
함께 아파하시는 '편애'의 신이 아닌가?
◑4. 넷째 단계 - 패배하면서까지 껴안고 변화시키는 하나님
이런 안타까운 심경을 지닌 채 나는 폭넓게 껴안으시는 하나님(all-inclusive God)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악을 방조하거나 불의를 부추기는 신에 대한 인식이 결코 아니다.
멋지게 지시면서 악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모든 것을 껴안으시면서
그 속의 불의의 세력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민주화국면에서 나는 복직 복권되었고, 정부요직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전히 번성하는 듯 한 구악(舊惡)의 문제,
악과의 동거 문제를 놓고 나는 계속 고민하는 가운데
악을 껴안고 그 악에 의해 때로는 패배하면서도
마침내 악과 불의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타는 목마름으로 보고 싶었다.
악은 제거해야한다. 그러나 결단코 악의 방법으로 악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당위의 명령일 뿐, 현실에서는 악을 선으로 이기기 어렵다.
오히려 선으로는 악에게 패배하기 쉽다. 십중팔구 악에게 지고 만다.
다만 그 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보라. 빌라도 법정에서 희대의 웃음거리가 된 예수의 그 의연한 모습.
온갖 수모와 배신과 채찍질을 감수하시면서
조용한 침묵과 우아한 평정심을 유지하셨던 예수님.
성서는 이런 장면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비유했다.
우리는 이 같은 그의 고난의 모습에서 속죄의 교리적 가치만 볼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껴안고 용서하면서 아름답게 악을 변화시키는 잔잔한 감동의 모습,
곧 하나님의 패배의 미학(美學)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 하나님은 결코 로마 황제 시저의 오만한 승리의 신이 아니었다.
시저의 신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숭상하는 필승의 패권적 신이었지만,
예수의 신은 "왔노라, 당했노라, 졌노라"를 고백하는 멋진 패배의 신이었다.
처참하지만 의연한 패배가 있었기에 아름다운 부활의 승리가 있는 것이리라.
심지어 죽음까지도 즐겁게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나.
이 같은 패배의 미학을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은 악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 악을 꼭 껴안고 오래 참고 참는 하나님이시다. 인고(忍苦)와 자비의 신이다.
바로 이 진리를 예수는 산 위에서 이렇게 설파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이 말씀은 원수사랑을 강조하신 뒤 곧이어 하신 말씀이다.
악과 불의와 동행하고 동거하면서 참을성 있게
그것들을 껴안고 변화시키라는 당부이기도 하다.
악 자체를 사랑하거나 불의를 즐기라는 뜻으로 그것을 껴안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껴안으므로 그것들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혹시 변화시키려다 악에 의해 처참하고 억울하게 패배 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평정한 마음으로 의연하게 수용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멋지게 지라는 명령이다. 그래야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를 맞거나 햇볕을 쬐일 때마다
이 같은 껴안으시는 하나님을 보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악과 불의에게 햇빛과 비를 고루 주시는 하나님은
암탉과 같은 하나님이기도 하다(마 23:37).
암탉은 자기 품안에 다른 새의 알이 있어도 그것을 품는다.
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듬고 키워준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종교적 악과 세속적 불의를 보고 탄식하고 눈물 흘리셨다.
당신 스스로가 암탉이 되어 그들을 병아리처럼 품어 그 생명을 보듬어주시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 못해 눈물 흘리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온갖 다른 알들을 품어주는 포용의 하나님이다.
원수의 알도, 불의의 알도 품어서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전폭적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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