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과 말씀 고후3:6, 고전2:10, 시119:18 출처 분실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 사역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신다.
바꾸어 말해서, 성령의 역사가 없는 말씀 사역은 아무 의미가 없다.....
▶율법과 성령
①“의문letter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요”(고후 3:6)
의문이란 문자 또는 조문을 뜻하는데, 기록된 말씀 또는 당시의 구약율법으로 본다.
(오해) 이 구절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율법을 마땅히 버려야 할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오해라고 본다.
율법/말씀을 ‘죽이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전체적 성경 맥락과 맞지 않다.
(정정) <성령의 역사 없는 율법은 죽이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 없는 말씀은 죽이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야할 설교가 어쩌면 죽은 사람을 더 죽도록 만들 수 있다니 정말 무섭다.
바꾸어 말해서, 율법 또는 말씀이 오직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선포되어질 때 그것은 사람을 살린다.
그러므로 ‘의문’과 ‘성령’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둘 다 필요한 것이다.
②“생명의 성령의 법”law of the Spirit of life 과
“죄와 사망의 법”law of sin and death (롬 8:2)
이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령+법(율법, 말씀)이 둘 다 역사할 때 온전하게 됨을 뜻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말씀에 성령이 빠지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 된다.
도리어 사람에게 죄와 사망의 역사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또는 율법)이 선포되어지면,
그것은 죄인들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사망의 큰 고통을 준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똑같은 시간에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이제는 치료하고, 살리고, 생명을 회복시켜주는 ‘복음’이 되어야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설교가 ‘치는 설교’로 끝나버릴 때는 거기엔 성령의 역사가 빠졌다는 증거가 된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성령의 9가지 은사 중에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있다. 퍼뜩 생각해 보면;
①지혜의 말씀 -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중에, 신비한 지혜가 떠오른다.
개교회 상황이나 집회 교회의 상황에 꼭 적합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들 때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 원고를 철저히 작성할 때 지혜의 말씀을 받을 빈도가 높다.
또는 설교 원고를 작성해 놓고, 그 원고를 묵상하며 기도할 때 지혜의 말씀이 떠오를 때가 있다.
더 나아가 설교 시간에, 전혀 원고에 준비하지 않았는데도
설교 도중에 '지혜의 말씀' (전에 몰랐던 뭔가를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 떠올라서 선포할 때가 있다.
이런 말씀은 역사하는 힘이 크다.
성경에 보면, 관원들 앞에 잡혀갈 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미리 생각지 말라고 하셨다.
그 때 갑자기 말씀을 주신하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혜의 말씀’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대항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이다(그래서 지혜의 말씀이다, 눅 21:14-15).
심방을 갈 때도 종종 하나님은 지혜의 말씀을 주신다. 거기서 무슨 말씀을 전할까 기도하면
꼭 적합한 말씀(지혜의 말씀)을 주실 때가 많다.
②지식의 말씀 - 저는 이것을 ‘성경 지식’으로 본다.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한 사람이 성령의 영감이 충만한 ‘지식의 말씀’을 증거할 확률이 그만큼 높다고 본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통달한 학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에스라 7:6, 12, 21)
그는 위기에 처한 민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해내었다.
요즈음 멀티미디어 시대에 상대적으로 성경 앞에 앉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미디어 앞에 앉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강단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저처럼) 설교할 거리가 없어서 본문과 대지를 못 잡아서 고민하는 사람은
필히 성경을 읽는 시간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증거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한 구절이 잡힌다. 그러면 그 구절을 토대로 설교원고를 줄줄 써내려 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안 읽으면 설교원고가 한 구절도 안 잡힌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
①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경 말씀을 특별히 잘 깨닫거나 잘 가르치는 분이 있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 수도 있지만, 머리만 좋아서 되는 것은 아니다.
머리 좋은 아인슈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행 7장에서 구약을 꿰뚫은 설교를 한 스데반, 또한 베드로전후서를 쓴 베드로를 보면
우리 같은 보통 머리도, 성령님이 임하시면, 얼마든지 소망이 있다.
②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때로는 성경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통달이 되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통달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③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하나님 말씀이 기이하게(놀랍게 wondrous things, wonderful things) 보일 때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말씀이 기이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바꾸어 말해서 무지 지루한 것이다.
성도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그것이 지루하기 때문이다.
설교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지루하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기이함, 놀라움이 있다.
신문에 보면, 원리주의 이슬람은 유치원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오직 코란 한 과목만 가르친다고 한다. 거기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모두 들어있으므로, 코란 한 과목만 잘 배우면 다 된다는 식이다. 무서운 말이다.
▶성령과 설교
①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1-5)
②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 1:5)
성령이 임하시는 설교와 기도는 대개 평소보다 음성이 커지고 톤이 높아진다.
그 때는 큰 목소리와 쩌렁쩌렁 울리는 톤이 듣기에 거부감이 전혀 없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지 <않는> 설교와 기도에 톤이 높아지면 거부감이 생긴다.
그러므로 그 때는 차라리 조용한 목소리와 낮은 톤으로 설교와 기도를 인도하는 것이 훨씬 낮다.
적어도 솔직함과 겸비함은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통성기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임하심이 미약한데도
스피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통성기도를 드리면 금방 탄로 난다.
성령운동이 종종 “시끄러운 자들”(holy rollers)로 비난받았던 것은 약간의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크고 발을 굴리면서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