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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 찰스 스펄전

LNCK 2020. 7. 22. 16:16

 

www.youtube.com/watch?v=16eVDd1UfuA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고후4:6            영어출처        출처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Jesus Christ

찰스 스펄전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사도 바울은 자신이 왜 그렇게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성한 빛을 받았고 그 빛을 전파할 의무를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선교의 강력한 동기 중의 하나가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탁 받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 세상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보화를 채워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빛을 반사하고, 그 지식을 나누어 주고, 그 영광을 드러내고, 구세주의 얼굴을 가리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심으로 서둘러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바울이 그렇게 기뻐했던 지식의 주제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전파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값진 그 지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가장 필요하고, 마땅히 알아야 할 지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창조자시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애처로운 무식쟁이입니다. 사람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과목은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사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회심하기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바울이 했던 만큼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단순히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는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있기 전에 구약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더 가까이서, 좀더 분명하게, 좀더 확실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성육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지금과 같이 그렇게 영광스럽게 나타나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교육을 받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경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에 선포되고, 땅 위에 드러난 창조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는 시내산에서 선포되었고, 모세의 얼굴에 견딜 수 없는 강렬한 빛을 비추었던 율법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보다 뛰어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던 그때, 그의 회심시에 이 특별한 지식이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험을 하고 새로운 계시를 받음으로 그의 이 지식이 굉장히 향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음으로 그것을 완전히 알고자 애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고 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빌 3:10).

 

사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안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을 안 것이 아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안 것이었습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지식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배격한 유일신론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모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알고자 목표해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심사숙고 한다 할지라도, 금생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여러 분야의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주제넘게 알 수 없는 것을 꼬치꼬치 캐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몽상가들과 그들의 몽상을 떠나서 예수의 얼굴에서 비취는 선명한 빛을 따라가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어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하겠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확신컨대 그러한 질문은 부당한 질문이며 우리가 알 필요도 없는 질문입니다. 진실로 그 계시는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는 이 덧없는 인생을 통해서는 다 배울 수 없을 만큼의 방대한 것이 계시되어 있으며, 말씀이 육신이 된 그분에게서 빛나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발견하기에는 영원이라도 오히려 짧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무엇을 보충하려는 자들은 먼저 태양 빛을 더하거나 바닷물을 더 채우려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의 인격 속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만족 해야 하며 그분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 요 14:9).

 

교우 여러분, 설교자인 제가 이 엄청난 주제를 다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주제에 제가 압도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많은 묵상을 했지만 저는 그 길이와 넓이를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잡고서 저의 기쁨이 크지만 한 편으로는 머리와 가슴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첩첩 산중에서 방황하는 어린아이와 같고,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길 잃고 헤매는 외로운 천사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장엄한 봉우리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찬란한 광채 속에서 기가 꺾여 버렸습니다. 저는 제가 보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그리스도의 것들을 취하셔서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잠시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인, 나사렛 예수의 생애 중의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행적에 계시된 하나님을 기록하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책이 되겠습니까! 저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로서의 그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놀라운 영광이 그곳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렇게 높이 생각하는 세상의 화려함과 영광을 분명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대리석 궁전에서 태어나 왕가에서 쓰는 귀한 천에 싸여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것들을 경멸합니다. 육축들 사이에 있는 구유에서, 우리는 사치품이나 과시하는 것과는 무관한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의 인격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왕실과 궁전의 광채의 도움을 원치 않습니다. 그분은 비록 아기이지만 군림하고 통치합니다. 먼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와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동안, 목자들이 새로 태어난 왕에게 문안 드리기 위해 어떻게 서두르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낮아 지셔서 자신을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보이셨을 때도 여전히 왕권을 행하시며, 인간의 경의(敬意)를 받으십니다. 그분은 초라한 곳에서나 화려한 곳에서나 똑같이 위엄이 있으시며 베들레헴의 아기로 있을 때나 훗날 호산나 찬송을 들으며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장성한 성인이 되었을 때나 똑같이 당당하십니다. 불과 12살 되었을 때에 성전에서 율법사들 사이에 앉아 있는 거룩한 소년 예수를 보십시오. 그 질문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소년에게 얼마나 놀라운 지혜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 고전 1:25). 라는 진리가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유보하시고, 아이에게 합당한 언변을 주셨을 때에도 나이 많아 지혜롭고 사려 깊은 자들을 당황케 하였습니다. 목수의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저 청년을 살펴보십시오. 아버지의 명하는 대로 설계하고 톱질하고, 자르고 짜맞추며 일하고 있는 그를 보십시오. 그는 30세가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노동자의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성육하신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다리시는가를 보지 못하겠습니까? 그것은 영원하신 분이 쉬고 있는 것을 교묘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한하신 분은 힘이 있으면서도 그 느릿한 보폭을 급하게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그분이었더라면, 우리는 오래 전에 서둘러서 우리의 필생의 사역을 착수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하지 않고 참고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열정을 신중히 억제할 수 있는가를 보게 되며, 자신의 목적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영원한 안식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베들레헴이나 나사렛에서는 그 신성이 육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가진 자들에게는 계시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그 어린 시절에도, 그분은 자신의 그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분의 앳된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공적 사역에 대해서는 얼마나 분명하게 신성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형제 여러분,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동안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우주의 식량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손을 펼쳐서 모든 생명체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그러면 귀신을 제어하는 신적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를 불러 일으키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그의 신적 권세에 경의(敬意)를 표하게 될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치료하는 그분을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신 32:39)라고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음성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들으며, 어떻게 조금도 오류 없이 진리를 계시하시는가를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지혜로운 자들이 그들의 교훈을 의지하고 있는 지식의 하나님을 여러분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음 두 문장을 마주 놓고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시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 욥 36:22),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 요 7:46).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방법이었고,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이 사람들 가운데 신실하고 겸비한 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거하셨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분은 농부들이 입는 작업복을 입었고, 오두막집에 들어가셨으며, 그들의 가난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자기 제자들의 발까지 씻겨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겸비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리를 굽혀 하늘을 살피시고, 고개를 숙여 천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시며, 사람들을 찾아 가시는 것을 싫어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생각하시며, 비천한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형제 여러분, 또한, 날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의 조롱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히 12:3) 참으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놀랍도록 오래 참으심에 대한 멋진 그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참으로,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또한 그분이 그들을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품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보모가 아이를 돌보듯이 돌봤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보게 되고, 범죄한 자녀들을 향한 위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 예수님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바로, 죄와 허물과 죄악을 간과하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죄로 병든 자들 사이에서 의사와 같이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려는 한 가지 목적으로 살아계심을 압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의 사죄의 긍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를 즐거워하시며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모두 살펴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며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님이 등장하는 어떤 단순한 사건을 택해서 살펴본다 하더라도, 그 사건이 병실에서나 무덤에서나, 연약한 가운데에서나 능력 가운데서나 어떤 형편 가운데서 일어났던 지간에 여러분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사역을 통해서, 그 기간은 주로 굴욕의 기간이었습니다. 인격에서, 그 행적에서, 그 성품에서 영원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비취고 있습니다. 그분의 행적은 칭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경배의 대상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제가 어떻게 말씀 드려야 좋겠습니까? 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양들을 위하여 내어놓을 때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선명하게 계시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죄를 멸하시고 율법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친히 죄의 저주를 담당하고자 했을 때보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렇게 분명하게 불길을 내뿜은 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십자가에 결집되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상처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영원한 섭리와 무한한 창조물 이 그에게 계시할 수 있는 것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더욱 잘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켜보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마 27:54) 라고 소리쳤던 백부장이 두려워 떨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려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을 때 정사와 권세를 폐하시고, 사망을 사로잡고, 무덤을 여셨습니다. 그분의 이 말씀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계 1:17~18). 그분이 권세, 그분의 영원함, 그 분의 사망의 그늘을 떨쳐버렸음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분이 승천하여 원래 계신 곳으로 다시 돌아간 것에 대하여는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분께서 승천하실 때 그분의 신성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승천하신 여호와의 영광이 천사들과 구속 받은 성도들의 환호와 갈채 중에서 보였습니다. 그분은 강림하심으로 어두움의 권세들을 멸하셨고, 그 후에 승천하셔서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좌정해 계신 그분에 대해서는 간단히 암시만 하겠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만 성도들이 그를 둘러서서 찬양하고, 능력과 권세들이 그 앞에 엎드리네.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통하여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 모두 위에 감미로운 광채를 비추시네. 천국에서는 예수님을 영원히 둘러싸고 있는 거룩한 영광을 떼놓고는 예수님을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그분의 신성을 의심치 않습니다. 모두가 그분 앞에 부복하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성도들 이 하나님과 그 어린양을 찬양하기 위하여 그들의 거문고와 비파를 들고 탑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주님의 재림 때에 가장 잘 드러날 것입니다. 재림 때의 그 찬란함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이 천 년의 통치와,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하나님께 바칠 그 마지막 때를 감쌀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알려준 그때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성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이 똑똑하게 보일 것이며, 천사들이 아들에게 있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영광을 보고서 찬양과 경배의 눈길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 드린 것들이 대강의 주제들입니다. 저는 단지 그러한 사실들이 있음을 지적만 하고 여러분 스스로 묵상하도록 남겨 놓겠습니다. 사람들이 음식에 대한 식욕을 강하게 느낀다면 그들에게 식탁이 있는 곳을 가리켜 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입니다. 지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과 생각의 방향은 같으나 다만 방법을 달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관찰하는 방법으로 그 사실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물질적 우주를 바라볼 때도, 여러분의 눈이 열려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한 마음을 지닌 자들은 그것에 예배를 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고, 나중에는 그것을 더욱 더 동경하게 됩니다. 저는 지구가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프스 산맥을 여행하면서 너무나 장엄한 수 많은 창조의 현상, 즉 빙하, 눈사태, 사나운 폭풍 등을 보게 되었을 때 저는 눈에 보이는 것들로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이 너무나 협소함을 강렬하게 느끼고 다음과 같은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무한하신 분의 형상을 담기에는, 피조물이란 거울이 너무나 작구나 하나님께서 창조물의 이마(알프스산을 가리킴 : 역주)에 인을 치고 자기의 이름을 아름답게 새긴 것이 사실이지만, 노련한 도공이 그 녹로 위에서 빚는 그릇보다 훨씬 나음 같이, 하나님도 그와 같도다. 오히려 그렇게 비하는 것도 거리가 너무 머니, 여호와는 그 지으신 진귀한 작품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시다. 여호와께서 앉으시면 그 무게에 눌려 땅의 육중한 수레바퀴라도 부서져 벗겨지고 그 축들도 부러지리라. 영원하신 분이 쉬기에는 하늘 공간이라도 오히려 좁고, 시간은 그 보좌의 발등상 되기에도 너무나 짧구나. 만약 여러분이 심령으로 하나님과 교제한 적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면전에서 난쟁이와 같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생각으로 별들을 획 둘러보고, 우주를 한 바퀴 돌아본다면, 여러분은 하늘, 아니, 하늘의 하늘일지라도 그분을 용납할 수 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인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때는 그 느낌이 너무나 다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영원하신 분의 얼굴을 비추기에 합당한 거울을 얻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골 2:9)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사 9:6) 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이시오 그 본체의 형상"( 히 1:3) 이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안다면 그 지식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아는 지식과 일치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요일 5:20)고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도마와 같이, 여러분도 구세주의 상처 자국을 만지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 요 20:28)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딤전 3:16)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일부분이 아니라 완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피조물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솜씨를 보지만, 그리스도 예수에게서는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 마 1:23).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지극히 부드럽고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그 곳에 하나님의 모든 형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 광채를 가리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기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옛 선지자가 말한 바대로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사 45:15) 이십니다. 이 세상도 하나님을 나타내기보다는 숨기도록 창조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장엄하게 현시하실 때에도 우리는 하박국과 같이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추었도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밝음 그 자체이지만, 그것은 다만 그분을 감추는 두루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시 104:2). 자연의 들판에서는 빛이 인간의 눈에 맞도록 휘장을 드리우고 비췸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질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모든 것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인간이신 예수님의 생애에서 신의 영광이 부드럽게 스며나 오고 있습니까! 어린아이일지라도 두려움 없이 은혜롭게 이 빛을 응시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비췰 때 백성들은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변형되신 예수님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제자들이 그에게 달려가 문안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은 모든 것이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하나님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신성이 인간의 육체를 사이에 두고 매우 부드럽게 비취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죽음을 못 면할 인간이 가까이 가서 보고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이 영광은, 비록 가려 있긴 하지만,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가려있지 않은 모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굉장한 빛을 발하시고 있습니다. 섭리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그 모습을 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계시된 것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서 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속성들이 놀랍도록 조화되어 있음으로, 우리는 그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보십시오. 그분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분의 공의로움도 보십시오.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앉아 계십니다. 그 분의 불변하심을 관찰해 보십시오. 그분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분의 권능을 보십시오. 그분의 음성은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뒤흔듭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한가 살펴보십시오. 그분은 자신의 택한 자들을 신부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도 보십시오. 그분은 그 원수들을 소멸해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폭풍을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과 어린아이들을 그 품에 안을 수 있는 부드러움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완벽한 모든 요소들의 놀라운 결합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므로 그분 안에는 부족한 것이나 과도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선하시며 온전히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 빛이 있고 어두움은 조금도 없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안에 그러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가슴에서 흘러나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사심이 없으시며, 아낌 없이 나누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분이 홀로 거하시며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의 그 기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자신 속에 싸여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 완벽한 행복을 혼자서만 누리기를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창조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이 세상이 존재하기 오래 전에도 그분께서는 수많은 존재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는데, 그것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들을 늘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본성의 그 선하심을 보이시며, 은혜를 베푸심으로 마음을 유쾌하게 하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은 그 피조물들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다른 이들을 축복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십니다. 저는 지금 살아계신 그분의 면전에서 두려워 하며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그분은 살아 계시되, 자신을 위하여 살아 계신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의 삶 속에 살아 계시며, 자기의 피조물이 기뻐하는 것을 즐거워 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지극히 명백하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는"( 마 27:42)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심이 없는 위대한 하나 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십니까? 그분이 언제 자기 자신을 위해 산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행동 중에 단 한가지라도 이기적인 의도로 행하신 것이 있습니까? 자기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한마디라도 있습니까? 그분이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행하신 행동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사셨고 또 그들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분에게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제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에 깊이 빠져들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에는 두 가지 사실이 있음을 찾아내곤 하였습니다. 또 그 사실들을 예수님에게서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높은 언덕에 서서 앞에 넓게 펼쳐지는 전경을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골짜기 그리고 숲과 들판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마치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그 임재하심을 펼쳐놓으시는 듯한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신성(神性)의 넘쳐흐름을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시원하게 보이는 나무, 은빛 시냇물, 추수를 기다리며 익어가고 있는 옥수수의 들판, 소나무를 덥수룩하게 이고 있는 산, 자줏빛 꽃망울을 터뜨린 히이드(황야에 무성하게 자라는 관목, 특히 영국에 많음~역주),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태양이 만물 위에 햇빛을 뿜어내고 있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곤충들의 윙윙거리는 소리에서뿐만 아니라 천둥번개의 굉음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말하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물 속에 들어오셔서 만물을 충만케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갈 때에도 마음속에 그 임재하심을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모든 곳에 두루 계시는 영이십니다. 어떤 장소에도 예수님은 계십니다. 그분은 편재해 계십니다. 그분 외에 누가 베들레헴이나 나사렛 또는 예루살렘에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분 외에 누가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 각인을 모두 만나주시는 역사 속의 유일한 분이 아니십니까? 저 는 예수님이 제 앞에 계실 때에는 가이사나, 로마나, 지상에 거하는 수십억의 모든 사람들을 그림의 배경에 나오는 조그만 인물들 이상으로는 생각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에 있어서 그분은 지극히 명백하게 충만하신 분이요, 만유를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등장하는 장면의 모든 장식품들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분의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영광의 홍수 속에 잠겨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넘쳐 나오는 영광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꼈을 때 분명히 또 다른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물이 하나님을 향하는 내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창조된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 님의 보좌를 향하여 움직이려는 듯이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서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자연에 펼쳐있는 모든 나무와 언덕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솟아오르는 것 같고,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 같고, 실제로 하 나님께로부터 나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있음을 황홀하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도 그와 꼭 같지 않습니까? 그분은 만물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들이고 있으며, 만물을 몰아 그 자신에게서 하나로 융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 더러는 움직이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그분의 인력은 그것들에게도 역시 미치고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것들은, 그의 하신 말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 요 12:32) 그 말씀 그대로 급하게 그분에게 날아갑니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서 우리가 살펴본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도 역시 있음이 충분히 입증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영광이 동일한 것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제가 원하는 만큼 분명하고 명백하게 제 생각을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은 만약 여러분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을 하나님의 그리스도께로 돌렸다면, 여러분은 가시적(可示的) 우주에서 보는 하나님을 그분에게서도 볼 것이며, 동일한 영광이 그분에게서 비취는 것을, 오히려 더 선명하게 비취는 것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만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한 분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영광스럽게 나타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요 1:18).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사상을 경험의 방법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령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가르침을 거룩하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이 그 가르침의 도덕적, 영적 영광을 인식했던 것이고, 그 진리의 가르침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보혈로 말미암은 평화와 용서를 말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만유의 주로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대속이 완전함을 알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그곳에 계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내 구주" ( 눅 1:47) 두 표제어의 결합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님이 임재해 계심을 자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엄청난 두려움에 쌓여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졌고, 여러분의 심령이 침잠하여 떠는 가운데 그분을 주요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허리를 굽혀 사랑을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고 하셨고, 여러분에게 자기의 마음을 열어 여러분이 자기에게 얼마나 귀중한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이 느낀 환희는 너무나 거룩한 것이어서 여러분은 의문의 여지없이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뜨겁게 고양(高揚)시키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런 때면 우리는 이전에 세상에서 들어왔던 모든 진리가 그분 안에 있는 진리와 비교하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음을 느꼈습니다. 또한 그분의 성령이 우리의 영혼과 접촉할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영들이 우리를 감동시킬 만큼 영향력이 있지 못했음을 느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분의 무한하고, 모든 것을 굴복시키며, 고양(高揚)시키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이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지식의 특성을 살피면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또 어떤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됩니까?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오류가 없는 증언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마 17:5). 우리는 주 예수의 신성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 ( 요일 5:20). 믿음으로 우리 주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다면, 다음으로 우리의 지각력을 사용하여야겠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셨음을 그분의 생애가 충분히 입증함을 우리는 묵상과 명상으로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영광이 그분의 생애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 기자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내용들을 더욱 더 신중하게 보면 볼수록 우리 앞에 단순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아님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만약 하나님이 이 땅에 계신다면 어떻게 행하실까? 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 가운데 계신다면 어떤 모습이실까를 여러분이 마음을 바쳐 묘사하려고 시도한다면 제가 확신컨대 여러분이 당장에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사복음서 기자가 묘사해 놓은 것을 가져다 준다면 여러분은 말하기를 " 내 일은 끝났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멋지게 묘사해 놓은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까지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내리라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분명히 단순하고, 꾸밈없고, 열린 마음의 예수의 행위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행적과 하나님의 행하심이 똑같음을 단번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지성을 지닌 자들이 하나님이라면 행하셨으리라고 생각해낼 수 있는 그것을 정확히 예수께서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많이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성이 있음을 내적으로 의식(意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그 사실을 믿었거나, 관찰함으로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접촉하여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두 분이 한 분인 것을 인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두드러진 성품들인 진리와 성결 그리고 사랑을 더욱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심령으로 알며, 우리의 감정이 순수해짐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심을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의 영혼이 황홀감에 싸여 그리스도와 교제할 때는, 우리의 사랑하는 그분이 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냉소를 띠우게 됩니다.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면, 우리가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또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닮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는 동안 그분의 순결함을 바라본 우리의 눈이 순결해진 것입니다. 그분의 밝게 빛남이 우리의 시력을 좋게 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 입니다. 태양빛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의 눈을 강건하게 합니다. 저는 우리가 은혜 가운데서 성장해감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더 많이 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점점 더 그렇게 접근해 갈수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시야가 날마다 넓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의식하고, 그 사실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변화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이 지식을 전달해주는 수단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까?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왜 모든 사람들이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왜 그런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장님들에게는 햇빛이 아무리 밝게 비춘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눈멀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연 속에 희미하게 비취는 하나님의 모습은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전혀 식별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서 무시 당하고 거절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둠의 임금인 이 세상의 신이 있습니다. 그 놈은 빛을 미워하기 때문에, 빛이 인간의 마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인간의 마음에 있는 천성적 어두움을 더욱 짙게 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확신 시키고 있습니다. 그 놈은 오류와 허위, 더러운 상상들로 인간의 마음을 눈멀게 합니다. 그 놈은 깨끗지 못한 욕망이나 지독한 무지 또는 교만 등으로 인간의 영혼의 창문을 막아 버립니다. 우리가 단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가 천성적으로 눈멀어 있었고, 악마가 우리를 어두움으로 감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청결치 못했던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원하신 은혜에 끝없는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친히 빛을 비추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면 빛이 있었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셨습니다. 여러분은 창조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만물이 어떻게 흑암 중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만 했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흑암 중에 지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우리에 게는 만물이 창조되지 않은 것과 똑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고하셨습니다. 이제 생각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모두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식별해 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계속 그런 상태에 있고, 또 그런 흑암 중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었던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 에 영원한 아침이 열리던 때에 빛이 어둠에 비취었고, 그 빛 앞에서 어둠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그 빛 줄기가 여러분의 영혼에 들어오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이 기억하신다면, 제가 알기에, 그 새로운 빛 아래서 여러분이 처음 본 광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사실 그 빛이 여러분에게 비취 목적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 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 간에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고, 여러분의 생각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 사 36:9) 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빛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았던 것입니다.

 

믿는 모든 분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마 16:13) 고 질문하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시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의 그 고백에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응답한지에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마 16:17). 여러 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전 12:3). 여러분은 지금까지 예수를 주라고 말해왔고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위에 성령께서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자니" ( 요일 5:1).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난 자들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요일 2:23).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의 눈을 여셨고 여러분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제가 설교하는 동안,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이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분의 이름은 우리의 종교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이름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분이 아기로 있을 때, 또 그분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당할 때도 그분 안에 있었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그분이 승천하여 지금 하늘에 계심을 의심할 것도 없고, 또 그분께 예배도 드리고 있지만,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겠고, 그분 안에 특별한 영광이 있음을 보지도 못하겠어." 그러나 또 다른 분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목사님 말씀이 맞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하나님께로 화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셨어.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어. 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내게 대하여 보여주시는 그 친근하심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하나님과 조금도 친근할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었던가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인성(人性)을 가질 수가 있는가를 알기 전까지는, 내가 어떻게 신성(神性)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 그 사실을 알기 전에는 그분이 그의 아버지께로 나를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에게로 나를 인도한 사실을 몰랐지." 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십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모든 구원이 되시며, 그분이 여러분의 모든 소망이 되십니까? 여러분은 그분을 앙모합니까? 여러분은 그분 의 명예를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합니까? 여러분은 그분을 위해 살고 또 그분을 위해 죽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께 속해 있음을 확신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로, 이 지식을 소유한자들의 의무에 대해서 언급함으로 설교를 끝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중에 상당한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본문의 의미하는 바가 바울이 왜 자신이 복음을 전파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4장 9절을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신 이유는 그 빛을 우리가 다시 비추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빛을 주신 것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열방에 비추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해석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떻든지 그 내용이 진실한 것은 압니다. 사람에게 등불을 주는 것은 그가 그것을 감추도록 함이 결코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빛을 받은 후에,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중대한 목적은 받은 그 빛을 순수한 그대로 반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빛을 여러분의 내면에 감추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신다면 그 빛은 여러분에게도 비취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방이 햇빛으로 가득 차 있을 때, 하인에게 "빨리, 서둘러서 덧문을 내려라. 그래서 이 소중한 빛을 우리만 즐기도록 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친구의 방은 캄캄해질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을 받았을 때에는 "나만 이 빛을 간직해야겠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욕망이 그 빛을 차단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빛이 여러분을 관통하게 하십시오. 그 빛이 모든 곳에 비취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그 빛을 받은 것은 그 빛을 반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빛을 흡수하는 물체는 어둡습니다. 우리는 그 물체를 검다고 칭합니다. 그러나 햇빛이 빛나는 곳에 반사경을 매달아 놓아 보십시오. 그것은 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나 밝게 빛남으로 여러분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물체는 받아들이는 빛을 반사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밝은 정도가 정해집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여러분도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빛을 흡수한다면 여러분은 검게 될 것이고, 만약 여러분이 그 빛을 널리 반사한다면 여러분은 찬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았던 빛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2의 태양이 될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제가 설교하려고 강단에 올라섰을 때 제가 서있는 맞은편 건물 모퉁이에서, 그곳은 해지는 반대 방향인데, 그 곳에서 둥근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곳이 태양이 지는 방향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저 거리 맞은 편에 대형 창문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인데, 그 창문이 태양 빛을 너무나 잘 반사하고 있어서, 제가 태양이 거기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거의 그 빛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창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찬란하게 빛남은 눈이 부셔서 못 볼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그와 꼭 같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빛을 받을 때, 완벽하게 반사하여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가 꼭 빛 자체인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형상을 닮아감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형되어 가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진리를 배웠다면 그 진리를 드러내고,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이 아닌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여러분이 드러낼 분은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판단과 결론과 견해를 가르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치십시오. 예수께서 그 자신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시도록 하십시오. 그분에게 빛을 비추거나 촛불을 켜서 태양을 보여 줄려고 하는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견해로 사람들을 회심시키려고 하지 말고, 빛 자체가 스스로 비취어서 그 빛의 방식대로 역사하게 하십시오. 페인트칠한 창문이 햇빛을 물들임 같이 여러분이 빛을 물들이지 말고, 선명하고 흰 빛이 여러분을 통과하여 비취어서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의 주님을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사심이 전혀 없는 순수한 심정으로 여러분의 빛을 비추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참으로 밝구나"라고 말하게 하지 말고, 그들도 빛을 받고 여러분과 그들에게 임한 그 빛의 근원을 즐거워하도록 비추십시오. 그렇게 비추도록 소원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그 빛을 비추도록 기꺼이 온갖 회생을 감수하십시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는 일에 여러분의 전 존재를 바치십시오. 오, 저는 여러분들이 온 세상에 뛰어다니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이야기를 알리는 민첩한 메신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유창한 웅변으로 세계 각국의 언어를 구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꼭 같이 육체로 거하셨으며, 우리의 슬픔을 지고 가셨고, 우리의 죄악을 없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알리기 원합니다. 오,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 11:28) 고 외치시는 그 메세지를 우리가 나팔과 같은 음성으로 하늘과 땅이 진동하도록 외쳤으면 좋겠습니다.

 

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으며, 허물은 세상에게로 돌리시지 않으시는 사실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하며, 번개같은 펜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써놓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천둥이나 번개를 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여러분의 혀가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나가서 이 사실을 알리시기를 바랍니다. 제 혀도 여기 있습니다. 저도 그 사실을 알리려고 지금까지 노력해 왔습니다. 또 죽어 먼지 속에서 잠잠해지기 전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아들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영접하신다는 이 한 가지 복된 메세지를 쉬지 않고 선포할 것입니다. 형제여, 여러분이 힘이 없어 더 이상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다면, 떠듬거리는 억양으로라도 말하십시오. 자 매여, 여러분의 아기 외에는 그 사실을 들을 자가 없다면, 부드럽게 속삭이십시오. 속삭이십시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임마누엘의 성호가 여러분의 아기의 귀에 부드럽게 들리도록 하십시오. 젊은이여, 여러분은 힘과 재능이 자라가고 있습니다. 와서 이 일에 여러분 자신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은발의 노익장 여러분, 여러분이 침상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예수의 사랑을 여러분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그들이 그들의 아들들에게 말하도록 하고, 다가오는 대대에 그 이야기가 전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인류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 1:14). 아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축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