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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녹스, 스펄전, 웨슬리 이야기

LNCK 2020. 9. 2. 07:00

◈존녹스, 스펄전, 웨슬리 이야기        행1:14~15           이재철 목사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가다락방에 모여있는 120명의 성도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고

그들이 그 곳에서 기도한 내용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 역시

앞으로 자기들의 삶을 통해서 얼마나 엄청난 일이 전개될 것인지는

아직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120명 가운데

이름이 밝혀져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나머지 대부분은 이름도 알려지지 아니한 무명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명의 존재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는 바로 이 순간 이때부터

실은 세계의 역사는 새로워지고 있었습니다.

새역사의 거대한 물줄기가 바로 이곳에서부터 발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삶과 전혀 무관한 천상이나 전설 속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새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황제 황궁이 아니라

로마제국 변방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부터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그 당장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지금 그 마가의 다락방에서부터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들은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할 정도로 무명의 존재요,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그들에 의해 세계의 역사가 새로워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교회사에서 드러난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6세기 유럽대륙에서 시작되었던 종교개혁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John Knox 1524~1572) 입니다.

 

그는 제네바의 개혁자 칼뱅을 곁에서 도우면서 칼뱅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국 퓨리터니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영국 장로교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장로교회 역시 존 낙스의 장로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존 낙스는 이 정도로 미국과 영국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존 낙스를 개혁자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어주었던 사람은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한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 입니다.

바로 그 수도사의 강론이, 기독교 본질에 대한 존 낙스의 그릇된 눈꺼풀을 벗겨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존 낙스와 같은 위대한 개혁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존 낙스처럼 위대한 개혁자가 될지도 모를 누군가의 눈에서

그릇된 눈꺼풀을 벗겨준.. 한 명의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19세기 찰스 스펄전은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설교자였습니다.

지금부터 무려 150년 전에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매번 1만 5천 명의 관중이 운집하곤 했습니다.

마이크도 없던 시절에 1만 여명의 군중이 회집했다면 참으로 놀라운 숫자입니다.

 

원래 스펄전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잉글랜드의 벽촌에서 사춘기를 거치는 동안에 깊은 신앙의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시골 작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을 때 입니다.

그날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설교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목사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회중 석에 앉아 있던 한 교인이 강단에 올라가서 대신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설교가 찰스 스펄전의 마음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세기의 설교자,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찰스 스펄전과 같은 세기의 설교자,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혹 찰스 스펄전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될지도 모를

신앙의 회의 속에 빠진 한 청년의 심령 속에

복음의 불길을 던져주는 한 명의 교인이 될 수는 있습니다.

 

▲18세기 감리교를 창시했던 존 웨슬리는 본래 영국 국교회 (성공회)의 목사였습니다.

그의 나이 32살 때에 미국 선교를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고, 그에게 되돌아온 것은 깊은 좌절과 영적 무력감 뿐이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2년 만에 영국으로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대서양을 건너던 중에 설상가상으로 그가 탄 배가 큰 폭풍을 맞게 됩니다.

 

폭풍속에서 통제력을 상실한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모두 죽음과 절망의 공포에 빠졌습니다.

웨슬리 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웨슬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폭풍속에서 요동치는 그 공포의 배 속에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몇 명의 청년들이 태연하게 기도하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형제 단원들이었습니다.

모라비안 형제단이란,

지금의 체코인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후스의 신앙을 계승하는 자들이

보헤미아의 동부 모라비아 라는 지방에서 결성한 신앙 공동체의 이름입니다.

 

극심한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서 모라비안 형제단들은 온 사방으로 뿔뿔이 헤어졌었는데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후원 하에, 그들이 재결집해서 왕성한 전도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폭풍속에서 태연히 기도하는 그 청년들의 모습은

웨슬리에게 충격과 수치심을 함께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웨슬리로 하여금 참 신앙인의 자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기만 했던 자기 자신은

감히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할 처지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영국에 돌아간 뒤에도, 신앙인의 참 자세를 그 무서운 폭풍속에서

의연하게 보여 주었던 모라비안 형제 단원들의 모습이

자기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에 있는 모라비안 형제 단원들과 접촉도 해 보았지만

그러나 그의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독일(헤른 후트 공동체)로 건너가서 모라비안 형제단원들의 후원자이자 지도자였던

진젠도르프 백작을 직접 만나 그로부터 많은 것을 듣고 배웠습니다.

 

이처럼 웨슬리의 회심과 새출발에 모라비안 형제 단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결과 감리교단을 창설했던 웨슬리는

오늘 날 150만명의 감리교인이 있는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웨슬리처럼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처럼,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알지 못하는 청년들 앞에서

바른 신앙의 본을 보여 주는 한 명의 모라비안 형제단원이 될 수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