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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기 때문입니다

LNCK 2020. 11. 12. 22:35

 

◈모르기 때문입니다                 눅23:32~38, 요11:50              2020.11.08.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유명한 <벤허>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마지막 부분에 보면, 어떤 사람이 벤허(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일생동안 억울하게 학대를 받으며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칼을 쓰지 않고 무저항주의, 박애정신으로 일관하며 그렇게 희생적으로 살다가
최후에 승리를 했습니다만.. 어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벤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골고다 언덕 그 자리에 저도 곁에 있었습니다.
그 모진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가시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말이 제 귀에 들려올 때, 나는 가슴이 무너지고
내 손에서 검이 떠나가는 것을 내가 느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일생동안 검을 손에 쥐지 않고 살았습니다."
 
최고의 승리, 그것은 ‘용서’입니다.
최고의 강자, 그는 용서의 사람입니다.
 
프레드릭 러스킨 교수의 <용서>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용서 못하면, 그 사람은 과거에 묶여서 사는 사람이다.
용서함으로만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2. 용서하지 못하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약속된 미래,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용서하고야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용서하고서야 자유인이다.
아직 용서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면 그는 절대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유인이 아니다.
깨끗한 자유인은 용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용서는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눅23:34
놀랍게도 내면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용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속에 증오가 가득하다면.. 그건 용서가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용서가 아닙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도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어느 한 구석이라도 한이 맺혀 있고 증오가 있다면
결코 그것은 아직 용서가 아닙니다.
 
그런고로 그런 사람은 아직 자유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호4:6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릴 것이다.’
 
지식이 없어서, 아직도 모르기 때문에.. 용서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는 것 같지만, 진리를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11장에 아주 드라마틱한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를 못 박아야 하느냐/말아야 하느냐,
체포해야 되느냐/말아야 하느냐..
이 예수 문제로 산헤드린 공회가 모여서 머리를 싸매고 걱정하고 있을 때
 
당시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아주 유명한 명언을 합니다.
‘너희는 아무 것도 모르는 구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요11:50
 
이 말은 공리주의적, 정치적 판단입니다.
공리주의란, 작은 희생을 통해서 많은 다수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옳으냐/그르냐, 정의냐/아니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다수의 이익만을 따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공리주의가 아닙니다. 진리가 먼저이고, 정의가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선입니다.
평화나 번영이 먼저가 아닙니다. 진리와 공의입니다.
 
진리와 공의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번영이 있는 것이죠.
만약 공의는 무너지고, 정의도 무너지고
그러고 나서 번영과 자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2천년 전에 벌써 가야바가 공리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 사람 아리송하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알 바 아니다. 예수로 인해 시끄럽다. 그로 말미암아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더 큰 위태한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이 민족은 어렵게 된다.
그런고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아닌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죽여라!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죽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는 그들의 명분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지식입니다.
 
바른 지식은 의와 진리가 먼저입니다.
번영과 평안이 먼저가 아닙니다.
 
▲참으로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유명한 <우상론>이란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어리석다.
1) 첫째, 극장의 우상 .. 추상과 향락을 추구하면서
극장이라고 하는 데서 많은 사람들이 와 와 소리 지르는 것 같은 모양으로
그런 극장의 분위기 속에서 들떠 돌아가는 그런 우상이 하나 있고,
그런 고로 아무 것도 모르게 되고...
 
2) 또 한 가지는 시장의 우상 .. 이것은 돈이요, 이기주의입니다.
항상 실리를 계산하고, 손익계산을 하고
항상 이익과 손익계산, 그리고 돈에 매여 있으면
그것도 절대 자유인이 아니다... 감옥이다.
 
3) 동굴의 우상.. 자기 주관입니다.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자기 집착을 말합니다.
동굴과 같이 그 속에 들어가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넓은 세상을 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4) 종족의 우상.. 우리 민족이 제일이다, 과도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어느 사이에 동굴 속에 빠져 들어가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눈에 뵈지 않는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이 되는 위험이 있다.
 
모든 것으로 인해서 사람은 점점 ‘모르게’ 됩니다.
모르는 것이 사실이고, 더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들을 사하소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심각한 말씀을 드립니다.
남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확인하면서
성령안에서 죄사함 받은 나를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자기를 용서해야 됩니다.
 
늘 회개한다고 하면서 계속 자책하고, 자기를 정죄합니다.
그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죄사함 받은 나를 생각하며, 어떤 회를 지었든지 간에
내가 나를 용서하는 자유, 자유인이 되어야만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주신 말씀에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자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왜냐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회개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고 계십니다.
 
만약 이것이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가 아니고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심판하여 주옵소서’ 라고 말씀했다면
그날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 구원의 역사는 끝나는 것입니다. 종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중요합니다. 심판이 아닙니다.
심판하지 않고, 은총의 길, 구원의 길,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기도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왜 저들을 용서하셨습니까?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언젠가 저들이 알게 되면 돌아올 것이라고.. 내다보신 것입니다.
그때 알게 되면 돌아오겠지요!
 
복음을 들으면.. 전도를 받으면.. 설교를 들으면.. 알게 되겠지요.
그때까지는 저들이 모르니까..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 죄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고, 십자가를 알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저들이 모르니까.. 용서하시고
회개의 문을 열어놓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일방적인 용서’입니다.
아직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조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면 용서하겠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건 거래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율법일 뿐입니다.
 
잘못했다고 시인하면 용서하겠다.. 그건 율법입니다.
그건 은혜가 아닙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눅15장의 탕자 비유를 아시죠?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버지가 왜 내보냈나 싶습니다. 돈 안 줬으면 못 나갔을 것 아닙니까.
왜 내 보냈나요?
 
그리고 나간 다음에는 또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꼭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가 기다리다가 아들이 결국 돌아왔을 때
너무 좋아서 잔치를 벌입니다.
 
아들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를 아들로 부르지 마시고, 그저 머슴 하나로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보면 그 아들이 정확한 회개를 했다는 증거도 부족합니다.
그저 배고파서 돌아온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했습니까? 아닙니다.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용서하고, 언제라도 돌아와라!
벌써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기도입니다.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누군가가 (전도, 설교해서) 알게 할 것입니다.
이제 알게 되면 돌아올 것입니다.
엄청난 복음적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신앙적이고 복음적인 승리가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죽인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용서한다.’
‘너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용서한다.
너희는 모르고 행하고 있다. 나는 알고 십자가를 지노라. 너희를 위하여!‘
 
엄청난 승리의 선포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마음은 자유로웠습니다.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자유하셨습니다.
 
▲가량 실례되는 말이지만 한 마디 할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 모진 고난을 당하시다가
‘이놈들 두고보자! 지옥으로 떨어져라’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모든 역사는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 날로!
그 한 마디가 중요하고, 용서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심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와 대적들을 이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속에 어두움이 있습니까? 근심과 낙심이 있습니까?
자세히 생각해 보세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풀지 못한 것이 있어요.
 
여러분, 섭섭한 생각이 들고, 원망스런 생각이 든다면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나를 괴롭힌 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한 평생 나를 괴롭힌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의 심정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저희의 죄를 사하소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기도를 하십시오.
 
그러면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심판입니다.
내가 할 일은 용서입니다.
 
나는 누구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할 자격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내가 정죄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심판하지 마시고, 내가 할 일은 사랑과 용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여러분,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온전한 용서가 있을 때,
온전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용서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때
내 영혼이 자유로워집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바로 그 순간에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리고 우리 또한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 내가 있고,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여러분, 기도 제목이 많으시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러나 그것도 기도해야 되지만, 더 우선해야 되는 기도는
내 심령을 위한 정직한 기도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나를 용서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주 안에서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영혼의 자유함을 주시옵소서!’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도 주의 전에 나와서 주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
골고다 언덕에서 하신 그 위대한 복음을 다시 한 번 들었습니다.
 
주님, 이제 주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게 하시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있게 하사
온전히 자유인이 되고, 하늘이 열리는 은총과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